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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읍내에서 바라본 죽령은 엄두조차 내기 어려울 정도로 험준한 준령이지만 실제로 걸어보면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고갯길이라는 사실조차 잊을 만큼 편안하고 경사가 완만하다. 영주시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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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제1관문인 죽령 모습. 영주시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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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가던 행인이 퇴계와 온계의 우정을 기리는 촉령대 비에 쓰인 글을 읽고 있다. 영주시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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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옛길. 영주시 제공 | | '사서에 기록돼 있는 가장 오래된 길'
'영남의 제1관문이자 1천800여 년의 세월을 간직한 길'
'고구려`신라`백제 등 삼국의 격전지였던 곳’…. 바로 죽령(竹嶺)이다.
옛 영화(榮華)를 간직했던 죽령은 고속도로가 등장하면서 역사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가는 ‘가지 않는 길’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옛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옛길에 관심을 보이면서 다시 부활을 꿈꾸고 있다. 옛 성현들의 삶과 영주 선비들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기 위한 발걸음이 찾아들기 때문이다.
◆죽령 옛길
죽령 옛길은 중앙선 소백산역(희방사역)을 출발, 죽령고개 마루까지 2.4㎞ 구간이다. 먼발치에서 바라볼 때의 길과 실제로 걸어볼 때의 느낌은 사뭇 다르다. 풍기읍내에서 바라본 죽령은 엄두조차 내기 어려울 정도로 험준한 준령이지만 실제로 걸어보면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고갯길이라는 사실조차 잊을 만큼 편안하고 경사가 완만하다. 출발지인 소백산역 앞에는 새로 조성된 초가의 물레방아 소리가 경쾌하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무쇠다리’로 불렸다. 마을에 무쇠로 놓은 다리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마을 이름이 ‘수철리’인 이유다. 여기서 희방사 계곡물과 죽령의 물이 만나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을 이룬다.
시원한 물소리와 바람소리가 정겹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계곡 옆에 들어선 아기자기한 민박과 펜션이 눈길을 끈다. 마을의 고목은 사라졌고 옛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역 건너편에 ‘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타불)이라고 새겨놓은 암벽의 각자와 비석 두 개만이 길손을 반겼다. 옛 길의 자취는 중앙고속도로 아래를 막 지나 죽령 기슭 산자락에 접어들면 오른편에서 다시 나타난다. 여기서부터 고갯길에 접어든다. 시원한 계곡 물소리와 폭포소리, 바람소리, 새소리가 흐드러지게 핀 야생화와 함께 어우러지며 정겨운 길 걷기를 재촉한다.
잠시 과수원 길을 지나 산모퉁이를 돌아 오르면 넝쿨들이 뒤엉켜 터널을 만들어놓아 하늘조차 볼 수 없을 정도다. 인기척이 없으면 스산한 적막감까지 감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쭉쭉 뻗은 낙엽송과 참나무들은 보기에도 시원하다. 이름 모를 산새들의 울음소리와 더덕 냄새에 취하다 보면 갑자기 골짜기가 제법 넓게 펼쳐진다. 주막거리다. 여기에는 두어 집 주막이 있었을 것 같다. 옛 주막의 흔적을 표시라도 하듯 곳곳에 돌무지가 가득하다. 옛 주막 터다. 숲 속의 일부가 된 폐가 터이지만 예전에는 청운의 꿈을 품고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향하던 선비, 허리춤에 짚신을 차고 봇짐과 행상을 지고 힘들게 걷는 보부상, 고을에 부임하는 관리 등 다양한 사람들이 걸음을 재촉하며 숨 가쁘게 걸었던 천년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죽령길(명승 30호)의 유일한 쉼터였을 것이다.
냇물을 끼고 돌길을 따라 오르며 두어 굽이 모퉁이를 돌다 보면 양편 산 언덕이 차츰 멀찍이 물러서면서 골짜기가 시원하게 트인다. 고갯마루 턱밑 어디쯤 죽령을 개척한 죽죽사당이 있었다는 얘기가 있어 주변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완만했던 경사가 주막 터를 지나면서 갑자기 가팔라진다. 숨은 목 끝까지 차오르고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흘러내렸다. 한발 한발 내딛는 걸음은 바위를 옮기는 것 같고, 거친 숨소리는 조용하던 숲 속에 새로운 메아리를 만들어 낸다.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길옆 옹달샘을 만나게 된다. 옹달샘 위에 가지런히 놓인 표주박 바가지에 물을 담아 한 모금 마시면 옛 길의 피곤함도 잊을 수 있다. 잠시 쉼표를 찍고 땀을 식힐 수 있는 곳이다.
다시 걸음을 재촉하다 보면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봄꽃과 곳곳에 아름드리 소나무의 모습이 장관이다. 이곳은 퇴계 이황과 온계 이해 형제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퇴계 선생이 풍기군수로 있을 무렵, 넷째 형인 온계는 충청감사였다. 온계가 고향인 예안을 다녀가는 길에 풍기 땅을 지날 때마다 퇴계는 죽령까지 배웅 나왔고 퇴계와 온계는 ‘잔운대`촉령대’라는 바위에 앉아 남다른 우애와 석별의 정을 나눴다. 현재 죽령고갯길에는 이들의 우애를 기리는 촉령대 비가 세워져 있다. 잠시 역사 이야기를 뒤로하고 자연의 풍광에 취해 길을 걷다 보면 눈앞에 죽령루가 보인다. 벌써 죽령마루다. 누각 전면은 죽령의 대표적인 지명을 따라 ‘죽령루’(竹嶺樓)라 하고, 후면은 충북에서 고갯마루를 넘으면 영남의 첫 관문이라는 뜻으로 경상도의 옛 지명인 교남을 근거로 ‘교남제일관’(嶠南第一關)이라고 이름 붙였다.
해발 689m의 죽령 고갯마루. 이곳은 길손들과 차량 안전을 기원하는 장승과 ‘죽령주막’이라는 초가 두 채가 길손들을 맞는다. 따뜻한 국밥 한 그릇과 고소한 도토리묵, 파전, 막걸리 한 잔은 죽령옛길의 여정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고, 쌓인 피로를 말끔히 풀어준다. 죽령 주막 옆 장승공원에는 경북과 충북의 화합을 다지는 상징물인 장승이 즐비하게 서 있어 구경해 볼 만하다. 익살스러운 표정부터 근엄한 표정까지 다양한 표정을 지닌 장승을 볼 수 있다. 매년 11월쯤에는 이곳에서 죽령장승을 다시 세우는 장승제도 열린다. 죽령옛길은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과 눈길을 붙잡을 만큼 빼어난 절경은 없다. 또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할 정도로 험준한 구간도 없다. 영주 사람들은 이웃에 ‘마실’ 가듯 가볍게 죽령 옛길을 오르내리곤 한다. 수시로 오르내려도 날마다 먹는 밥처럼 물리지 않고, 듬직한 소백산처럼 푸근한 느낌을 주는 길이다.
◆영남 제1관문 죽령
죽령은 경북 영주 풍기읍 수철리에서 충북 단양군 대강면을 넘어가는 아흔아홉 굽이의 험준한 고갯길이다. 1천800여 년 동안 문경새재, 영동 추풍령과 함께 교통의 중추적 역할을 해 왔다. 바람이 거세고 소낙비가 거세고 도둑이 거세다고 해서 ‘삼재령’이라고도 했고, 풍치가 아름답고 길손이 반갑고 주막 인심이 좋다고 해서 ‘삼풍’이라고도 불렸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동쪽으로는 영주`봉화가, 서쪽으로는 월악산`금수산이, 남쪽으로는 소백산 일대 첩첩산중이, 북쪽으로는 연화봉`비로봉`국망봉 등이 펼쳐진다.
신라 때 죽죽(竹竹)이란 사람이 닦았다고 해 죽령이란 이름을 얻었다는 이 길은 한때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가 되기도 했고 옛 선비들의 과거길이기도 했으며, 영남에서 기호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죽령고개는 예로부터 한 국가나 지역의 경계를 이루는 중요한 장소이며 역사와 문화권을 다르게 발전시켜온 분기점이다. 또 사람이 서로 만나고 헤어질 때 정을 나누었던 장소이고, 오고 가는 길손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땀을 씻고 쉬어가던 휴식공간이다. 영남의 수많은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고개를 넘었고, 때로는 과거에 낙방해 쓰라린 가슴을 안고 다시 고개를 넘는 선비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문서를 한 아름 안은 고을 관원, 어깨가 부서질 만큼 짐을 진 봇짐장수의 땀도 고개에 고스란히 묻어 있다.
죽령은 역사도 품고 있다. 죽령은 고구려`신라`백제 삼국의 격전지였다. 고구려의 전성기인 광개토대왕 때 죽령은 고구려의 국경선이었다. 이후 신라의 진흥왕은 백제와 연합해 거칠부 등으로 하여금 죽령 이북(지금의 충북)의 10여 고을을 빼앗도록 했고, 삼국 통일 직전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이며 장군인 바보 온달이 아내 평강공주와 왕에게 신라에 빼앗긴 땅을 회복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겠다며 다짐하고 출전, 전사한 장소가 바로 죽령이다.
반대로 죽령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계기로 신라의 김유신은 중원 땅(충주)에 삼국통일 기념탑을 세웠다고 한다. 고구려 군사들이 넘어다녔고, 잃었던 땅을 되찾은 신라군과, 견훤을 물리친 고려의 왕건, 나라를 몽땅 바친 경순왕도 눈물을 흘리며 죽령을 넘어 개성으로 갔다. 이 밖에 수많은 민초들이 죽령을 넘어다녔다. 죽령은 역사의 산 증인인 셈이다. 오늘날의 죽령은 예전의 죽령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죽령을 오르는 길엔 소백산이 품은 천년고찰 희방사와 희방폭포, 촉령대 비가 있다. 희방사는 643년 두운 조사가 소백산 남쪽 기슭 해발 850m에 창건한 사찰이다. 절 입구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연림이 빽빽이 우거져 있으며, 절 바로 밑에 내륙지방 최대 폭포인 높이 28m의 희방폭포가 있다. 폭포가 떨어지는 계곡에는 커다란 바위 덩어리와 숲이 펼쳐진다. 경내에 희방사 동종과 월인석보 책판을 보존하고 있다. 죽령을 넘나들던 과객들과 상인들은 한 번쯤 이곳에 들러 저마다의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