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아시아 서사기행 2 / 소그드Sogd인의 짐baggage cla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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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나의 아침을 너에게 보낸다
나의 새벽은 정갈하고
나의 아침은 거룩하여
누구도 손 댄 적 없으니
따뜻한 나의 사랑을 너에게 부친다
나의 짐은 깨끗하고
행복으로 부풀어 올라 사방이 어여쁘니
내가 보내는 사랑을 네가 입어보고
내가 보내는 새벽처럼 너도 고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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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소그드Sogd인의 짐baggage claim
오후 일곱 시 삼십오 분에
인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Tashkent에 도착한 것은
밤 여덟 시 사십 분
밤에 이륙한 비행기는 시차 관계로 인해
다시 이역 땅의 밤에 내린다
짙은 어둠이 내린 타슈켄트의 밤은 아름답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동일한 중력의 힘이 작용하는가
인간의 마을이 평화롭다
이역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
새로운 것을 찾아간다는, 설레는 객창감
그러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돌아선다
baggage claim 앞은, 부친 가방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온통 북새통이다
컨베이어 벨트conveyor belt 앞에서
수화물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다
지루함은 이내 짜증으로 바뀌고
짜증도 바닥이 나자 곧장 불안으로 돌아선다
아무리 기다려도 짐이 안 나온다
짐이라야 달랑 작은 가방 하나
나는 버릇처럼 여행가방에 많은 것을 넣지 않는다
옷가지를 줄이기만 해도
가방의 부피는 절반으로 줄어든다
기다림의 지루함을 달래려고
나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 팔짱을 낀 채 늘어선
사람들의 표정을 읽어본다
늘어선 사람들의 생을 읽는다
타슈켄트 공항은 유럽적 풍모보다는
동양적 골격과 체형을 지닌 얼굴들로 넘친다
가끔씩 유럽적 풍모
더러는 러시아적 인상
이따금씩 들리는 슬라브의 언어로 떠들썩하다
그러나 대개는 귀향하는 우즈베크인들인 듯
시간이 흐르자 소란스런 분위기도 점차 가라앉고
지체되는 짐 찾기에 초조해 있던 기색들이
조금씩 인내심으로 바뀐다
얼마를 더 기다렸을까
빈 채로 빙빙 돌아가던 컨베이어 벨트가
마침내 짐을 쏟아놓기 시작한다
보따리들이 예사롭지 않다
짐들의 크기는 저마다 엄청나다
대개 커다란 종이박스에 담아 끈으로 질끈 동여맨
무섭도록 엄청난 크기의 짐들
그러나 개중에는 큰 가방
여러 겹의 비닐로 동여 싼 커다란 보따리들
가방에 넣은 짐보다는
한 사람마다 서너 개씩의
대형의 보따리들이 훨씬 더 많다
나는 장사에 능했던 옛 소그드인을 떠올린다
소그디아나soghdiana 사람들의 근면성을 생각한다
중국인들에게는 ‘상호商胡’라 불린 사람들
비옥한 오아시스 지대의 무역로에 살면서
정복자와 거래를 하고
페르시아에 물건을 팔고
알렉산더 군대에게 짓밟히면서도 살아남으며
칭기즈칸의 말발굽 아래
티무르의 군사들에게 복종을 바치면서도
생업의 비법을 터득할 줄 알았던 소그드인들
지상에 일어난 왕조王朝들인
박트리아Bactria를 섬기고
대월지大月氏와 쿠샨왕조Kushan Dynasty를 모두 받들면서도
소그디아나의 땅에 주인으로 남은 저들
이 밤 컨베이어 벨트로 끝임 없이 쏟아내는
저 수화물들은 다 어디로 사라질까
여염의 짐 치고는 너무 많은 보따리들
짐은 통증처럼 부풀어 있다
서로의 어깨를 맞댄 채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나와
새로운 체상을 찾아가는 짐들마다
낮선 땅이 어리둥절하다
또 어떤 흥정을 견디며 서역 쪽으로
이란으로 터키로 팔려나갈까
면직물・모직물・보석세공품・향료・약재
디지털 ‘商胡’는 또 어디로 흘러가서 흥정을 할까
사산 조朝 Sasan dynasty가 오면 사산 조와 흥정하고
아케메네스 조Achaemenid Persia가 범람하면
아케메네스 조와 장사를 하던 저들
육신은 굴복을 받쳤어도
생업을 복종시키지는 않았었다
저들의 가슴에는 투르크의 바람도 들어 있고
우즈베크 족의 핏줄도 들어 있고
카자흐 족의 사랑도 들어 있을 것이다
저 숱한 보따리들
‘신이 창조한 세계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이 땅에서 아무다리야와 시르다리야 강을 건너
또 어느 필부의 복색服色으로 팔리어 갈까
그러나 우리 일행의 가방은 나올 기색이 없다
벌써 두 시간을 기다린 셈
마침내 텅 빈 벨트만 무료하게 공회전을 한다
끈질긴 무료와 참회의 시간
인고의 흔적들을 사진 찍을 수도 없다
공식적인 모든 처소의 사진촬영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밤 열 시 삼십오 분이 지나서야
컨베이어 벨트에 기다리던 가방들이 쓸쓸히 쏟아진다
그러나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시간이 사정없이 흐르고
한둘씩 짐을 찾은 사람들이 거의 다 돌아가고
이제 벨트 주위에 남은 것은
약간의 다른 여행자들과 우리 일행뿐
밤 열한 시가 가까운 시간
마침내 타인의 가방인 듯한
너무 오래 기다려서 낯선 나의 가방을 내가 받아든다
밤 열한 시
다시 입국심사대로 이동한다
또 다시 기다려야 하는 시간
행렬은 길고 밤은 깊어간다
밤늦은 입국심사대 앞은 장사진
그렇지만 유럽도 아시아도 우즈베크도
그리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나도 조용하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입국심사에 대한 염려와 불안감
심사의 속도는 그저 느리기만하다
정말로 유목의 고향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까
우리는 자정 무렵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심사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 수 있을까
소그드의 입국흥정은 기약이 없다
짜증도 지쳤다
이역의 밤이 깊다
지친 나는 차츰 소그드인의 밤을 닮아간다
기나긴 인내의 행렬 뒤에 멈추어 선 채
실크로드에서 길을 잃은
한 알 오디 같은 내가 서 있다
(이어짐)
첫댓글 와-이희춘님께서이젠 중앙아시아로 여정에 나섰나 봅니다. 덕분에 중앙아시아 여행도 같이 동행해보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