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장흥위씨 장학재단 출범
대종회는 장흥위씨를 획기적으로 중흥시키겠다는 야심 찬 의도에서 발족됐다. 그렇다면 무슨 일을 해야 그런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가. 역사는 인물이 발전시켰다. 우리 위씨의 발전도 인물의 양성에 있다. 인물을 양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재를 발굴해서 공부할 수 있게 뒷바라지를 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학재단이 필요하고, 장학재단을 만들려면 자금이 있어야 한다.
(1) 험난한 기금조성 모금운동
장학금을 지속적으로 지급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다. 장학재단을 인가받기 위해서는 3억원이 기본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위씨 중에는 돈 많은 사람이 없다. 종업원 1만 명은 고사하고 50명 규모의 중소기업도 없다. 십시일반 적은 돈을 모으는 방법밖에 도리가 없다. 욱량이사장, 찬호회장, 갑종국장 등 3명은 1992년 5월 25일부터 29일까지 모금에 들어가 85명으로부터 2억5천만원을 약정 받았다.
약정된 금액 중 얼마가 현금화 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전주․광주․장흥․부산 등 4개 지역에서 이루어진 실적이니만큼 일단은 성공적이라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1993년 11월 30일까지 출연을 약속한 기금은 9천2백50만원만 입금됐다. 입금실적이 부진하자 회장, 덕운 부회장, 갑종, 봉환씨 등 4명이 다시 전국순회모금에 나섰다.
2차 순회결과도 예상만큼 실적이 좋지는 않았다. 1994년 12월 31일까지 57명으로부터 1억4천7백만원이 입금됐다. 1995년 3월 31일 현재는 1억5천 2백만원이 들어왔다. 실적이 부진한 이유는 스스로 기금출연을 약속한 종인들이 부도를 냈기 때문이다. 사무국은 그 해 10월 2차에 걸쳐 약속을 지켜달라고 호소하는 서신을 띄웠다.
1998년 3월 25일부터 3일간 회장과 재형부회장, 태선사무국장이 추가모금활동에 나서 4천5백만원의 실적을 올렸다. 3월 31일까지는 62명의 종원과 22개 문중단체에서 2억3백90만원이 입금됐다. 5월 3일 하산사 대제 때는 기금을 희사한 78명의 종원과 8개 문중, 14개 지역종친회의 이름을 새긴 ‘장학기금 헌성비’를 사우 뜰에 세웠다.
그러나 기금조성운동은 부진했다. 대종회는 2000년 4월 22일 마지막카드를 뽑아들었다. 전국 모든 위씨 3천4백명의 종원에게 십시일반으로 기금조성에 동참을 호소한 것이다. 5만원이상 능력에 따라 도와달라는 요지의 서신을 보냈다. 두 번에 걸쳐 호소한 결과 2003년 말까지 316명으로부터 2천8백80만원이 모아졌다. 목표액 1억원의 약 29%에 그쳤지만 장학재단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최후의 카드에 기대했으나 법인요건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사건이 벌어졌다. 해방직후 월남해서 어렵게 돈을 모은 위재석고문의 부인 이인숙(李仁淑)여사가 1998년도 하계수련회 등에 동참해보고 후진을 위해 보태라며 2001년 3월 19일 일금 1억원을 희사한 것이다. 이여사의 거액희사는 장학법인을 만들 수 있는 결정적인 여건을 마련해준 동인이 됐던 것이다.
(2) 법인설립 이전의 장학금
비록 장학법인이 만들어지지 않더라도 인재의 학업중단은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학생에게는 당장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기준과 절차가 있어야 한다. 어떤 학생에게 얼마의 장학금을 지급할지 대상과 액수도 정해야 했다. 그래서 장학금 지급규정을 제정하기로 했다.
1994년 12월 10일 대종회 사무실에 회장단 10명을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전문 10조 부칙의 장학운영규정을 심의, 대학생은 60만원, 고교생은 30만원의 장학금지급액수를 확정했다. 10일후 운영위원회에서 규정의 일부를 수정하고, 이듬해인 1995년부터 지역별로 대상자를 엄선,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지역별로 추천된 대상자를 심사했다. 그 결과 대학생 7명, 고교생 15명을 확정했다. 전달식은 1995년 5월 7일 하산사 대제를 지내고 백산재강당에서 회장이 수여했다. 장학금을 시조공 제사에 전달한 것은 학생들에게 문중의 전통을 보여주고, 숭조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기회를 통해 일깨워주자는 것이다.
장학금은 그 때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급했다. 2004년까지 10년간 대학생 75명, 고교생 71명 등 146명에게 8천2백10만원이 지급됐다. 물론 대 성씨의 경우와 비교하면 적은 혜택일 수 있다. 그러나 위씨의 처지는 그게 아니다. 대종회라는 전국적인 조직을 통해서 만난을 무릅쓰며 인재양성을 위해 몸부림친 소득이 그것이다.
(3) 장학재단인가와 정식출범
대종회는 장학재단의 설립을 위해 행정절차를 밟아야 했다. 2003년 9월 17일 대종회와 지회장단 회의를 열었다. 장학회 기본재산 3억원 적립, 이사 15명․감사 2명의 임원구성, 장학회 정관 등을 확정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2003년 10월 16일 『재단법인 장흥위씨장학회』설립신청서를 서울시 중부교육청에 제출했다.
교육청은 접수된 서류를 심의했다. 서류에 하자가 없자 2004년 1월 13일자로 서울 특별시 교육감 명의의 재단법인 장흥위씨장학회 법인설립 허가서( 792호)를 발행해 줬다. 허가서는 2004년 2월 3일 법무사를 거쳐 서울서부지방법원 용산등기소에 제출, 등기부에 등록번호 2743220027408호로 접수됐다. 용산세무서는 2004년 2월 9일자로 1068212192호로 사업자등록증을 발부했다.
이로써 우리도 장학재단을 정식으로 출범하게 됐다. 기금조성운동을 벌인지 무려 12년 만에 거둔 장거인 것이다. 이제 우리 후손들은 적지만 안정적인 재원에서 장학금을 지원받을 수 있는 토대를 이루었다. 대종회장이 누가되더라도 기본재산에는 손을 댈 수 없다. 다만 영재를 제대로 기르기 위해서는 꾸준히 기본재산을 늘려나가야 한다. 그 일은 앞으로도 계속돼야 한다.
4) 위씨종보의 꾸준한 발행
현대를 가리켜 홍보시대라 한다. 정부는 업적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각종 홍보물을 양산한다. 크고 작은 기업들도 자사의 장점을 알리기 위해 TV와 신문에 엄청난 물량의 광고를 내고 있다. 그것도 부족해서 전단지를 뿌리고, 스티커를 제작 집집마다 돌리고 있다. 홍보는 자신의 업적을 선전하는 수단이다.
종친회라는 조직도 많은 종친들과 원만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집행부도 종인들에게 사업의 내용을 알려 협조를 받아야 한다. 종인들도 집행부에 자신의 의사를 개진해서 건의하고 시정하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그 매개체는 기록성과 홍보성을 동시에 수행하기에 어쩌면 필수불가결의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던데 범곡은 비교적 일찍 종보를 발행하게 했다.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인 1995년에 창간호를 낸 ‘장흥위씨종보’는 2017년 5월에 이미 23호 째를 발행했으니 다른 문중에 비해 비교적 발 빠른 행보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는 범곡의 종친회에 대한 신념과 사명감 그리고 애족관의 발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단행본인 종보를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발행하기란 쉬운 게 아니다. 1년마다 발행하는데 뭐가 어려우냐고 할 수 있으나 막상 책임을 지고 해보면 애로가 많다. 책을 만들려면 원고 등 사전에 준비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책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모여야 종합적인 작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종회는 그동안 1만3000부의 종보를 발행했다. 강산이 변한다는 시간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간행물을 발행한 것은 조직이 그만큼 안정됐다는 얘기도 된다. 조직이 안정되지 않으면 일의 지속성도 발전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장흥위씨종보는 위씨를 발전시키는데 음양으로 촉진제가 됐다.
현재 대종회의 근간인 여러 작업을 시작하셨네요
휼륭하신 위문중 종친분들이 계시기에 현재의 우리 위문중 대종회가 활성화되어 나날이 발전되리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