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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홍겸삼 씨의 감동의 글
“Thank you Sir!”의 再送을
신동호
김 방장님께!
통영앞바다를 왕복한 10월말의 도항(渡航) 경력이
이처럼 바닷물에 저려질 줄 미처 몰랐어요.
푸른 바다에 빠지지 않고 서울에 돌아온 후에야 김승웅 바다가 있는 줄 알고 놀랐지요.
이순신 바다에 놀란 왜의 수군보다 더 놀랐습니다.
불로그니 글방이니 웹이니 모르고 겨우 편지만 주고받다가
우체통이 아닌 중앙우체국이 내 가슴에 밀려오니 감당키 힘들군요.
내가 모르는 인사의 사신을 엿보게 된 듯싶어 우편법위반 피의자가 된 듯 두렵고
익사직전에 몇 마디 "HELP"소리 지릅니다.
오늘 최상태 형과 '시낭송 1번'이 지명해서 제게 말씀해 준 것,
고맙다는 인사 먼저 드리고, 저도 이번 여행처럼 즐겁고 인상 깊었던 만남은
처음이란 말씀 드립니다. 각설하고,
언론인이기에 글방에 지금까지 나온 제 얘기에 틀린 점만 지적합니다.
1.저더러 서울고 출신 최고점수 졸업생이라는 최상태 형의 언급은
김종하 국회 부의장의 소개발언을 인용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이 아닙니다.
그가 인용한 소스는 둘이 서울시 교육위원회 출입당시 김원규 교육감이 한 말이라고 하나
교육감의 정치적인 발언이었을 뿐, 당시 1등은 주요한 선생의 차남인
주동일 원자물리학자로 미국서 지금도 활약 하고있는 저의 둘도 없는 자랑스런 친구입니다.
2.김성우와 언론계에서 적수로 라이벌이었다는 방장님의 설도 억설입니다.
김성우는 3학년 재학시절에 한국일보 4기생으로 입사해서
명편집자로 성가를 높였지요 … (中略) …이상은 제 자랑 하자는 것이 아니라
시시비비 차원이고 정확을 기하자는 뜻이니 곡해하지 마십시오.
방장께 마지막 부탁 말씀을 끝으로 막겠습니다.
글방 글 중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고 친구들에게도 소개했더니
원문을 전달로 보여 달라는 요청이 있기에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중간에 그 대목만 추려서 남에게 전달할 재주가 저에겐 없습니다.
욕지도 사진도 압축해제 기술이 없어 못보고, 아들 휴가 올 날만 기다리는 처지에요.
첫째는 샌프란시스코 거주 교포 홍경삼 씨가 보낸 미군 참전용사에게 거수경례한
수필 "Thank You Sir!",
둘째는 60년대 걸작 단편 ‘무진기행’의 저자 김승옥 씨와 최근 만난 김 형의 르포와
단편을 각각 보내주시면 좋겠습니다.
국어 선생이시던 황순원 선생한테 “글은 짧을수록 좋다”고 배웠는데
술김에 또 난봉과 오기를 부렸습니다. 망언다사.
<신동호/조선일보 발행힌, 주필, 편집국장, 駐日특파원 역임/
서울고~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졸>
.............................
* 신동호 선배님,
말씀하신 첫째, 둘째 글을 글방에서 찾아 보냅니다.
방장 사룀
#2 Thank you Sir!
홍경삼
여행을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여행객들과 대화도 하게 되고
그러다 아무런 일 없었던 것처럼 헤어지곤 한다. 그저 스쳐 지나 갈 뿐이다.
조금 얘기들을 하다간 형식적으로 악수를 하며 자기 이름들을 말하지만
굳이 기억 할 필요도 없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네바다州의 유일한 국립공원인 Great Basin National Park 안에 소재한Lehman Cave를
Ranger의 안내를 받으며 대부분 은퇴자들 10명이 투어를 나섰다.
내 뒤를 따라다니던 60대 후반(?)인 할머니가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San Francisco에 산다고 하면 십중팔구 중국인이라고 생각들 할까봐
여행 다니면서 꼭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을 해준다.
할머니 뒤에 있던 할아버지가 "안녕 하세요?"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반갑다. 그리곤 가끔 우연히 스치는 또 다른 한명의 한국을 다녀 온 G.I구나했다.
하지만 반가웠다.
Lehman Cave 내부. 다른 동굴들에 비하여 특별한 것이 없다
투어가 끝나고 할머니 친구 내외 우리 모두 6명이 자연스럽게 모였다.
한국이라는 공통분모가 잡어 놓은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 근무를 했습니까?"
"1959년 원주에서 했는데 그곳에 아주 높은 산이 있는데 무슨 산이죠?."
"아~ 치악산을 말씀 하시는 것 같습니다."
"치악산~ 당신 잘 기억해두세요." 중요한 것은 부인더러 기억케 한다.
"나 그곳에 있는 동안 좋았다고 해야 할까?
하여간 기념품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갖고 있는데 보여 줄까?" 하며 웃는다.
도대체 무슨 대단한 기념품이기에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다닐까?
목각제품 십자가? 아니면 한국을 상징하는 특수 모양의 인형?
나름대로 이것저것 떠올리면서 "보여주세요" 했더니 하하하 웃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왼발 바지를 조심스럽게 걷어 올린다.
카우보이의 부츠가 나오고 바지가 조금씩 올라간다.
목이 긴 쇠 조각으로 장식된 가죽구두가 다 나온 후에 내 손목보다도 가는 다리가
10cm 정도 나오더니 멈춘다. 차마 더 이상 걷어 올리지를 못한다.
가늘고 장단지라고는 없다.
마치 나무토막 같고 살색이 아닌 붉은 색은 엷은 가죽으로 감싸여 있다.
인간의 다리가 아니다. 짐승의 다리도 아니다. 하지만 결코 징그럽다는 생각이나 느낌은 아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나? 당신은 무엇 때문에 이런 다리를 하고
50년을 살아 왔고 누구를 위해 이렇게 되셨나요?
그 순간 이 분에 대하여 그저 미안하고 고맙고 무어라 표현을 할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그 분 앞에 똑바로 섰다. 그리고 군대식으로 거수경례를 올리며 말했다.
"Thank You Sir!
내 조국을 위하여 봉사해 주심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진심은 서로 통하는 법인가?
기대치 않았던 나의 돌출 행동에 이 분 감격한 모양이다.
두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 하고 볼과 입가에 경련이 일어난다.
나를 다정스럽게 쳐다보던 두 눈에선 눈물이 넘쳐
주름살을 타고 옆으로 흘려 내리기도 하고 주름이 깊은 곳에서 고이기도 한다.
나 역시 눈물이 흐른다.
옆의 부인들도 눈물을 훔친다. 앞으로 닥아 가서 그분을 두 팔을 벌려 껴안아주고
등을 토닥거렸다. 그 분도 두 팔로 나를 안고 오히려 고맙다고 한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서로 알지도 못하던 칠십대의 미국인과
육십대 후반의 한국인 두 남자는 뜨거운 가슴을 맞대고 두 마음을 열어 놓고 있다.
심각한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게 한 것은 할머니였다.
"
여보 당신 야전병원(MASH) 있을 때 한국소년 한테 배운 한국말
왜 가끔 나한데 하던 말 해 보세요. 정말로 맞는지 확인해 보게요."
"나 당신을 사랑 합니다. 뽀뽀 해주세요." 할아버지 말에 할머니가 나를 쳐다본다.
"하하하 정말 Mrs.를 위해서 좋은 말만 배웠구나.
맞아요. Honey~ I love you, Give me a kiss." 너무나 좋아 하는 할머니.
할머니 인상이 처음부터 좋았다.
Utah 州의 여인들은 특히 아름답고 남자를 지극 정성으로 섬긴다.
한국에서 다리를 다친 남자를 지아비로 섬기며 사시는 분이라서 그런가 나에겐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Bryce Canyon 가보았냐? 우리가 그곳에서 35마일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
이름 주소를 알고 싶었다. 성탄절 때 카드라고 보내고 싶어서...
그런데 아름다운 곳 Bryce Canyon에 산다고 하니 주소를 달라면 분명 놀러 오라 할 것이고
아니면 오늘을 미끼로 앞으로 내가 신세라도 질까 생각 할까봐 묻지를 못했다.
다만 姓만 물으니 Olson 이란다.
Oh, Mr.Olson 당신은 한국인의 영웅입니다.
당신에게 올린 경례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한국인 모두의 감사의 표시 입니다.
이제 한국인이 당신에 대한 고마움을 아셨으니 지난 아픔을 잊으시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한국을 사랑해주시기 바랍니다.
네 저는 압니다. 너무나 아픈 기념품을 한국으로 부터 가지고 오신 것을...
Mr. Olson과 함께
정말 다행인 것은 우리와 헤어져 친구가 운전하는 차로
천천히 걸어가는데 그렇게 가냘픈 다리를 하고도 평상인처럼 걷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Mr.Olson을 계기로 한국전쟁 3년 동안 미군 5,4000명이 전사했고 10,3000명의 부상자가
나왔다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 과연 그들은 누구를 위하여 희생 되었나?
Mr.Olson을 만나기전까지 그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나?
자문해 본다.
<在美화가/北加州 서울대 총동창회장/서울사대부고~서울대 문리대 외교학과 졸
(방장의 동기)/샌프란시스코 거주>
#3 무진(霧津)에서 만난 김승옥
김승웅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시절,
그곳에 들른 故한국일보 장강재 회장 싸모님
文姬 여사를 이웃 런던 그리니치 천문대로
안내했더니 그녀가 나를 經·緯 0 지점에
세워두고 찰칵한 사진/방장
김승옥이 쓴 소설 "무진기행"과 이효석의 "메일 꽃 필 무렵"에는 비슷한 대목이 참 많습니다.
우선 썰(說)을 풀어 나가는 두 작가의 서술방식이 과거에의 회상, 그 중에서도 특히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절실했던 젊은 날의 애욕(愛慾)을 기저에 둔 소설이라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메밀 꽃 필 무렵"의주인공... 왼손잡이에 반 곰보였던 허 생원은
옷 벗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달빛이 화~안했던 달밤,
그 대낮같던 달빛을 피해 옷 벗으려 물레방아에 들어섰다가 거기서 그 봉평 마을의 규수를 만나
쉽게 일을 저지릅니다. 남자주인공은 일을 치룬 후 그 마을을 떠납니다.
"무진기행"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주인공 역시 마찬가집니다.
무슨 제약회사의 전무가 되어 무진에 들른 주인공은 우연히 그곳 시골학교 음악 선생을 만나
그가 젊은 시절 수음(手淫)만 일삼던 바닷가 자취방으로 그녀를 유인, 너무나 쉽게 자빠트린 후
역시 그 마을을 떠나는 것으로 소설을 끝냅니다. 둘 다 애욕의 신비성을 다룬 소설입니다.
두 작가 공히 각각의 시절 엘리트였다는 점도 비슷한 점입니다.
1936년 월간 "조광(朝光)"이라는 월간지를 통해 소설 "메밀 꽃 필무렵"을 등장시킨 작가 이효석이
당시 `모던니즘`을 추구한 경성제대 영문과 출신의 엘리트였다는 점에서,
그로부터 정확히 30년 후, 순천고를 졸업한 전라도 숭악한 `촌놈` 김승옥이
당시 장래가 촉망되던 서울대 불문과 4학년에 재학생으로
1964년 당시의 대표적 월간지인 `사상계`를 통해 소설 "무진기행"을 선보인 것과
너무도 흡사합니다.
그러나 두 소설이 가장 비슷한 점은 작가 둘 다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소설의 배경으로 설정했다는 점입니다.
"메밀꽃 필무렵"의 작품 무대가 이효석이 태어난 고향 봉평이라는 점은 누구나 잘 압니다.
무진 역시 김승옥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입니다.
무진(霧津 )이라는 지명은 대한민국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는 지명입니다만,
작가의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 무진이 바로 김승옥이 태어나고 거기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바로 그 순천(順天)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빼어난 소설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빼어난 고향을 둬야 합니다.
작가는 그리고 보면 단순히 그 고향을 스토리에 기승전결 시키는 조작사(Operator)에
불과할 뿐입니다.
두 작품 공히 작가의 고향과 일치하다보니 그 고향의 특산물 역시
소설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됨은 작가 입장에서 볼 때는 너무도 자연스런 귀결입니다.
달밤, 작가의 작중 표현대로, "소금을 뿌린 듯한 봉평의 메밀꽃 밭"이 이 소설의 주조를 이뤘듯,
그래서 마침내 달밤의 광기를 작출해 냈듯, "무진기행"의 산물(産物)인 `안개` 역시
작가 김승옥이 그 소설에서 열불 날 정도로 울겨 먹고 지처 먹는 소설의 모멘텀이 되고 있습니다.
그 `안개`를 김승옥이 소설속에서 어떻게 묘사했는지를 직접 한번 체험해 보시지요.
소설은 광주 발 무진행 시외버스에 오른 주인공이 뒷 좌석에 앉은,
그 고향 출신이 아닌, 무슨 시찰원인가하는 두 사람이 방문지인 무진을 놓고
시시껄렁 늘어놓는 이야기를 소설의 도입부로 차용하고 있습니다.
"무진엔 명산물이…… 뭐 별로 없지요?" 그들은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별게 없지요. 그러면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건 좀 이상스럽거든요."
"바다가 가까이 있으니 항구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럴 조건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수심(水深)이 얕은데다가 그런 얕은 바다를 몇 백리나 밖으로 나가야만
비로소 수평선이 보이는 진짜 바다다운 바다가 나오는곳이니까요."
"그럼 역시 농촌이군요."
"그렇지만 이렇다 할 평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그 오륙만이 되는 인구가 어떻게들 살아가나요?"
"그러니까 그럭저럭이란 말이 있는 게 아닙니까?" 그들은 점잖게 소리내어 웃었다.
"원, 아무리 그렇지만 한 고장에 명산물 하나쯤은 있어야지."
웃음 끝에 한 사람이 말하고 있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 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 소설 "무진기행" 서두
정읍 내장산을 둘러본 후
광주에 도착, 거기서 밤늦게 순천행 고속버스에 올라 포구에 들어설 무렵
저는 예의 그 안개를 만났습니다.
내장사 입구
고속버스 차창을 향해 밀려드는,
작가의 표현대로 그 원귀의 입김 같은 안개를 쐬며 나는 작가 김승옥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무진이 바로 순천임을 거기서 깨달았지요.
절필작가로 바뀐 그 김승옥이 무척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보고 싶다는 소원이 너무 쉽게 이뤄진데 대해 저도 놀랐습니다.
순천엔 안개 말고도 갈대가 유명하더이다.
순천에 사는 친구 김태호의 안내로, 한참 `갈대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는
순천만 갈대밭에 들렸을 때, 거기 `무진기행' 체험기라 쓴 간판 뒷켠에 혼자서
머~엉 하게 앉아있던 김승옥을 볼 수 있었지요.
"거 혹시 김승옥 선생 아니시오?"라는 내 목소리에 그 역시 깜짝 놀라더이다.
그는 내 손바닥에다 "뇌"자를 적어 보이더이다.
나는 대번에 알아차렸지요. 뇌졸증을 일으켜 언어 마비가 왔다는 얘기였습니다.
말 알아듣는 데는 하등 불편이 없었구요.
"김승옥 씨, 무진이라는데가 어디요? 실명 아니지? 바로 이곳 순천을 말하는 게지?"
나는 확인하듯 물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이다.
김승옥이 그날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듯 앉아있던 그 갈대밭은
소설 속에서 음악교사를 자빠트린 주인공이 노래를 불러주겠다며 손잡아 데리고 가던
바람 불던 갈대 밭...바로 그곳이었습니다.
김승옥은 내 손바닥에 이번에는 "여"자를 적습디다. 나는 그 의미도 대번에 알았지요.
내가 <시사저널>에 근무할 때 김승옥은 편집위원으로 일했습니다.
함께 여기자로 근무하다 훗날 신장결석의 후유증으로 숨진 여기자 "여운연"이
바로 "여"라는 글자의 장본인임을 제가 잘 알기 때문이지요.
"당신, 그 여기자 좋아했잖아?"하면서 내가 큰 소리로 웃자 김승옥은 아니야 아니야라고
사래를 치며, 그러나 조금 붉어진 얼굴로 "그 여자 보고 싶다"는 표정을 계속 짓더이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아~암 보고 싶고 말고, 나도 여운연이 보고 싶은 걸...'
김승옥은 타고 난 색골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의 <시사저널>시절, 일시귀국중인 파리의 윤정희를 데리고 제 사무실을 노크한 김승옥이
어딘가 가자면 제 차를 동원하라는 겁니다.
그때 저는 기사를 둔, 제법 잘 나가는 입지에 있었지요.
그날 밤, 제 차편으로 셋이 도착한 곳은 자하문 근처에 살던,
피아니스트 신수정(당시 서울대 음대 교수)의 아파트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색골이었는지를 그날 밤 그곳 아파트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김승옥은 신수정의 얼굴을 그려준다면 데생 종이와 연필을 들고 나타나더니
거짓말 안 보테고 10분 간격을 화장실을 들락날락 하는 겁니다.
처음엔 그의 똥꼬에 뭔가 이상이 있는 게 아닌 가 여겼습니다만, 그건 아니고,
그리고 정말 웃겼던 건, 화장실에서 나올 때마다 그의 얼굴에
물기가 남아있었다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아, 나는 직감했습니다.
신수정한테 잘 보이려고 화장실에 뻔질나게 들려 세수를 하고 나오는 겁니다.
그 하는 짓껄이가, 학예회에 나가는 아동 그대로였습니다.
신수정은 내막을 몰랐고, 윤정희와 나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김승옥...여자라면 한마디로 사족을 못 쓰는 사내였습니다.
그 색골기질은 그의 소설 곳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서울,1964년 겨울"이던가 에서는 애인과 데이트를 하기 직전 꼭 종로 3가에 들려
그 일을 치르고 나오는 주인공이 묘사되어 있지요.
언젠가 이런 이야기도 제게 들려주더이다.
대학 1학년 때(그는 불문과 60학번입니다) 이만갑 교수의사회학 원론 강의를 들으러 갔답니다.
첫 강의시간 이만갑 교수가 들려주는 결혼에 대한 사회학적 정의를 듣는 순간,
아, 학문을 정말 쓰잘 떼기 없는 거구나... 하고 자탄을 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결혼에 대한 사회학적 정의는 여러 개가 있습니다만, 그 중 하나에 이런 것이 있지요.
"결혼이란 합법적인 성생활을 뜻한다"
김승옥과 헤어져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헤어지기 직전 <시사저널>에 함께 있던 김훈이 큰 작가로 대성했다는 말을 들려주자
그 역시 "그래, 정말 그래"하는 표정을 지으며 부러워하는 눈짓을 짓더이다.
그래서 그를 부추겨줬지요.
"아냐, 당신만 못 해! 당신이 더 나은 작가라고!" 하고 큰 소리를 질러줬더니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면서도 속으로는 적이 만족한 표정을 지읍디다.
작가들은 이처럼 푼수들이 많아요.
김승옥이 말은 어눌해도 e메일 교신은 자유롭다며 자기의 메일 주소를 주더이다.
오늘부터, 아니 당장 이 글부터 김승옥한테 발송해야겠네요.
돌아올 때 그의 소설 말미에 나타나던 "당신은 지금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던 표말은
나타나지 않더이다. 그 야리꾸리하던, 작가 김승옥의 소설기법상의 앵스투르멍이
됐던 안개도 보이지 않았구요.
<김승웅>
- 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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