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은수 시인의 시집 『핸드폰 속에 거미가 산다』
약력
장 은 수
충북 보은 출생.
2012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
(사)한국문인협회 광진지부 회장·
(사)한국문인협회 중앙위원·
(사)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사)열린시조학회 회장 역임.
시조 전문지 계간 《정형시학》 책임주간.
광진문화예술센터 시 창작 강사 역임(11년).
7대, 8대 (사)한국예총 광진구지회 회장 역임, 현 명예회장.
한국시조시인협회 《시조미학》 주간.
저서
시집 『전봇대가 일어서다』『고추의 계절』.
시조집 『서울 카라반』 『새의 지문』
『풀밭 위의 식사』 『핸드폰 속에 거미가 산다』.
수상
서포김만중문학상, 교육과학부장관상,
강원도교육감상, 천강문학상 시조 부문 대상,
한국동서문학상 작품상,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
자랑스러운한국인100인대상,
대한민국예술문화 대상.
esooc@daum.net
시인의 말
날이 선 강바람이
강물을 들썩이면
새들의 빛바랜 무늬가
귓불에 젖어 들어
에굽은 노을 한 자락
여기 풀어놓습니다.
2024년 11월
장은수
핸드폰 속에 거미가 산다
지하철 환승 통로 계단 바삐 내려갈 즈음
누군가 내 손을 툭 치고 지나간다
엇갈린 몸과 몸 사이 핸드폰의 비명 소리
폰 속엔 언제부터 거미가 살고 있었나
액정화면 가득 덮은 새하얀 거미줄들
세상사 얽히고설킨 그 무엇을 증거하나
금이 간 틈새 너머 풍경도 깨져 보이고
주고받는 말과 글도 굴절된 허상 앞에
아득한 미로에 빠져 가는 길을 잃었다
파도의 음계
해 질 무렵 갈매기가 장음계로 길을 낸다
파도를 다독이듯 내 정수리 쓰다듬듯
먼 도시 아들 소식을
철썩철썩 들려주며
허공을 붙들고서 윙윙대는 동백나무
검푸른 잎새 사이 음표 튀는 가지마다
헐렁한 적삼 앞섶에
얼룩 지도 마른다
내 삶의 언저리에 얼굴 가린 그 순간을
다시는 되풀이 말자 손사래로 다짐하며
하루를 마름질한다
밀려오는 해무 앞에
흰 소*
맨 처음 고삐를 잡은 농부는 누구일까
고명처럼 얹혀 온 길 세월을 걸쳐 입고
희붉은 코와 입 둘레 거친 숨결 몰아친다
힘겹게 디딘 걸음 이 순간이 버거울 뿐
한평생 똥밭에서 뒹구는 쇠똥구리처럼
한숨도 땅 꺼지도록 힘 있을 때 뱉으란다
거죽 위로 돋은 뼈가 뿔이 되어 솟아날 즈음
온몸의 허기를 털고 바라는 물 한 모금
온 들판 비가 내린다, 초록 펄펄 살아난다
*서양화가 이중섭(1916~1956)의 유화 작품(1954년).
오죽헌
우연히 다시 만난 검은 대숲 길목에서
시계태엽 되감듯이 회리바람 서걱댄다
죽담 위 비질 자국이
획을 삐쳐 내리긋고
세월도 비켜 앉아 곧추선 가지마다
휘어진 산 그림자 초충도병* 그러고
돌 틈새 비집고 나온
초록 죽순竹筍 돌올하다
오죽 뿌리 끝에 달린 한 사내 울음소리
다시금 되살아나 하늘 문을 열고 있나
햇살이 등을 척 굽혀
젖꼭지를 물린다
*식물과 벌레를 그린 신사임당의 그림이 담긴 병풍.
바리데기*
새벽바람 전갈자리 어둠을 밀어내고
오랜 잠의 옷섶에서 빠져나온 순한 꿈들
팽나무 가지 핥으며 숲 뒤로 사라진다
불 꺼진 도시의 변방 하루가 버거운 밤
울어대는 아이 입술 젖병을 물릴 무렵
별은 또 깜박거리며 하늘에 촛불을 켠다
눈물을 끌고 가는 하루치 걸음 밖에
종이 벽에 점도 찍고 울타리를 만들어도
좀처럼 잊힐 리 없는, 피를 섞는 사랑아
마음 비탈 가까스로 떠도는 하늘가에
어둠의 흩이불을 덧대고 꿰맨 자리
서로가 부둥켜안은 길이 또 엇갈린다
*오구굿에서, 죽은 사람의 넋을 저승에 보낼 때에 무당이 부르는 노래.
해설 /
무저갱 속 춤추는 벌새
이송희 시인
장은수 시인의 시에는 소멸하거나 잊혀가는 존재들에 관한 애틋하고 애처로운 시선이 머물러 있다. 그것은 단순히 '슬픔'이라는 감정을 넘어 내면화의 과정 혹은 일정한 거리 두기를 통해 소멸하거나 죽어가는 생명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환기한다. 소멸 혹은 죽음은 어떤 특정한 개인에게만 닥치는 숙명이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음을 인지하게 될 때 우리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장은수 시인의 시집에서 유독 많이 등장하는 가을과 겨울이라는 계절적 배경과 해 질 무렵 혹은 밤의 이미지는 위태로운 길을 걷는 이들의 발과 주름진 시간을 구체화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가을은 곡식이나 열매를 거둬들이는 계절이면서 한편으로는 잎이 지는 상실과 소멸의 계절이라는 점에서 해질 무렵의 풍경과 닮았다. 또한 겨울은 종자를 보존하기 위해 양분을 저장하며 부활과 재생을 준비하는 계절이지만, 춥고 어두운 속성이 있어 밤의 이미지와 닮았다.
지하철 환승 통로 계단 바삐 내려갈 즈음
누군가 내 손을 툭 치고 지나간다
엇갈린 몸과 몸 사이 핸드폰의 비명 소리
폰 속엔 언제부터 거미가 살고 있었나
액정화면 가득 덮은 새하얀 거미줄들
세상사 얽히고설킨 그 무엇을 증거하나
금이 간 틈새 너머 풍경도 깨져 보이고
주고받는 말과 글도 굴절된 허상 앞에
아득한 미로에 빠져 가는 길을 잃었다
-「핸드폰 속에 거미가 산다」 전문
이 시는 "지하철 환승 통로 계단"을 바삐 내려가는 중에, 누군가 주체의 손을 툭 치면서 "엇갈린 몸과 몸 사이 핸드폰"이 떨어지는 상황으로부터 시작된다. 주체는 금이 간 핸드폰 액정화면을 보며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세상을 읽는다. 깨진 액정으로 보는 세상이야말로 진정성이 결여된,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오늘의 자본주의적 삶을 증언하는 것은 아닐까. 현대사회에서 핸드폰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며 도구인데 액정이 박살이 난 탓에 주체는 아득한 미로에서 길을 헤매는 중이다. 거미는 소통을 막는 장애물로 현대를 살아가는 주체에게 단절의 원인을 제공한다. "금이 간 틈새 너머 풍경도 깨져 보이고""말과 글도 굴절"되어 보이듯 깨진 거울로 세상을 보면 대상이 깨져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핸드폰이 깨지지 않았을 때 보았던 세상이야말로 편견이 없었는데, 누군가에 의해 핸드폰이 깨져 거미줄이 생기면서 편견은 싹튼다. 거미줄은 내가 세상을 보는 좁은 시선이며 관점이고 선입견일 수 있다. 이런 좁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면 길을 잃거나 헤맬 수밖에 없지 않을까? 거미줄이 세상을 잘못 보게(받아들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지 못하고 외부에서만 문제를 찾으면 문제는 보이지 않고 해결은 쉽지 않게 된다. 자신이 쓴 색안경을 벗기 전에는 세상과의 진정한 소통을 기대하기 어렵다.
힘든 시기를 살아내는 우리 민초의 강력한 생명력과 생의 의지를 흰 소에 빗대어 보여준 「흰 소」의 일부를 인용해 본다. 우리나라는 건국 이래로 외세 침략을 줄잡아970번 정도 당했다고 하는데, 매번 이 국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권력자나 지배 계층이 아니라 여리지만 모이면 강인해졌던 민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힘을 모아 참고 견디고 악착같이 버텨서 국난을 이겨낸 민초들의 모습은 마치 흰 소와 닮았다. 낮고 비좁은 곳에 있지만 그들이 있기에 우리도 존재한다는 믿음과 확신이 장은수 시인의 시를 탄탄하게 받쳐주는 듯하다.
거죽 위로 돋은 뼈가 뿔이 되어 솟아날 즈음
온몸의 허기를 털고 바라는 물 한 모금
온 들판 비가 내린다, 초록 펄펄 살아난다
-「흰 소」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