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초반 고구려를 크게 위협하던 모용씨의 전·후연前後燕이 몰락한후 세력이 약화된 풍발씨馮拔氏의 북연北燕이 명맥을 이어갔으나, 대동大同에서 일어난 탁발씨拓拔氏의 북위와 동쪽 고구려에 끼인 처지가 된 풍발馮跋의 동생 풍문통(馮弘,재위:431~436)이 고구려에 잠시 머물다가 유송劉宋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북위가 북연의 백랑성白浪城(하북 방산현)을 치자
『讀史方輿紀要』-白狼城在營州西南.漢縣,屬右北平郡.後漢省.建安中,魏公操伐烏桓,歷平岡,登白狼堆.去柳城二百餘里,即故白狼地也.晉咸康六年,石虎謀伐慕容皝,自幽州以東至白狼,皆大興屯田.其後慕容燕復置白狼縣,又析置廣都縣,屬北平郡.
고구려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장수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의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 북연 사신 양이陽伊를 따라 화룡和龍에 이르러 연왕을 사로잡은뒤 두장수가 화룡성에 들어가 후연後燕의 무기고에서 좋은 무기들을 탈취하여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 성을 크게 약탈한다.
이후 이들이 풍문통(재위:430~436)을 호위하여 고구려로 데리고 오자, 북위는 그의 소환을 요구했지만 장수왕이 이를 거절하고 대신 사신을 보내 무마하는 한편 그를 평곽성平郭城(혹 건안성,당산부근)으로 옮겼다가 북풍성北豐城(승덕부근)으로 다시 옮겨 살게 했다.
.《方輿紀要》,後漢末,公孫度據遼東,置城,謂之豊場面.司馬懿伐遼東,豊人南徙,其留者曰北豊,在瀋陽中衞西北.在今承德縣西北.
유송劉宋(420~479) 역시 풍문통과 그 권신들을 송환하도록 요청하였으나 북위와의 관계를 고려해 거절하고 마침내 풍문통을 죽여버린다.
그러다가 북위 문성제文聖帝(재위:409~430)의 비妃 문명황후 풍馮씨의 조부祖父가 장수왕에게 살해당한 북연의 풍문통으로 풍황후가 요구한 고려여인 입궁을 거부하게 되면 북위가 침략할 것을 우려한 장수왕은 북위에 보낼 고구려 왕실녀王室女가 죽었다는 핑계로 거절한뒤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조공외교를 벌이게 된다.『삼국사기』에는 이사건 이후 20년간 조공기록 밖에 없다.
장수왕은 북경지역에 있던 풍문퉁을 잡아다 평양성 서북쪽으로 승덕에 옮겨놓고 살게했던 것인데 뜬금없이 압록강 북쪽으로 비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202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