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막 2:1-12)
성도에게 믿음을 빼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습니다. 하나님도 천국도 미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생명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동사입니다. 그저 머리로 이해하고 습관으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삶을 통해 체험하는 능력입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신앙과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신앙은 차이가 큽니다. 머리로 아는 신앙은 신앙과 삶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신약시대의 바리새인처럼 종교인입니다.
그러나 진짜 믿음은 신앙과 삶이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내용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함으로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교회 안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믿음을 자랑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믿음의 실재가 없으면 하나님과 관계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묵상하는 생명의 샘가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시대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핵심요절은 (삿 21:25)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왕이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모두가 자기 길이 옳은 길이라고 생각하고 그 길로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 성도라면 그는 실제는 하나님 백성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중풍병자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이 불치의 병에서 고쳐줄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이신데 내가 어찌 가만히 집에 앉아 죽기만을 기다리겠습니까? 그래서 직접 예수님을 찾아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께 나아갔습니까? 네 명의 친구들이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들고 예수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절에서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그들의 외모가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어떤 믿음이었기에 예수님께 기뻐하시고 그 중풍병자의 병뿐 만 아니라 죄까지 사해주셨습니까?
1. 예수님께 나아가는 믿음이었습니다(3).
3절에서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중풍병에 걸린 사람이었습니다. 요즈음처럼 현대의학이 발달된 시대가 아니었기에 그당시 중풍병은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오랜 병으로 인해 절망하고 있을 때 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자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야요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가면 고침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중풍병자는 아마 지금까지는 자포자기하고 누워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일어섰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면 낫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아주 단순한 믿음입니다. 단순한 믿음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뿐 만 아니라 이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 데리고 가면 낫는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믿음은 듣는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소문이지만 예수님이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고침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다시말하면 예수님께 나아가면 구원받는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진짜 믿음은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항상 행동을 동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역사라는 말이 있듯이 믿음은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표현되어질 때 진정한 믿음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근거는 바로 말씀인 것입니다. 소문이란 말 그대로 소문입니다. 소문은 객관적 지식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주관적으로 내게 적용되지 않으면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관심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나는 어떤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왔습니까? 그 믿음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렇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믿음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자신이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원했고 네 명의 친구는 이 불쌍한 친구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아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추석명절을 맞이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귀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든 가족이 예수님께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추석명절을 즈음하여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믿지않는 우리 가족구원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 어떤 사명보다 가장 큰 사명은 내 사랑하는 가족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누구든 지 예수님께로 나아오면 구원받습니다. 생명을 얻습니다. 천국의 영원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도 이 귀한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합심하고 협력하는 믿음(2~3).
다시 3절을 보시면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라고 말합니다.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고 예수께 나왔다고 합니다. 네 사람속에도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로 가면 불치의 병도 고침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그들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하나된 믿음이었습니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는데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모두가 마음을 모았다는 것입니다. 합심하여 힘을 모으면 주님이 그만큼 더 기뻐하십니다.
교회에서 합심기도를 강조하는 이유는 거기에 놀라운 시너지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개인기도는 잘 하는데 합심기도는 관심이 없습니다. 기도가 모아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운데 어던 사람은 혼자서는 잘 믿고 일도 잘하고 기도도 하지만, 합력하는 일에 미흡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되는 일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은 바로 하나됨의 공동체입니다. 가정과 교회입니다. 하나되는 곳에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다시말하면 두 세사람이라도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나누어 놓고 갈등하게 하고 싸우게 하는 것은 다 사탄의 역사입니다. 사탄이라는 말은 대적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점점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함께 지나다보면 갈등하기도 하고 다툴수도 있습니다.
상처를 입고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갈등을 통해서 더 성숙해지고 또 주님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에베소서 4장 2,3절.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의 합심과 협력으로 말미암아 꺼져가는 심령이 구원을 얻는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지금 중풍병자와 네 친구는 생각과 마음이 하나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하나됨을 절대적입니다. 합심하고 협력할 때 하나되어지고 하나될 때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나타납니다. 하나가 되어질 때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가정도 교회도 어느 기관도 가장 먼저 하나되는 것이 최대의 과제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됨의 원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엡 2:14-18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는 바로 하나됨의 원리가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됨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십자가를 질 때 하나됨을 이루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자기 죽음입니다. 내 옛사람이 죽고 새생명되신 예수님이 사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바라는 것을 이루는 것입니다.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십자가는 화평을 이룹니다. 십자가를 통해 둘이 하나되게 하시고 한 성령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가운데도 하나됨에 대한 소원이 담겨있습니다. "네가 아버지와 하나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하나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자 하나님의 뜻입니다.
전도서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에 한 사람이 나가서 싸우면 패하겠지만 두 사람이 함께 하면 능히 이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연합하고 협력하는 믿음을 가리켜서 '삼겹줄 신앙'이라고 합니다. 연합하고 협력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자연히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적인 것을 싫어하십니다. 오늘날 세상은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는 인간성 상실을 가져다 줍니다. 사람은 본래 더불어 살고 협력하며 살 때 사람다운 면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함께 할 줄 모르고, 독선적이거나 자기 중심적으로만 치우치는 사람은 인생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하나됨의 원리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됨을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를 위해 저와 여러분이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을 위해 내가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정을 하나님 나라로 화목하고 평강이 가득한 믿음의 가정으로 세워가는 일에 온전히 쓰임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4~5).
4절에서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라고 말합니다.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로 나아왔지만 예수님이 계신 곳에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모였기 때문에 도저히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이 거의 전부가 이런 갈급함 때문에 모였기 때문에 양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이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뿐입니다.
포기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시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그런 상황에서 단념하고 그냥 되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에 이들의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코 뒤로 물러설 수 가 없었습니다. 믿음은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때까지 기다리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상한 방법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그것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내고 침상을 예수님께 달아 내리는 방법이었습니다. 당시에 지붕은 지금처럼 튼튼하게 된 것이 아니라 나무로 덮어놓았기 때문에 뜯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저들은 진심으로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세상의 의학은 고칠 수 없지만 예수님은 능히 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지붕을 뜯고 침상 채로 중풍병자를 내렸다는 것은 난관을 극복한 믿음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나아가려면 여러 가지 장애가 우리를 가로막습니다. 가까이는 사람들입니다. 친구들, 가족들이 반대하기도 합니다. 뿐 만 아니라 주변환경이 교회에 못 나가도록 가로막을 때도 있습니다. 주일예배를 드리려고만 하면 손님이 찾아온다든지 급한 일이 생겨서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참 믿음을 지키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들처럼 장애가 있다고 포기하지 않고 지붕을 뜯어서라도 주님께 나아가는 의지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방 안에 있었던 예수님을 위시한 사람들이 얼마나 당황하게 했겠습니까? 무례하다고 비난받아 마땅할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내 친구를 살려야 한다.
이 친구를 살리기 위하여 내 이웃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은 이 무모하기 조차한 이 행동을 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이것이 장애를 극복한 믿음입니다. 어떠한 장애가 있어도 믿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어떠한 시련이 있어도 포기할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께 나아가는 길에 장애가 있다고 중단하시렵니까? 포기하고 다음에 하면 되지 하고 돌아서렵니까? 아닙니다.
진짜 믿음은 타협하거나 중단하지 않습니다. 담대하게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다시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물론 이 대답은 중풍병자가 기대했던 대답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기대한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네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중풍병자의 근본적 필요, 그보다 더 근본적인 필요, 중풍병을 가져온 원인, 바로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그 사람의 죄를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사함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무엇때문에 오셨습니까? 그의 탄생을 예고하는 천사는 마리아와 요셉에게 무어라고 말했습니까? 아들을 나으리니 이름을 뭐라고 하라? '예수라 하라'. 예수의 뜻이 뭡니까? 구원,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이를 위해 오신 것입니다.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던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삶의 문제, 이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인생은 성공하고도 마지막은 실패입니다. 파산입니다. 파멸입니다. 절망입니다. 심판입니다. 죄문제 해결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이 중풍병자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거기에 서기관들이 있었는데, 서기관들이 흥분합니다. '아니, 저 사람이 누군데 사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가 있단 말인가?'. 흥분했습니다. 그 흥분은 타당한 것입니다. 이유있는 흥분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고 있었던 한 가지, 뭘 몰랐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십니까? 이것을 믿지 못하면 아직도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짊어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나 대신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받으시고 골고다의 언덕에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습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의 피 흘림으로 용서받은 사실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근본문제의 해결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진짜 사랑한다면, 내 이웃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이 생명의 복음 죄사함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땅에 존재하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죄사함의 복음을 전해서 죄와 사망의 법에 사로잡혀 있는 인생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구원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육체적 질병까지 치료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중풍병자에게 '너 죄사함 받았다. 너의 영혼이 구원받았다. 가장 중요한 문제해결 했으니까 그냥 가라.' 그러시지 않았습니다. 무엇까지 해결하셨습니까? 육체의 질병까지 해결해주셨습니다. 그의 영혼을 죄사함으로 영적인 죽음에서 구원해주시고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주셨습니까? 그 다음에 11절,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일어나라. 일어날 수 없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라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 12절에 보면 일어났습니까? 못 일어났습니까? 일어났습니다. 일어나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거기까지 도우셨습니다. 육체적인 질병까지 해결해주셨습니다. 의학적으로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혼이 구원받은 것처럼 그 육체도 질병에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신유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저들은 마음을 같이 하여 주님께 인도하였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는 믿음으로, 연합하고 협력하는 믿음으로, 포기하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주님은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사함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문제만이 아니라 육체의 질병까지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인적인 구원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성도들이 다 이 하나님의 전인적인 구원을 체험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