[나무를 찾아서] 나무 앞에서 나무처럼 아름답게 이어가는 사람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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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신비를 담고 멀리 날아갈 채비를 마친 민들레 씨앗. |
[2012. 5. 21]
농촌의 한해는 어디라도 씨뿌리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을 품어 안은 자디 잔 씨앗 한 알은 그렇게 농촌의 한해를 엽니다. 이맘 때면 작은 씨앗이 품은 생명의 크기를 한번 더 생각하게 됩니다. 먼저 농부들은 정성껏 모판을 준비하고 그 모판에 볍씨를 정성껏 뿌려서 모를 키워야 하지요. 스무 날 정도 모판 위에서 볍씨는 생명의 꿈틀거림으로 새싹을 파릇파릇 돋워냅니다. 그러면 농부들은 모판을 들고 논으로 나가 모내기를 하는 겁니다. 어제 돌아본 강화 지역의 논에는 이미 모내기가 다 끝났더군요.
볍씨를 뿌리는 파종도, 모내기도 이제는 모두 기계와 함께 하기 때문에 비교적 농사 일은 편하고 빠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그리 만만하지만은 않습니다. 지난 오월 초순, 우리나라의 여러 반송 가운데에 손에 꼽을 만큼 아름답고 큰 나무가 마을 들녘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아름다운 농촌 마을 경북 구미의 독동리를 찾았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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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농부들이 마을의 중심이 되는 큰 나무 앞에 모였습니다. 파종기 앞에 둘러 앉은 분위기에서는 한눈에도 파종을 앞둔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농부 할머니들은 손을 놓고, 파종기 주위에 맥없이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습니다. 일곱 할머니의 망중한(忙中閑) 사이로 두 명의 ??은 사내가 눈에 띄었습니다. 두 사내는 애면글면하는 표정으로 파종기에 바짝 달라붙어 있었지요.
파종기가 고장난 것이었습니다. 고장난 파종기 곁에는 볍씨와 고운 흙을 잔뜩 쌓아놓고, 파종을 준비했지만, 고장난 파종기 앞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죠. 말 없이 파종기를 고치려 애쓰던 사내는 조금 뒤에 농기구 수리점에 가서 고쳐야겠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이제 농부 할머니들에게는 공식적으로 휴식 시간이 주어졌지요. 파종기와 사내 주변을 초조하게 맴돌던 할머니들은 아무렇게나 흙더미 위에 주저앉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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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 곁의 흙더미 위에 저도 함께 주저앉았지요. 늘 그렇습니다만, 일하는 농부들 사이로 파고들어 맥없이 나무만 바라보는 일은 조금 민망한 일입니다. 나무를 바라보고, 나무의 새살거림을 하나 둘 온몸으로 받아 적는 게 제게는 '일'이지만, 힘들게 일하는 노인 농부들 앞에서 한가로이 나무만 바라보고 서 있는 일이 가당키나 하겠어요. 그런 때에는 농부들에게 아무 이야기 건네지 못하고 그냥 서둘러 나무만 바라보다가 그냥 돌아오곤 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젊은 사내(젊다고 해 봐야 쉰을 넘긴 이 마을 이장님입니다만)가 파종기를 고치러 자리를 떠나고 할머니 농부들만 남아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자리라면, 거리낌 없이 끼어들 수 있었어요. 파종기가 돌아올 때까지는 아무 할 일이 없는 상황이니까요. 할머니들은 도시에서 찾아온 제게 파종과 모내기 과정을 꼼꼼히 설명해 주셨지요. 도시 사람이 뭘 알겠냐는 투로 번갈아가며 저를 유쾌한 말투로 놀리시기도 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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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누님이라고 해야 할 에순 남짓의 할머니에서부터 막내 이모 뻘인 일흔 넘은 할머니까지 일곱 분의 할머니의 유쾌한 농담은 투박했지만, 재미있었습니다. 사이사이로 이어지는 할머니들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들녘 여기저기로 반짝이며 흩어졌습니다. 농부 할머니들의 수다한 농담에 역시 유쾌한 대거리로 맞서며 차츰 나무 이야기를 끄집어 냈습니다.
"옛날에 이 나무 옆으로는 개울이 흘렀지. 바로 이 나무 옆이 빨래하기에 제일 좋은 자리였어." 일흔을 갓 넘긴 정씨 할머니는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사신 분이어서 나무를 둘러싼 이야기를 가장 많이 아는 분이었지요. "나무 옆의 땅이 모두 방금 전에 파종기를 고치러 떠난 이장네 땅이야. 여기가 다 밭이었거든. 이 나무는 이장의 옛날 조상이 자기네 밭 한 가운데에 심은 나무야." 다른 할머니들이 한두 마디씩 거들긴 했지만, 정씨 할머니는 아랑곳하지않고 이야기를 계속 하셨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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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에 비해 곱게 늙은 일흔 다섯 되신 박씨 할머니는 이 마을 출신이 아닙니다. 경남 남해에서 몇해 전에 이 마을로 이사 오셨지요. 자식들이 이 쪽으로 생활의 터전을 옮길 때, 함께 따라오신 것이지요. 그래서 박씨 할머니는 마을 나무에 대해 할 이야기가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제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으셨던 모양이에요. "남해 가봤어요? 세상에서 제일 좋은 나무는 남해에 다 있어요." 박씨 할머니 덕에 나무 이야기는 경북 구미에서 경남 남해를 오락가락하며 중구난방으로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할머니 농부들과의 수다가 이어질 즈음, 파종기를 고치러 갔던 이장이 돌아왔습니다. 파종기가 돌아오자, 할머니들은 나무 이야기를 나눌 때의 이완된 분위기를 순식간에 버리고 모두 그야말로 벌떡 일어나서 파종을 준비하셨습니다. 일곱 분이 저마다 맡은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저도 끼어들었습니다. 고운 흙을 깔아 준비한 모판을 파종기에 밀어넣는 일이었습니다. 그냥 파종기 옆에 앉아서 할머니 한 분이 내려놓는 모판을 파종기의 모판 입구에 잘 맞춰 놓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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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람도 써먹을 데가 있네." 파종기의 핸들을 잡고 파종 작업을 주도하는 마을 이장 조필형 씨의 이야기입니다. 잘 고쳐진 파종기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자 안도한 조 이장에게 나무의 내력을 천천히 청했습니다. 나무는 누가 심었느냐, 나무 주변의 땅은 천연기념물 보호구역일텐데, 나라에 내놓았느냐, 안 내놓았으면 왜 안 내놓았느냐, 그런 이야기들이었지요. 그렇게 파종 작업에 일손을 보태며 나눈 이야기들을 며칠 전 신문 칼럼으로 적었습니다.
[나무와 사람 이야기 (77) - 구미 독동리 반송] 신문 칼럼 원문 보기
위의 링크를 클릭하시면 그 나무의 사연을 보실 수 있습니다.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57호인 구미 독동리 반송입니다. 소나무의 한 종류인 반송은 원래 그리 크게 자라는 나무가 아니지요. 뿌리 부분에서부터 줄기가 여럿으로 갈라지면서 마치 부챗살 펼치듯 가지를 활짝 펼치는 생김새가 아름다워 집안 정원에 조경수로 키우는 나무지요. 또 조상의 묘 앞에 심어서 가꾸기도 한 나무입니다. 독동리 반송도 그렇게 아름다운 수형을 가졌지만, 그 규모가 반송으로서는 매우 큰 나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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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듯 불어온 바람에 부러진 가늣한 가지 끝에 생생한 이팝나무 꽃. |
박씨 할머니, 정씨 할머니, 성씨조차 알려주기를 수줍어 하시며 외면하던 다른 다섯 할머니, 그리고 젊은 사내 조필형 이장은 지금쯤 모내기를 잘 마쳤겠지요. 제가 파종기에 조심스레 밀어넣었던 모판 위에서 잘 자란 모는 너른 논으로 옮겨져 이제 푸르게 자라겠지요. 무럭무럭 잘 자라서, 이 가을에도 할머니들이 젊은 이장과 함께 나무 앞에 모여서 흥겹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 답사에서는 순백의 꽃이 활짝 핀 이팝나무를 만났습니다. 이팝나무에 꽃이 잘 피면 풍년이 든다고 합니다. 엊그제 만난 이팝나무는 늙어서 삶에 지친 모습을 하기는 했지만, 꽃만큼은 여느 이팝나무 못지 않게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큰 바람도 없었는데, 가늣한 나무 가지 하나가 부러져 내려앉았습니다. 그 가지 끝에도 환하게 핀 이팝나무 꽃이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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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년을 예감할 수 있도록 활짝 피어난 이팝나무 꽃. |
이팝나무 앞에는 참 아름다운 사람들이 참 아름다운 사람살이를 지어가고 있었습니다. 이팝나무 꽃처럼 환하게 피어나는 아름다운 경남 양산 사람들의 초록 이야기는 다음 편지에서 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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