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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8월 18일 화요일
[(녹)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티로의 군주는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져 죽음을 맞이하리라고 전하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8,1-10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티로의 군주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마음이 교만하여 ′나는 신이다. 나는 신의 자리에,
바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고 말한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3 과연 너는 다니엘보다 더 지혜로워
어떤 비밀도 너에게는 심오하지 않다.
4 너는 지혜와 슬기로 재산을 모으고 금과 은을 창고에 쌓았다.
5 너는 그 큰 지혜로 장사를 하여 재산을 늘리고는
그 재산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졌다.
6 그러므로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7 그러므로 나 이제 이방인들을, 가장 잔혹한 민족들을 너에게 끌어들이리니
그들이 칼을 빼 들어 네 지혜로 이룬 아름다운 것들을 치고
너의 영화를 더럽히며 8 너를 구덩이로 내던지리라.
그러면 너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무참한 죽음을 맞이하리라.
9 너를 학살하는 자 앞에서도 네가 감히 ′나는 신이다.′ 할 수 있겠느냐?
너는 너를 살해하는 자들의 손에 달린 사람일 뿐이지 신이 아니다.
10 너는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져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의 죽음을 맞이하리라.
정녕 내가 말하였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23-30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24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5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7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2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29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30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우리는 어떤 것을 포기할 때 ‘이것을 포기하는 대신 저것은 있어야겠다.’라는 마음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대가 없이 순수하게 무엇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성당을 다니니 좋은 일이 일어나겠지.’, ‘예수님을 따라나섰으니 소원이 이루어지겠지.’ 하는 마음도 이와 비슷합니다. 이러한 보상 심리는 어쩌면 누구에게나 다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태 19,27)라고 말합니다. 인정받고 싶은 것일까요? 칭찬받고 싶은 것일까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순수하게 주님을 따르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싶지만, 사람이라면 대부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베드로의 모습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상을 구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19,29). 이 말씀은 예수님을 위하여 집도 가족도 땅도 포기하라는, 더 어려운 결단을 요구하시는 말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내 것’만 바라보며 살지 않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뜻이 아닐까요? 백 배를 받는다는 것은 백 배의 물질적 풍요를 뜻하기보다 그만큼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로 알아들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과 함께 누릴 영원한 생명을 받으리라 믿으면,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고 희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신앙을 정화시켜 나갑시다.(유청 안셀모 신부)
돈이 모든 행복의 근원은 아닙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 서민들, 갈릴래아 어부들과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예수님 가르침은 항상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습니다. 어떻게든 쉽게 설명하려고 다양한 비유나 예화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십니다.
유다 문학 안에서 통용되던 다양한 문학 기법도 아낌없이 사용하십니다. 그중에 하나가 과장법이다. 부자들도 하느님 나라 입국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시면서 꽤나 과한 비유, 낙타와 바늘구멍 이야기를 건네십니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이 말씀 들은 부자들 중에 걱정을 넘어 기분이 나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내가 모은 이 재산, 거저 얻은 줄 알아? 평생 등뼈 휘어지게, 정직하게 일해 온 난데. 남들 보다 곱절로 일하고, 남들 먹을 때 안 먹고, 남들 놀러 다닐 때 더 일하고, 아끼고 아껴서 모아 겨우 이제 부자 소리 듣는데, 정말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화내실 이유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경고 말씀을 잘 새겨들어보시면 정답이 즉시 나옵니다.
이 텍스트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부자는 바로 이런 부자입니다. ‘재물을 하느님보다 상위에 두는 부자’, ‘돈에 눈이 먼 나머지 세상에 다른 의미 있는 가치들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부자’, ‘돈이면 다라고 생각하는 부자’, ‘오로지 돈에 목숨을 거는 부자’, ‘죽으라고 모을 줄만 알았지 조금도 나누지 않는 부자’...
자캐오 같은 경우 예리코에서 둘째가면 서러워할 큰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돈을 최고로 여겼던 자신의 지난 삶을 순식간에 뉘우칩니다. 그 결과로 자신의 재물을 이웃과 나누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자캐오의 노력에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와 자캐오의 가정에 100% ‘구원’을 확증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손에 쥐었다 하면 어느새 빠져나가는 것이 돈입니다. 잔뜩 있다가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이 돈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임종의 순간이 오면 다 내려둬야 할 것이 돈입니다.
물론 인간다운 생활, 품위 있는 생활을 위해 어느 정도 돈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다시 또 없습니다.
물론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줍니다. 가고 싶은 곳 가게 만들고, 먹고 싶은 것 먹게 하고, 분위기 잡고, 사람 노릇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돈으로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이 모든 행복의 근원은 아닙니다. 돈이 최종적인 해결사는 아닙니다. 돈보다 상위에 있는 가치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향한 절절한 하느님의 사랑, 이 세상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성모님의 위로, 우리의 시린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너무나 따뜻한 예수님의 손길, 가족 간에 오고 가는 소박한 사랑, 따뜻한 배려, 절친한 우정 관계, 따스한 만남...
세상의 재산이 악인의 손에 들어있으면 그것은 함정과 죽음으로 향하는 근원이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재산이 선인의 손에 들어있으면 그것은 선행과 공덕을 쌓아올리는 수단이 됩니다.
재산에 대한 집착을 버린 착한 부자란 자캐오와 같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자신의 재산을 신속하게 나눌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명령과 요구, 양심의 소리에 따라 언제든지 재산을 나눌 수 있는 사람에게는 자캐오와 같이 100% 확실한 구원이 보장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얼마 전에 병자성사를 다녀왔습니다. 보통 병자성사는 아픈 분이나 가족이 성당에 연락해서 청합니다. 그래서 저는 당연히 성당 교우라고 생각하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조금 달랐습니다. 한 분은 예전에 성당에 다녔지만, 미국에 오면서 구세군 교회의 도움을 받았고, 그 뒤로 구세군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한 분은 예전에 성당 사무장까지 했지만, 미국에 와서 교회 다니는 분의 도움을 받고 장로교회에 다니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힘든 시간이 오자 다시 성당에 연락했습니다. 목사님을 찾지 않고 신부님을 찾은 이유는, 그래도 처음 신앙의 뿌리가 성당이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지낼 때는 자주 찾지 않았다가도, 힘들고 아플 때면 친정어머니를 찾는 딸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정어머니는 딸이 잘될 때도 사랑하고, 딸이 힘들 때도 사랑합니다. 오래 찾아오지 않았다고 문을 닫지 않습니다. 서운함이 있어도 먼저 밥을 차려 주고, 아픈 마음을 안아 줍니다. 저도 그런 마음으로 정성껏 병자성사를 드렸습니다. 안드레아 형제님이 건강을 회복하기를 기도했습니다. 리드비나 자매님과 헬레나 자매님에게도 시간이 되면 성당에 함께 오시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성당은 조건을 따져서 문을 여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집은 돌아오는 사람을 기다리는 집입니다. 교회는 아픈 이를 외면하지 않고, 길 잃은 이를 품어 주며, 다시 시작하려는 이를 축복하는 어머니의 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기가 더 쉽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 묻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제자들도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비슷합니다. 부유함은 많은 편리함을 줍니다. 좋은 집을 가질 수 있고, 좋은 차를 탈 수 있고, 원하는 것을 더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물이 있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경계하신 것은 재물 자체가 아닙니다. 재물이 하느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마음입니다. 재물은 바닷물과 같을 때가 있습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더 목이 마릅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어집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심 때문에 남을 속이기도 하고, 남의 것을 빼앗기도 하고, 가난한 이를 외면하기도 합니다. 재물이 많아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재물 때문에 마음이 닫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재물이 우리의 손에 있으면 도구가 되지만, 재물이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면 우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곳간에 재물을 쌓아 두고 기뻐하던 부자의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 그 부자는 많은 것을 쌓아 두고 이제 편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기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하느님께서는 그의 목숨을 거두어 가십니다. 그가 쌓아 둔 재물은 하나도 가져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썩지도 않고 좀먹지도 않는 하늘에 재물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재물을 쌓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는 것, 아픈 사람을 찾아가는 것, 외로운 사람 곁에 머물러 주는 것, 갇힌 이를 기억하는 것, 바로 그것이 하늘에 재물을 쌓는 일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을 보고 사제와 레위인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아파하는 이웃 앞에서는 마음을 닫았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멈추었습니다. 상처를 싸매 주고,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사람이 참된 이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재물을 쌓는 사람은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진 것을 사랑으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였던 자캐오도 만나셨습니다. 자캐오는 세리였고 부자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키가 작아서 나무 위로 올라갔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캐오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예수님을 만난 자캐오는 변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제가 누구에게서 빚진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부자라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을 하느님보다 더 사랑할 때 하늘나라에서 멀어집니다. 반대로 부자일지라도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며, 하느님께 마음을 돌리면 하늘나라의 문은 활짝 열립니다. 자캐오는 재물을 잃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었습니다. 절반을 나누었지만,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던 세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회복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때로 내가 붙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재물에 대한 집착, 체면에 대한 집착, 내 뜻만 고집하는 마음, 나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려놓는 사람에게 빈손으로 끝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백 배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병자성사를 청한 그분들을 생각합니다. 삶의 길에서 잠시 성당과 멀어졌지만, 아프고 힘든 시간에 다시 하느님의 집을 찾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친정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자캐오를 부르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는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으로 품어 주십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돌아올 수 있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쌓아야 할 재물이 무엇인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은행 통장에 쌓는 재물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늘에 쌓는 재물입니다. 용서의 말 한마디, 따뜻한 방문, 병든 이를 위한 기도, 어려운 이웃을 위한 나눔, 다시 돌아오는 이를 향한 열린 마음이 하늘에 쌓이는 재물입니다. 그런 재물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랑은 하느님 앞에서 영원히 남습니다.
<따르는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마태 19,27)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
하느님이 됩니다
사람을
따르는 사람
사람이 됩니다
믿음을
따르는 사람
믿음이 됩니다
희망을
따르는 사람
희망이 됩니다
사랑을
따르는 사람
사랑이 됩니다
참됨을
따르는 사람
참됨이 됩니다
착함을
따르는 사람
착함이 됩니다
고움을
따르는 사람
고움이 됩니다
맑음을
따르는 사람
맑음이 됩니다
어울림을
따르는 사람
어울림이 됩니다
따뜻함을
따르는 사람
따뜻함이 됩니다
부드러움을
따르는 사람
부드러움이 됩니다
돌봄을
따르는 사람
돌봄이 됩니다
섬김을
따르는 사람
섬김이 됩니다
살림을
따르는 사람
살림이 됩니다
오늘의 성인
성 라우로 (Laurus)
활동년도 : +2세기
신분 : 석공,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라우루스
성 플로로 (Florus)
활동년도 : +2세기
신분 : 석공,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플로루스, 플로리도, 플로리두스
그리스 전승에 의하면 성 플로루스(Florus), 성 라우루스(또는 라우로), 성 프로쿨루스(Proculus)와 성 막시무스(Maximus)는 일리리아(Illyria)의 이교도 신전 공사장에서 일하던 석공들이었다. 성 플로루스와 성 라우루스는 세인들의 말에 의하면 쌍둥이 형제였고, 성 프로쿨루스와 성 막시무스는 그들의 고용인으로 석공 교사였다. 그들은 이교도 신전 공사를 하던 중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는 이교 신상들을 끌어내리고 그리스도교 예배용 건물을 짓는데 사용함으로써 고발되었다. 결국 그들은 모두 리키니우스 황제에 의해 우물에 던져져 순교하였다
성 알베르토 우르타도 크루차가(Alberto Hurtado Cruchaga)
신분 : 신부
활동연도 : 1901-1952년
같은이름 : 알버트, 알베르또, 알베르뚜스, 알베르투스, 앨버트, 후르타도
성 알베르투스 우르타도 크루차가(Albertus Hurtado Cruchaga, 또는 알베르토 우르타도 크루차가)는 1901년 1월 22일 칠레(Chile) 중부에 위치한 비냐델마르(Vina del Mar)에서 태어났다. 우르타도가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가족의 빚을 갚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얼마 안 되는 재산마저 다 팔아야 했다. 그래서 우르타도와 그의 형제들은 친척 집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면서 우르타도는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된다는 것과 집이 없다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로부터 받는 자애에 대한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는 장학금을 받아 산티아고(Santiago)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서 그는 성모회(the Sodality of Our Lady)의 회원이 되어 가난한 이들의 유익을 증진시키며, 매 주일 오후마다 가장 불쌍한 이웃들을 찾아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1917년 중등교육을 마친 후 우르타도는 예수회에 들어가기를 소망했지만 어머니와 어린 형제들을 부양하기 위해 자신의 꿈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매일 오후와 저녁에 일을 해서 가족들을 돌보면서도 가톨릭 대학교에서 법학 공부를 병행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도 그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매 주일마다 그들을 방문하였다. 병역 의무로 인해 잠시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지만 의무를 완수한 후 1923년 초에 학위를 취득하였다.
우르타도는 1923년 8월 14일 치얀(Chillan)에 있는 예수회에 입회하여 수련기를 시작하였다. 1925년에 그는 아르헨티나(Argentina)의 코르도바(Cordoba)로 가서 인문학을 공부했으며, 1927년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다시 에스파냐(Espana)로 갔다. 그러나 1931년 에스파냐에서 예수회의 활동이 금지되자 벨기에(Belgium)의 루뱅(Louvain)으로 가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는 1933년 8월 24일 루뱅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1935년에는 교육학과 심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벨기에의 드롱겐(Drongen)에서 종신서원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거치는 제3수련기를 마친 후 1936년 1월 칠레로 돌아왔다. 그는 산티아고에서 성 이냐시오 대학의 종교학 교수로 그리고 가톨릭 대학교의 교육학 교수로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학생들을 위한 성모회의 지도를 맡았고, 회원들과 함께 가난한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일에 참여하였다. 우르타도 신부는 자주 피정 지도와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적 지도를 담당했는데, 이를 통해 여러 젊은이들이 사제성소에 응답하였다. 또한 그는 평신도들을 양성하기 위한 탁월한 방법에 대해 기고하기도 했다. 1941년 그는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인 “칠레는 가톨릭 국가인가?”를 출판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에 산티아고 대교구의 가톨릭 청년운동 지도신부가 되었고, 이어 전국적인 가톨릭 청년운동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직무를 창의성과 헌신과 희생으로써 수행하였다.
1944년 10월, 피정 지도를 하던 중 그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가난한 사람들, 특히 산티아고의 거리를 헤매는 수많은 집 없는 어린이들을 생각하도록 호소해야 할 책임감을 느꼈다. 그의 요청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이것이 우르타도 신부에 의해 제안되어 집이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집이 없는 이들을 위해 가정과도 같은 환경을 제공하는 자선 활동의 한 형태로 잘 알려진 ‘그리스도의 가정’(El Hogar de Cristo)의 시작이었다.
그는 은인들의 도움과 헌신적인 평신도들의 열성적인 협력으로 어린이들을 위한 첫 번째 ‘가정’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여성들과 남성들을 위한 가정도 문을 열었다. 가난한 이들은 ‘그리스도의 가정’에서 따뜻한 가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가정들이 점점 증가하면서 새로운 특징들을 갖게 되었다. 즉 어떤 가정은 사회 복귀를 돕는 센터를, 다른 가정은 직업학교를 겸하는 식으로 그 범위를 넓혀갔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교의 가치에서 영감을 받아 그 정신에 따라 이루어졌다.
1945년 그는 ‘소년의 집’(Boys Town) 운동을 연구하고 이를 어떻게 자신의 나라에 적용할 수 있는지를 숙고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였다. 그의 생애의 마지막 6년은 그리스도의 가정 안에서 다양한 형태를 개발하고 이를 존속시키며 제 역할을 다하도록 하는데 헌신한 시기였다. 1947년 그는 교회의 사회교리를 반영한 조합운동을 장려하기 위해 칠레 노동조합연합(the Chilean Trade Union Association)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1947년과 1950년 사이에 노동조합과 사회적 인문주의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질서에 대한 세 권의 중요한 책들을 저술하였다. 1951년에는 예수회가 정기적으로 교회의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전언’(Mensaje, Message)을 창간하였다.
그는 췌장암에 걸려 몇 달 만에 생을 마감하게 되었는데,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자주 “주님, 저는 만족합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자신의 삶 전체를 가난한 이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명백히 증거하기 위해 사용한 성 알베르투스 우르타도 크루차가 신부는 1952년 8월 18일 산티아고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예수회의 제3수련기 이후 칠레로 돌아와서 선종할 때까지 15년여의 기간 동안 그는 이 모든 일들을 이룩하였다. 그의 사도직은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개인적인 사랑의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그 사랑은 가난하고 버려진 어린이들을 위한 위대한 사랑과 평신도들의 양성을 위한 계몽적 열정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사회 정의의 역동적 이해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1994년 10월 1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5년 10월 23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녀 헬레나 (Helen)
신분 : 황후
활동지역 :
활동연도: 250?-330년
같은이름 : 헤레나, 헬렌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I)의 어머니인 성녀 헬레나(Helena)는 소아시아 북서부 비티니아(Bithynia)의 드레파눔(Drepanum)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270년경에 로마(Roma)의 장군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를 만났는데, 그녀의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둘은 결혼하였다.
그들 사이에서 콘스탄티누스가 태어났다.
293년에 남편 콘스탄티우스는 그리스도교의 박해자 중 한 명인 막시미아누스 황제 휘하에서 카이사르(Caesar)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그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헬레나와 이혼하고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의붓딸인 테오도라(Theodora)와 결혼하였다.
306년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사망하자 콘스탄티누스의 휘하 군인들이 그를 황제로 선포하였고, 312년 10월 12일 밀비안 다리(Milvian Bridge)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격파하고 승리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로 입성하였다.
그 후 그는 그의 어머니인 헬레나에게 ‘아우구스타’(Augusta)라는 칭호를 드렸다.
헬레나가 언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그녀의 노력으로 밀라노(Milano) 칙령을 반포하게 하여 로마 제국 내에서 그리스도교를 인정하고, 투옥된 모든 신자들을 석방하였다.
그녀는 이때부터 그리스도교적인 모든 일을 도우면서 수많은 성당을 짓고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었다.
그 후 아들이 동서 로마제국 모두를 장악한 뒤에 만년에 접어든 헬레나는 326년경에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성지에 오래 머물면서 골고타 언덕에 주님 무덤 성당(성묘 성당)을 세웠다.
전설에 의하면 그녀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십자가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래서 성녀의 상징은 십자가이며, 이콘에서 십자형의 십자가를 들고 있는 성인은 오직 헬레나뿐이다.
그녀는 330년 8월 18일 오늘날 터키의 이즈미트(Izmit)인 니코메디아(Nicomedia)에서 사망하여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 안장되었다.
동방교회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함께 5월 21일에 축일을 기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