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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비밀 일기장☆]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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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일기장]
권예자 시집 / 지혜사랑시선 134 / 도서출판 지혜(2015.09.20) /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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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일기장
권예자
나무는
쉽사리 제 이력을 말하지 않는다
특별한 신분이 되고나서야
개인 등록증이 만들어질 뿐
그들의 이력 뽑아 볼 일 없다
나무들이 꼭 해야 하는 일은
거짓 없는 일기를 쓰는 일
바람이 어루만진 감촉
구름이 걸터앉아 들려준 말
꽃들이 내뿜던 향기로운 추파와
달빛이 작곡한 세레나데를 기록한다
폭풍에 맞서던 처절한 기억
딱따구리가 쪼아낸 몸피의 통증도
제 몸 갈피에 촘촘히 새겨 넣는다
숫자를 배우지 않아
이익과 손해를 모르고
걷는 방법도 몰라
늘 제자리에서 늙어간다
누군가 달라고 손을 내밀 때마다
망설임 없이 나누어 주는 큰손을 가졌다
세상과 작별한 후에 비로소 공개되는
나무들의 비밀일기장
신추문예新秋文藝
권예자
앞선 이의 손을 잡고
느물느물 사라지는 시간과
희희낙락 죽어가는 사람들 엉긴
순천만 시사단試士團
갈대들 모여 글을 쓴다
주재와 소재를 고르고
문장 살살 달래어
가야금 궁서체로 시를 쓴다
부드럽고 뜨겁게 격렬하고 냉정하게
쓰고 또 쓴다
갈피 사이사이 숨겨둔 말
샅샅이 골라내어
동그라미 가위 세모 그리고 감점
마침내 오랜 심사를 마친 듯
후루룩 날아오르는
흑두루미 떼
당선작으로 뽑힌 가을이
수평선 너머로
빨갛게 익어가고 있다
하회탈
권예자
서울역 대합실
대기의자처럼 바닥에 깔린
반백의 목숨 하나
새까만 두 손 펴고 엎어져
고단한 꿈이 깊다
과거로 달리는 그의 열차엔
눈물겨운 첫사랑과
우쭐했던 어깨가 동승하여
시멘트 바닥을 기어가고
주름살에 새겨진 그의 고향은
이번 승차에서 누락되었다
대전행 KTX 개찰이 시작되자
고여 있던 시간
우르르 빠져나간다
순간
허공에 걸린 웃음소리
설핏 돌아눕는 사내의 얼굴
안동 하회탈이다
십자가를 지고 껄껄 웃는
알 수 없는 책
권예자
처음부터 꼭 마음에 들었던 건 아니다
재미있게 읽을 자신은 없었지만
제목이 상큼했고 표지가 깔끔했다
달리 눈길을 끄는 책도 없는 데다
도서상품권 유통기한에 쫓겨 그냥 샀다
책 속에 매화와 난초가 수줍게 피고
새들이 날며 초목이 자라길 바랐다
시처럼 곱게 내리는 이슬비
소설처럼 감미로운 대화도 있을 거라 여겼다
때로는 경포대 둥근 달을 보며
파도소리도 함께 듣고 싶었다
책을 잘못 골랐다는 예감은
첫 페이지를 읽으면서였다
그 면에 가장 많이 실린 단어는
아니다 틀렸다 싫다 못 한다
행간마다 태반이 엄살일 뿐
독자를 배려한 구절을 찾지 못했다
몇 십 년이 지났지만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내용
다 읽지 못하고 넘긴 페이지 수두룩하다
단정하던 제본 엉성해지고 표지마저 너덜거린다
이제 그만 덮을까 망설이면서도
어딘지 숨어있을 매력적인 문장을 찾아
낡아버린 결혼의 책갈피를 촘촘히 탐색한다
밑줄 그을 색색의 연필을 준비해 놓고
나를 겨누다
권예자
언어의 살 헤집고
뼈를 발라낸다
모세혈관
그 가늘고 긴 흐름도
놓치지 않는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스스로 해부한 언어의 살점들에
의미를부여하는 것
홑소리 열자
닿소리 열 내 자로 엮어갈
최상의 언어는
이 칼날에서 시작되었다
언젠가 나를 찌르고야 말
재활용품수거통에서
권예자
과거는 묻지 않는다
누구였는지 무엇이었는지
어떤 자리서 어떻게 살았던 상관없다
우리는 그저 깡통일 뿐이다
머리가 비어서
잔액이 바닥나서
얻어먹어야 해서 깡통이다
화려한 이름으로 살던 그땐
당당한 자존심과 팽팽한 긴장감에
주위를 돌아볼 필요 없었다.
꼿꼿이 머리 세우고
한발 앞에 나서려는 발돋움 치열했다
주스 식혜 커피가 되거나
황도 백도 참치 통조림으로
맥주 막걸리로 불리며
욕심껏 제 값을 받았다
제 속 다 비워내고 나서야
깡통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모여
수군수군 내일을 걱정한다
이제야
늙고 병든 몸 서로 다독이며
편견 없는 하나가 되었다
벽에 거는 거인
권예자
말은 할 줄 모르는지만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다
사계 개근이다
그러나 아는 것을 별로 없다
깨친 문자는 겨우 일곱 자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숫자는 고작서른이 고작이고
잘해야 서른하나까지 샌다
가로 일곱 칸
세로 다섯 칸
작은 집에 부대끼며 살아도
불평 한 번 해본 적 없다
재산도 없다
내세울 명예는 더욱 없다
하지만 누구도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뜻을 거역할 자 더더욱 없다
솟대
권예자
어지러워요
높이 있다고 다 출세한 건 아니지요
오리나 까마귀가 가졌던 날개도
내겐 없어요
아이들이 존경할까요
차별대우 정리해고를 모르는
사람들은 쉽게 말하지요
배부른 크레인 철탑 농성이라고
이젠 수직의 등뼈도 휘어
버티기 어려워요
과거에 급제한 가문의 과시
하늘과 땅의 중계자로
장대 끝에 앉아있던 그 날로
돌아가고 싶어요
나 좀 내려가게 도와주세요
태풍이 불어오기 전에
제발,
염장미역에 볶이다
권예자
염장미역 볶다가
내 염장 질렸네
찬물에 담가 소금기 빼고
가늘게 갈라 모양도 내고
들기름 둘러 다독거리며
중간 불에 가만가만 볶고 있는데
앗, 뜨거!
화들짝 일어선 미역 한 줄기
손등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네
파 마늘 후추 넣어 막을 살리고
울긋불긋 피망과 양파 채 썰어
고명을 올리고
통깨를 듬뿍 뿌려 맵시도 내었네
밥상 위에서 출렁이는 바다
출근 바쁜 자족들
나 혼자
염장미역에 볶이고 있네
바닥
권예자
반란을 꿈꾸어 보기도 했을 거야
벌떡 일어나서
위에서 거만하게 내려다보거나
휘젓고 다니고도 싶었겠지
발길에 눌리고 바퀴에찌그러져
비천하다 여기겠지만
그는 우리 모두에게 가능성과 안도를 선물하지
바닥이 있기에 하늘도 잇어
평평할 거라는 것은 착각
울퉁불퉁하면 안 된다는 법도 없어
꼭 아래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야
시대가 변하고 바닥도 층층이 쌓여
높은 곳에 오를수록
투신의 유혹도 몇 배 더 크지
그래도 끝이라 생각하는 지점에서
바들바들 떨다
바닥바닥 뒤척이다
발딱 튀어 오르는 것은 그가 있기 때문이야
절망의 늪에 잠겨보지 않았다면
감히 바닥을 말하지 말 것
길에 갇히다
권예자
길이 없다고요
아니
길이 너무 많아 탈입니다
큰길은 작은 길을 덮고
작은 길이 큰길을 헤집어
제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좌우 위아래로
땅속 깊은 곳까지
보이는 것이 온통 길 뿐입니다
길에 갇힌 지 오래 되었습니다
하늘에도 물속에도 수많은
길이 있지만
길이 길을 막아 가지 못합니다
부탁입니다
쪽문이라도 좋으니
잠시라도 좋으니
제발
문 하나 내어 주십시오
점
권예자
피타고라스
점은 위치가 있는 단자다
플라톤
점은 쪼갤 수 없는 선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쪼갤 수 없는 선이라면 길이가 있어야 한다
유클리트
쪼갤 수 없는 것이다
국어사전
위치만 있고 넓이도 길이도 없는 것
시인
시작이며 마침인 언어다
나도 점에서 태어났다
버리지 못한 사진
권예자
손대면 부서질 듯
붉은 바위로 엎드린 채석강
길손을 맞는마르음 절절하다
뜨거운 약속 파도처럼 흩어지고
던지고 떠난 말 비수로 꽂혀
격포리 바닷바람에
우 우 우 짐승의 울음으로 어둠을 재단한다
그날 밤의 독한 눈빛도
황망한 물살에 휘둘리는 오늘
그녀의 책은 귀가 접히고
버리지 못한 사진 한 장
후두둑 몸을 털며 벌떡 일어선다
책장 갈피갈피 끼었던 검은 말의 파편들
스멀스멀 기어 나와
새해 차디찬 밤 물결에 몸을 섞는다
양파가 싹을 틔운 날
권예자
제목은 양파
무슨 말인지모르겠다
껍질을 벗기고 벗겨도
왜 썼는지 모르겠다
책상에서
식턱에서
소파에서
읽고 읽어도 눈이 아린 시
내던지고
일어서다 문득 보니
글쎄
이것봐라
시집이 나를 읽었네
시들지 못하는 꽃
권예자
폐경의 그 여자
선잠에서 깨어날 깨마다
버릇처럼 인터넷카페에 들렸다
못 마시는 술도 호기 있게 마시고
감추었던 옛 남자와 춤도 추고
짜릿한 도박에 거금도 걸었다
시들지 않는 꽃이 되고 싶던 날
카페를 만들어
한 송이 모란이 되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만질 수도 안을 수도
향기조차 없는 꽃이 되었다
화면 안 상큼한 스물아홉 처녀
카페 문을 닫고
일상으로 돌아올 때면
그녀는 가면을 벗고
녹슨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들 수 있는 꽃은 행복하겠노라고
대전역
권예자
맞을 임 없어도 설레는
보낼 임 없어도 서러운
늦은 봄 대전역
차분히 등을 맞댄
내려야 할 시간과
떠나야 할 시간 사이로
이슬비 내린다
사라지는 꿈과
일어서는 꿈 사이
꾹,
점 하나 눌러 찍는
대전역 플랫폼
낡고 싱싱한 그네
권예자
유치원 담 옆에
조그만 그네 하나
그곳에 하얀 어머니
빗물과 햇빛 사이를 오가며
아픈 내색 없이 그네를 미셨네
꽃과 구름을 넘나들며
흔들리던 그네
당신이 높이 날아가신 날부터
나의 내리막길은 시작되었네
어둠을 키질하던 장대비에도
젊은 엄마와 늙은 딸을
이어주는 그넷줄
한 번도 놓은 적 없었네
오르락내리락
내리락오르락
오늘도 혼자 타고 있는
당신 가슴에 걸린 그네
한 벌의 옷
권예자
어머니께서 주신
보드랍고 깨끗한 최초의 옷 한 벌
늘 하찮고 지겨웠네
나름대로 디자인하려고
헬스에도 가고 다이어트도 했네
유행에 맞춰 새옷 지어 입고
세상을 휘젓고 다녔네
계절마다 덧입힌 수많은 옷들 속
최초의 내 옷 그만 잃어버렸네
왈칵 겁이 나
세탁소로 목욕탕으로 돌아다니며
수건으로 박박 문지르고
비누질해 벗겨 내도
찌든 땟국 말끔히 가시지 않았네
보드랍고 깨끗하지 못했네
이 모양 저 빛깔 고쳐 입기 수십 년
앞태 뒤태 돌려보아도
탱탱하던 윤기 간곳없고
골골이 주름만 깊게 패인
헐렁하고 낡은 옷 한 벌
훔쳐 다는 풍경
권예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았다*는 시를 읽다가
남몰래 임 귓볼에
풍경 하나 달아두었네
바람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풍경
흔들려도 소리 나지 않는 풍경
가만히 달아놓고 시침 떼었네
울어야 알아듣고
몸부림쳐야 알아본다면
그대는 이미
나의 임이 아닐 것이네
*정호승의 시 ‘풍경 달다’서 인용.
당당한 겨우살이
권예자
겨우겨우 살아서 겨우살인가
겨울 같이 추운 세상 잘도 건너
겨우살이인가
큰 나무에 기생해 살다
나무가 죽으면 따라 죽는 겨우살이
의리 하나는 제법이다
예술작품에 기대 사는 겨우살이
집세도 내지 않고
남의 집에 기생하면서
섣부른 자부심 높고 당당하다
유명인에 붙어사는 겨우살이
부풀리고 뒤틀린 카더라 통신*으로
우아한 겉옷 정숙한 속옷 벗기고 벗겨
속살 만지기 다반사
정신마저 죽이기 수십 번이다
뼛속까지 벗겨진 수치에
허약한 모체가 생을 마감할 때
그 죽음마저 가십거리로 삼는
겨우살이 중 별종 겨우살이
* 카더라 통신: 직접 확인된 바 없이 단순히 소문만으로 들은 내용을 그대로 보도하는 것을 말함.
감자를 먹는 사람들
권예자
어두컴컴한 실내 흐린 램프 아래
다섯 사람이 낡은 식탁에 둘러앉았다
막장에서 겨우 빠져나온 그들은
대화를 나눌 기력조차 없다
수척한 얼굴에 어깨를 늘어뜨리고
시선 한 번 마주치지 않는다
저녁을 권하고 차를 따르고
눈동자로 절망을 밀어내며 말을 삼킬뿐
아무도 감자를 먹지 않는다
가난해서 오히려 푸짐한 가족의 식사
안간힘으로 살아낸 하루를 식탁에 차렸다
가장 어둡게 보이나 빛을 품은 소녀의 뒷모습
고흐가 그녀의 얼굴을 감춘 것은
눈부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어디선가는
빛의 실선을 껴안고 등 돌려 앉은
소녀 하나 자라고 있을 것이다
가슴에 꽃씨 하나 간직하고
웃음기가 빠진 감자를 먹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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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살아보니 어렵다
이렇게 저렇게 살다가
어떻게 그렇게 살아지다라
어릴 적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그쯤은 나도 할 것 같아 별것 아니라 여겼다
살아보니
이렇게 살기도 어렵고
저렇게 살기는 힘들고
어떻게 살기도 쉽지 않고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거였다
시 쓰기도 그랬다
이렇게 저렇게 그렇게 쓰다 보니
시들이 쌓였다
그들이 집을 달라고 보채서
비밀 일기장을 열고 집 한 채 짓는다
2015년 초가을
봄비 권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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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예자 詩集 [※비밀 일기장※]
[ 해설 ] -
없다, 아니다, 그리고 하지 않는다
황정산 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며
흔히들 긍정의 힘을 말하곤 한다. 긍정적 사고가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개인의 발전고 사회적 성공을 거두게 해주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자기 개발서나 인생록 등은 바로 이 긍정의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긍정적 사고는 의미가 있다. 그것은 삶에 희망을 부여하고 고통을 견디게 하며 자신의 발전을 믿는 자신감을 부여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긍정적 사고는 기존의 가치를 긍정하고 세상의 질서를 긍정하고 그것이 내게 강요하는 책임과 억압마저 긍정하게 만든다. 그래서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의 힘에 순응하고 그것에 길들여지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자본의 힘이 지배하는 사회에 돈의 가치에 길들여져 그것을 얻기 위해 돈의 가치를 긍정하는 것이고 이는 무서운 일이다. 그것은 노예의 사고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 긍정의 사고에 쉽게 길들여지지 못하는 자이다. 그들은 세상의 이면을 보고 감추어둔 어두운 곳을 애써 뒤집어 봐야 한다. 그래서 세상의 진실을 보아야하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상투적 사고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언어를 끊임없이 찾아나가야 한다. 이번 권예자 시인의 시들은 바로 이런 부정의 정신을 표현하는 언어의 순수한 힘을 보여준다.
2. 부재와 충만의 아이러니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사실 다 없는 것들이다. 어떤 사물이든 존재하는 순간 없는 것이 된다. 지금처럼 많은 것이 만들어져 상품이 되고 그 상품을 통해 더욱더 욕망이 커져가는 시대는 사물은 항상 결핍으로 우리에게 존재한다. 구매하는 순간 모든 상품은 또 다른 상품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상품이 많을수록 그리고 욕망이 커져갈수록 자신에게 부재하는 것은 더욱 많아지고 욕망의 구멍인 결핍은 더욱 커져만 간다.
권예자 시인의 시들은 바로 이 없는 것들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서울역 대합실
대기의자처럼 바닥에 깔린
반백의 목숨 하나
새까만 두 손 펴고 엎어져
고단한 꿈이 깊다
과거로 달리는 그의 열차엔
눈물겨운 첫사랑과
우쭐했던 어깨가 동승하여
시멘트 바닥을 기어가고
주름살에 새겨진 그의 고향은
이번 승차에서 누락되었다
대전행 KTX 개찰이 시작되자
고여 있던 시간
우르르 빠져나간다
순간
허공에 걸린 웃음소리
설핏 돌아눕는 사내의 얼굴
안동 하회탈이다
십자가를 지고 껄껄 웃은
-「하회탈」전문
서울역 대합실에서 하회탈의 모습으로 웃고 있는 사람은 노숙자이다. 노숙자는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사람이다. 집도 직장도 돈도 가족도 모두 버리거나 빼앗기고 단지 빈 몸으로 세상에 나앉아 있는 사람이다. 시인은 이런 노숙자의 모습에서 “그의 고향은/이번 승차에서 누락되었다”라고 표현함으로써 돌아갈 고향도 없는 그레서 과거의 기억까지 빼앗긴 자라 말하고 있다. 기억에 누락되었다는 것은 사회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가장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다.
그 웃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웃음을 통해 우리를 힐난하고 있는지 모른다. 무엇인가를 가지려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을 비웃고 번화한 서울 한복판에 자신들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는 우리를 힐난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지워진 자들의 웃음마저 외면하고 살고 있다. 무엇인가를 가져야 살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 편입된 우리는 그들을 완전한 타자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이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들에게 진정한 웃음, 진정한 충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시인은 하고 있는 것이다.
호숫가에서
낚시질하는 사내
바늘에 미늘을 숨기고
온종일 찌만 바라본다
머리 풀어 물속 넘보는
오지랖 넓은 버드나무
날아드는 새들 껴안으며
물고기 품에 넣기 바쁘다
바람보다 빠르게 헤엄치는
새들의 지느러미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날아오르는 물고기의 날개
의기양양 모두 한 통속이다
호수도 알고
구름도 하늘도 아는데
혼자만 모르는 저 사내
또 미끼 던진다
-「낚시」전문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위 시의 낚시질 하는 사내이다. 뭔가를 얻기 위해 미끼를 던지며 시간을 견디고 살고 있다. 내 욕망을 채워줄 대어를 얻기 위해 날카로운 미늘을 숨기고 하루종일 찌를 바라보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얻으려 했을 때 그것은 물속에 꼭꼭 숨어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가지려 하지 않고 세상을 보았을 때 세상은 충만한 생명과 그 생명이 주는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다. 부재와 그것을 메우려는 우리의 욕망은 그것이 클수록 더욱더 부재의 결핍이 커질 뿐임을 이 시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인식을 다음 시는 아주 상징적으로 잘 형상화하고 있다.
언덕 아래 버려진 폐가
버림받은 순간부터 낙원이 되었다
아무도 등기이전은 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무주택자는 아니다
…(중략)…
세로 날고 가로 구르며
이집 저집을 기웃거린 속기사 바람은
홈페이지에 이렇게 적었다
단독주택이던 이 집은
이제 다세대 주택이 되었다
분쟁 없는 다문화 마을이 되었다
-「다세대주택」부분
폐가는 사회에서 쓸모없어진 존재에 대한 상징이다. 쓸모가 없다는 것은 그것이 누구의 욕망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상품이 되지 못하고 그래서 가격을 매길 수 없고 따라서 존재 가치를 부여받지 못한다. 그것은 있지만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시인은 이 없는 존재가 사실은 가장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깨닫고 있다. 한 주택이 폐가가 됨으로써 비로소 누군가 한 사람의 소유에서 벗어나 모든 생명이 깃들어 함께 사는 “분쟁 없는 다문화 마을”이 된 것이다.
‘없다’라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행이고 또한 죄악이기도 하다. 그것은 나태와 실패의 결과이므로 하루빨리 극복해야 할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권예자 시인은 이 없음이 진정한 충만으로 가는 길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리하여 가져야 하고 얻어야만 의미있다고 가르치는 우리 사회의 가치관을 부정하고 그것이 가진 폭력성 억압을 생각하게 만든다.
3. 부정의 미학
권예자 시인의 시는 항상 현실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날선비판의 언어 대신 풍부한 삶의 경험과 따뜻한 인간애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예자 시인의 시에는 부정의 정신이 깔려 있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부정문이 이를 잘 반영한다.
처음부터 꼭 마음에 들었던 건 아니다
재미있게 읽을 자신은 없었지만
제목이 상큼했고 표지가 깔끔했다
달리 눈길을 끄는 책도 없는데다
도서상품권 유통기한에 쫓겨 그냥 샀다
…(중략)…
책을 잘못 골랐다는 예감은
첫 페이지를 읽으면서였다
그 면에 가장 많이 실린 단어는
아니다 틀렸다 싫다 못 한다
행간마다 태반이 엄살일 뿐
독자를 배려한 구절을 찾지 못했다
몇 십 년이 지났지만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내용
다 읽지 못하고 넘긴 페이지 수두룩하다
단정하던 제본 엉성해지고 표지마저 너덜거린다
이제 그만 덮을까 망설이면서도
어딘지 숨어있을 매력적인 문장을 찾아
낡아버린 결혼의 책갈피를 촘촘히 탐색한다
밑줄 그을 색색의 연필을 준비해 놓고
-「알 수 없는 책」부분
거의 모든 문장들이 부정문으로 되어 있는 작품이다. 시인은 한 권의 책을 읽고 있다. 그 책의 문장들 역시 모두 “아니다 틀렸다 싫다 못 한다”등의 부정문이다. 부정문을 통해 세상을 비판하는 책이기에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그 책을 버리지 못한다. 꼭 읽고 말아야겠다는 각오로 색색의 연필까지 준비한다. 불편하지만 세상의 어둠을 읽고 그것을 비판하는 일이 시인 자신의 사명이고 또한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을 시인은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 부정문 속에서 반드시 “어딘지 숨어 있을 매력적인 문장”을 꼭 찾겠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설명헤 줄 문장은 부정문 속에 있음을 시인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정문으로 표현된 삶의 태도는 바로 비판 정신이다. 권예자 시인의 시는 목소리 높여 세상을 거부하거나 저주하지 않지만 세상의 어둠과 왜곡된 현실을 넌지시 지적하는 비판과 풍자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그 풍자를 통해 세상을 돌아보고 그 세상 속에 한 통속으로 돌아가는 자기 자신을 풍자하는 이중의 비판을 수행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들은 풍자이면서 또한 해학적이기도 하다.
앞선 이의 손을 잡고
느물느물 사라지는 시간과
희희낙락 죽어가는 사람들 엉긴
순천만 시사단試士壇
갈대들 모여 글을 쓴다
주제와 소재를 고르고
문장 살살 달래어
가야금 궁서체로 시를 쓴다
부드럽고 뜨겁게 격렬하고 냉정하게
쓰고 또 쓴다
갈피 사이사이 숨겨 둔 말
샅샅이 골라내어
동그라미 가위 세모 그리고 감점
마침내 오랜 심사를 마친 듯
후루룩 날아오르는
흑두루미 떼
당선작으로 뽑힌 가을이
수평선 너머로
빨갛게 익어가고 있다
-「신추문예」전문
신춘문예를 뒤틀어 “신추문예”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만들어 낸 작품이다. 시인은 순천만의 가을 풍경을 보고 시를 생각한다. 그것은 나이 든 사랑이 가야금과 궁서체로 표현한 시처럼 철지 난 촌스러운 아름다움이다. 이를 통해 시인은 가을의 상투적인 정서를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정서를 스스로 풍자하고 있다. 그것은 나이 든 시인들이 몰려다니며 상투적인 언어로 뻔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문단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이렇듯 이 시는 풍경을 묘사하면서도 그 안에 다중의 풍자를 담고 있다. 권예자 시인의 부정의 정신이 그만큼 교묘한 것임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런 부정의 정신은 다음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언어의 살 헤집고
뼈를 발라낸다
모세혈관
그 가늘고 긴 흐름도
놓치지 않는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스스로 해부한 언어의 살점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홀소리 열자
닿소리 열네 자로 엮어갈
최상의 언어는
이 칼날에서 시작되었다
언젠가 나를 찌르고야 말
-「나를 겨누다」전문
시인은 자신의 시가 언어를 통해 세상을 해부하는 칼날이 되었으면 한다. 세상을 헤집어 그것의 내면과 이면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시인이 바라는 자신의 시어의 힘이다. 하지만 그 시어의 칼날이 다시 자신까지 찌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자신 역시 이 부정적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아가는 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4. 무위의 세계관
세상을 산다는 것은 다음 시에서처럼 겨우 사는 것이고 또한 힘들게 겨울을 견뎌내는 악착같은 것이다.
겨우겨우 살아서 겨우살인가
겨울 같이 추운 세상 잘도 건너
겨우살이인가
큰 나무에 기생해 살다
나무가 죽으면 따라 죽는 겨우살이
의리 하나는 제법이다
예술작품에 기대 사는 겨우살이
집세도 내지 않고
남의 집에 기생하면서
섣부른 자부심 높고 당당하다
유명인에 붙어사는 겨우살이
부풀리고 뒤틀린 카더라 통신으로
우아한 겉옷 정숙한 속옷 벗기고 벗겨
속살 만지기 다반사
정신마저 죽이기 수십 번이다
뼛속까지 벗겨진 수치에
허약한 모체가 생을 마감할 때
그 죽음마저 가십거리로 삼는
겨우살이 중 별종 겨우살이
-「당당한 겨우살이」전문
겨우살이는 기생식물이다. 혼자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겨우 살아가는 미미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겨울을 버텨내는 강인한 존재이기도 하다. 이 겨우살이를 통해 시인은 미천한 삶을 살면서 끈질기게 세상에 기생하고 사는 글 쓰는 사람 인간들을 비판한다. 그들은 예술에 붙어 살고 유명인에 붙어살면서 때로는 못난 자부심으로 때로는 비루한 가십거리로 살아남는다. 그것은 작가와 기자들이 살아남는 방식이기도 하다. 부정의 세상에 또 부정한 방식으로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이 글 쓰는 자들의 운명이 비루한 것임을 시인은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삶이 아닌 또 다른 삶의 방식인 무엇일까? 다시 말해 부정의 정신으로 부정적인 세상에 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지 않는 것이다. 권예자 시인의 시들이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과거는 묻지 않는다
어떤 자리서 어떻게 살았든 상관없다
우리는 그저 깡통일 뿐이다
머리가 비어서
잔액이 바닥나서
얻어먹어야 해서 깡통이다
화려한 이름으로 살던 그땐
당당한 자존심과 팽팽한 긴장감에
주위를 돌아볼 필요 없었다
꼿꼿이 머리 세우고
한발 앞에 나서려는 발돋움 치열했다
…(중략)…
제 속 다 비워내고 나서
깡통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모여
수군수군 내일을 걱정한다
이제야
늙고 병든 몸 서로 다독이며
편견 없는 하나가 되었다
-「재활용품수거통에서」부분
빈 깡통은 이제 쓸모없어진 존재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으로 가치가 떨어진 것은 의미 없는 존재이다. 그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또 아무도 그에게 할 일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그 할 일 없는 존재가 되었을 때 빈 깡통들은 비로소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시인은 발견한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하게 만들 때 우리 모두는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자존심을 세우고 산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자신이 아니라 세상이 자신에게 부여한 상품으로서의 이름과 도용뿐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본모습을 다른 것으로 끊임없이 포장하려는 세상의 힘에 맞서 싸우는 길은 오직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들어주는 일로 평생을 소일하다
청력을 잃은 어느 날
그렇게 들고나던 사람들이
아무도 그녀를 찾지 않았지
주인은 죄 없는 그녀를 패대기치더니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지
하지만 그녀는 버림받고 나서야
난생처음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지
복지시설에 여생을 의탁한
이웃집 그 여자
-「버려진 전화기」부분
우리의 삶도 버려진 전화기와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남의 말을 들어주느라 자신의 삶을 찾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남의 말에 현혹되고 세상이 부과하는 질서에 순응하고 누군가 정해놓은 삶의 방식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어찌 보면 우리의 삶이다. 하지만 늙고 병들어 현실의 쓸모에서 놓여나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얻고 나를 되찾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 시는 바로 그 경지를 아름다운 언어와 심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극락교 건너다
살찐 잉어떼 들여다보네
수많은 중생이 부려놓은
온갖 번뇌를 먹고 사는 비단잉어
탱탱하게 살이 올랐네
누가 볼까 두리번거리다
주머니에 숨겨온 욕심을
슬그머니 내려놓는데
첨벙
커다란 물소리 숨이 턱 막히네
산 숲이 곱고
물소리 살가웠지만
그 물길 차마 볼 수 없었네
내 욕망
덥석 베어 문 비단잉어
줄줄이 속 터져 떠오를까 하여
-「차마 바라볼 수 없네」전문
시인이 물속의 비단잉어를 “차마 바라볼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의 욕망의 크기 때문이다. 시인은 비단잉어를 바라보면서 그 살찐 아름다움이 자신의 욕망의 크기인 것처럼 부끄러워한다.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시인은 시를 쓰는지 모른다. 시를 쓰는 동안은 세상이 요구하여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욕망이 되어 버린 삶의 방식을 포기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5. 맺으며
시는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운 이유는 세상을 예쁘게 포장해서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감춰진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부정의 정신이 들어 있고 슬픔과 분노와 거부의 정신이 이 아름다움에 배어 있다. 권예자 시인의 시들은 바로 이 부정성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목소리 높여 세상을 한탄하거나 비판의 칼날을 던지지 않는다. 조용히 세상의 이면을 보여주어 결핍과 거부의 언어로 그것을 표현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세상의 진실을 한 자락 들여다보고 기록한다. 시인의 할 일이 바로 그것임을 이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한 다음 시는 잘 말해주고 있다.
나무는
쉽사리 제 이력을 말하지 않는다
특별한 신분이 되고나서야
개인 등록증이 만들어질 뿐
그들의 이력 뽑아 볼 일 없다
나무들이 꼭 해야 하는 일은
거짓 없는 일기를 쓰는 일
바람이 어루만진 감촉
구름이 걸터앉아 들려준 말
꽃들이 내뿜던 향기로운 추파와
달빛이 작곡한 세레나데를 기록한다
폭풍에 맞서던 처절한 기억
딱따구리가 쪼아낸 몸피의 통증도
제 몸 갈피에 촘촘히 새겨 넣는다
숫자를 배우지 않아
이익과 손해를 모르고
걷는 방법도 몰라
늘 제자리에서 늙어간다
누군가 달라고 손을 내밀 때마다
망설임 없이 나누어 주는 큰손을 가졌다
세상과 작별한 후에 비로소 공개되는
나무들의 비밀 일기장
-「비밀 일기장」전문
시인이 생각하는 시는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거짓없는 일기”이다. 그렇기에 권예자 시인이 부정의 언어로 끊임없이 거부한 것은 바로 이 거짓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런 일기를 완성했을 때 나무가 나이테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세상과 작별하듯 시인도 한 세계를 완성한다. 하지만 권예자 시인이 이 시집으로 그러한 세계를 완성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세상을 보는 밝은 눈과 남다른 언어 감각으로 아직도 더 많은 비밀한 일기를 남겨 또 다른 일기장을 보여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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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숫자를 배우지 않아/ 이익과 손해를 모르고/ 걷는 방법도 몰라/ 늘 제자리에서 늙어간다/ 누군가 달라고 손을 내밀 때마다/ 망설임 없이 나누어 주는 큰손을 가졌다/ 세상과 작별한 후에 비로소 공개되는/ 나무들의 비밀일기장
- 「비밀 일기장」부분
순간/ 허공에 걸린 웃음소리/ 설핏 돌아눕는 사내의 얼굴/ 안동 하회탈이다/ 십자가를 지고 껄껄 웃는
- 「하회탈」부분
갈피 사이사이 숨겨둔 말/ 샅샅이 골라내어/ 동그라미 가위 세모 그리고 감점/ 마침내 오랜 심사를 마친 듯/ 후루룩 날아오르는/ 흑두루미 떼// 당선작으로 뽑힌 가을이/ 수평선 너머로/ 빨갛게 익어가고 있다
- 「신추문예新秋文藝」부분
시는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운 이유는 세상을 예쁘게 포장해서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감춰진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부정의 정신이 들어 있고 슬픔과 분노와 거부의 정신이 이 아름다움에 배어 있다. 권예자 시인의 시들은 바로 이 부정성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목소리 높여 세상을 한탄하거나 비판의 칼날을 던지지 않는다. 조용히 세상의 이면을 보여주어 결핍과 거부의 언어로 그것을 표현하다. 그리고 그것으로 세상의 진실을 한 자락 들여다보고 기록한다.
-황정산, 문학평론가 대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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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예자 시인∥
∙ 대전에서 태어났고,
∙ 1998년 12월, 국가공무원을 퇴임했다.
∙ 2002년 ‘동전 세 닢’으로『창작수필』, 2004년 ‘구두 한 짝’ 외로『문학저널』(시 부문)을 통하여 등단을 했다.
∙ 시집으로는『숲이 나를 보고』(푸른사상사, 2006년)가 있고,
∙ 수필집으로는『내안의 피에타』(도서출판 소소리, 2008년)와『봄비, 꽃잠 깨다』(도서출판 소소리, 2011년) 등이 있다.
∙ 예술문화상(문학부문), 창작수필동인문학상, 옥로문학상, 원종린수필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 현재 한국문협, 창작수필, 대전문협. 대전문총, 오정문학, 대전시인협회, 공무원문학, 백지시문학회, 꿈과 두레박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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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예자 시인의『비밀 일기장』은 그의 두 번째 시집이며, 방법적인 부정정신을 통하여 이 세상의 그 모든 것을 비판하고 비워내게 된다. 그의 방법적인 부정정신은 ‘비움의 미학’이 되고, 이 비움의 미학은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로운 존재가 된 전화기(「버려진 전화기」)처럼, 또는 “늙고 병든 몸 서로 다독이며/ 편견 없는 하나”(「재활용품수거통에서」) 가 된 ‘재활용품들’처럼 그 자유를 얻게 된다. 이 자유는 “언젠가 나를 찌르고야 말” “칼날”(「나를 겨누다」)이 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순천만의 “흑두루미 떼”처럼 “당선작으로 뽑힌 가을날(「신추문예」)의 아름다움이 되기도 한다. 권예자 시인의『비밀 일기장』은 싸움의 기록이며, 이 싸움을 통해서 거목巨木으로 자라난 나무들(시인들)의 비밀 일기장이라고 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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