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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언어] 카보드, 영광
산에 올라 새하얗게 빛나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본 베드로는 초막을 지어 그곳에 계속 머물고 싶어 합니다.(마르 9,2-10 참조) 찬란한 ‘영광’에 머물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성경에서 영광을 의미하는 단어 ‘카보드’의 기본 의미는 ‘무겁다.’입니다. 어떤 것의 중요성,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존경심, 그것에로 돌려지는 영광은 그것의 무게에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무게를 짊어지지 않은 채 영광을 얻고자 하는 것은 위선이며, 그 영광은 헛것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 무게를 감당하며 당신을 따르는 이는 부활이라는 영광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 무게를 짊어지지 않은 이는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의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한 채 부끄럽게 될 것입니다.(마르 8,38 참조) 영광스러운 부활을 기다리며 자신의 무게를 잘 짊어지고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가톨릭 신학] 인간의 지능, 기계의 지능
최근 2023년, 벨기에의 30대 남성이 인공지능(AI) 챗봇에 고민을 털어놓으며 의존하다 자살을 권유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같은 해 미국의 모바일 메신저 회사는 채팅할 때 사용자의 선호도를 학습하는 가상 친구 AI를 출시했고 구글 트렌드 데이터는 ‘AI 이성 친구’ 검색어가 2,400% 증가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사고 없이 단어를 생성할 수 있는 기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 기계 뒤에 마음이 있다고 상상하는 것을 멈추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습니다.”(AI 전문가, 에밀리 벤더)
현재 생성형 AI는 일반적으로 기존 데이터를 학습해 텍스트, 연설, 이미지 등의 고급 산출물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앞선 사례들은 사용자가 그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이러한 식별 능력이 없을 경우,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자유의지를 기계에 위임하거나 잘못된 정보에 오염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계의 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대신할 수 있을까요? AI는 인간 지능의 ‘특정 기능’을 모방할 수 있는 탁월한 기술이지만 정량적 데이터와 전산 논리를 바탕으로 작동합니다. 설사 하나의 인간으로 보아도 무방한 지적 수준의 인공지능(강인공지능)이 개발된다고 해도 영혼을 가진 인간, 영혼의 작용인 감정을 지닌 인간과는 다른, ‘피조물의 피조물’이므로 의식과 도덕적 판단 능력에서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인공지능은 머신 러닝과 같은 과정으로 학습할 수 있지만, 이는 감각적 경험, 정서적 반응, 사회적 교류, 각 순간의 고유한 맥락 등 구체화된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인간 지능의 발달적 성장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에 교회는 AI에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이 기술로 세상을 해석하는 접근 방식은 인간관계에 대한 감각, 넓은 지평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기계의 지능을 인간의 지능과 같거나 보다 낫다고 여겨서는 안 되며, 인간 지능의 ‘결과물’로 간주해야 합니다. 인간 지능의 노동력의 결실인 과학적 탐구는 하느님과 함께 가시적 창조물을 완성하는 협력의 일부여야 합니다. 모든 과학 기술적 성과는 하느님이 내려주신 인간 창의성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항상 하느님의 질서 안에서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사용해야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교회는 생명의 신성함,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응용 프로그램에 반대하며, 기술 개발이 책임 있게 전개되어야 하고 더 큰 정의, 형제애, 사회 질서의 추구에 기여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참다운 지혜는 무엇인지, 현재의 인류가 참된 진리를 얼마나 따르고 있는지 자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란 단순한 지식의 양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완벽함의 척도는 그가 습득한 정보나 지식의 양이 아닌 그가 행하는 사랑의 깊이입니다.”(〈옛것과 새것〉 116항)
[가톨릭 교리]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예수님 = 하느님의 어린양”
예수님을 부르는 여러 명칭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호칭 중 하나가 바로 “하느님의 어린양”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이렇게 불렀나요? 세례자 요한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이렇게 불렀습니다(요한 1,29 참조).
‘하느님의 어린양’이란 어떤 뜻일까요? 구약성경에서 ‘어린양’이 중요하게 등장하는 부분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구약의 히브리 백성이 이집트 탈출 전날 밤,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집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놨고, 그 집은 하느님의 재앙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어린양의 피는 하느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 제물을 의미합니다.
어린양이 중요하게 등장하는
두 번째 장면은 바빌론 유배 이후입니다.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바빌론 유배는 매우 치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배라는 사건을 겪은 이후 적잖은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멀어지기도 했지만, 예언자들의 외침에 따라 다시 하느님 백성으로 제대로 살기 위한 노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 역시 유배 이후입니다.
유배 이후 이스라엘은 하느님 백성답게 살기 위해 크게 3가지 노력을 합니다.
첫째, 성전을 재건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성전이란 계약의 궤를 보존한 곳이고,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상징하는 직접적인 표상이었기에 성전 재건은 중요합니다.
둘째, 성경을 정리하고 편집합니다. 유배 이전 구전으로 전해지고, 파편적으로 보유했던 구약성경이 본격적으로 집필되고, 정리됩니다.
셋째, 성전 속죄 예식이 정립됩니다. 구약의 믿음에 따르면 죄란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을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백성 전체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속죄 예식이 형식을 갖추고 거행됩니다. 1년에 한 번 모든 백성은 성전 앞에 모여 죄 사함을 위한 예배를 바쳤고, 대사제는 백성을 위한 기도와 예물을 바쳤는데, 이때 속죄 제물로 송아지와 어린양을 바쳤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통해 하느님 백성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어린양이 중요하게 등장하는
세 번째 대목은 이사야서 중 ‘주님의 종의 노래’입니다. 주님의 첫째 종부터 넷째 종의 노래는 사순시기 성주간 중 독서 말씀으로 봉독됩니다. 특히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주님의 넷째 종의 노래는 성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비유적으로 묘사합니다. 거기서 주님의 종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53,7).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는 어린양, 즉 ‘대속적’ 죽음을 맞이하는 주님의 종을 어린양의 모습으로 비유해 묘사합니다. ‘대속’(代贖)이란 대가를 치르는 것, 즉 남의 죄나 고통을 대신하여(代) 자기가 당하는(贖) 것입니다. 속죄, 속량, 구속 등의 표현도 비슷한 의미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 대속적 죽음을 선택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왜 예수님은 남을 위한 희생, 즉 대속적 죽음을 선택하셨을까요? 당연히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성심에서 우러나오는 물과 피가 하느님의 사랑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인간을 사랑하셔서 하느님 말씀이 몸소 인간이 되셨고,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기꺼이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예수님은,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실까요? 1코린 13장은 사도 바오로가 전하시는 그 유명한 ‘사랑의 찬가’입니다. 이 찬가는 예전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라고 시작되고, 새 번역 성경에서는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13,4)로 시작하는데, 그중 13,8은 이런 말씀을 전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성경 구절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바로 그렇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결코 중단되거나 스러지거나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지고 전달됩니다.
참된 사랑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십니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믿는다면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야 새 계약이 성립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사랑의 가장 핵심적인 의미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 즉 자기를 희생해 다른 이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귀한 것, 즉 나의 기도, 재물, 능력, 봉사 등을 통해 하느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봉헌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을 실천해야 새 계약이 성립됩니다.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의 절정은 성체를 내 안에 모시는 시간입니다. 성체를 모시기 전 사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예수님은 참으로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죄가 없어지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하면서, 이 세상에 죄가 줄어들고, 없어지길 바라면서 이 세상을 위해 보속하고, 대속하겠다고 다짐하며 함께 기도해야겠습니다.
성모님은 어머니로서, 동정녀로서 누구보다 예수님 마음을 잘 알고, 잘 따르고자 노력하셨던 분입니다. 성모님의 군대는 성모님처럼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저 여인은 누구실까?”]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까떼나를 바치며 “저 여인은 누구실까?” 하고 물으면, 대부분 마음속으로 “성모님이십니다.” 하고 답합니다. ‘성모님’은 동정 마리아를 가리키는 가장 친숙한 호칭입니다. 사실 너무 익숙하다 보니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성모님’을 부르려면 이 호칭을 좀 더 깊이 알아보아야 합니다.
조금 놀라실지 모르지만, ‘성모님’ 호칭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교회의 전통이 전해 준 호칭입니다. 성모송을 바치며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을 부르고, 새해 첫날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며 ‘성모님’을 기억하는 것은 교회의 살아있는 전통입니다. 우리는 그 전통에 따라 ‘성모님’을 부릅니다. 여기서도 특이한 점을 발견합니다. ‘성모님’이라는 한국어 표현은, 교회 전통을 비추어 볼 때, 변형된 용어라는 겁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는 라틴어 “Sancta Maria, Mater Dei”(상타 마리아, 마테르 데이, 성 마리아, 하느님의 어머니)를 옮긴 말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마리아께서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계신 신비를 말해줍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 온전히 속한 거룩하신 분, 마리아는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세상에 낳으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참사람이신 분이라는 신앙 진리를 고백하는 호칭입니다.
한국어 번역에서는“Sancta Maria, Mater Dei”를 ‘성 마리아, 하느님의 어머니’로 옮기는 대신, 거룩할 성(聖)을 ‘어머니’ 앞에 두어 ‘성모’(聖母)가 되었고, ‘하느님’을 ‘천주’라고 표기하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용어가 탄생했습니다. 한국 문화에서 어머니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게 예의에 맞지 않으니 ‘성 마리아’ 대신 ‘성모님’이라 부르고, 이름을 드러내야 할 때는 ‘성모 마리아’하고 조금이나마 더 격식을 차리는 겁니다. 여기서 뉘앙스가 약간 달라집니다. ‘천주의 성모’,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하고 격식을 차리면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계신 마리아를 먼저 생각합니다만, ‘성모님’하고 친근하게 부르면 우리들 신앙의 어머니로서 마리아를 더 많이 생각합니다. 한국과 한자 문화권에서 생겨난 특별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성경의 ‘주님의 어머니’ 호칭에 근거
‘성모님’ 호칭은 ‘성 마리아, 하느님의 어머니’에서 나왔습니다. ‘성모님’하고 부를 때 그분이 누구신지 알려면, ‘하느님의 어머니’께서 누구신지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호칭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성모님’이 누구신지 알려줍니다. 우리들과 맺는 관계 안에서만 ‘성모님’을 찾으면 그분을 하느님에게서 떼어놓고 신격화할 수도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가장 싫어하실 일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는 성경에 등장하는 ‘주님의 어머니’ 호칭에 근거합니다.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루카 1,43) 하고 경탄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주님의 영의 인도를 받아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듯, 엘리사벳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주님의 어머니’는 하느님께서 원하신 호칭이었던 겁니다.
루카 복음이 집필될 당시 로마 제국에서 ‘주님’(호 퀴리오스)이라고 공식적으로 부를 수 있는 대상은 황제뿐이었습니다. 황제의 신격화가 시작되어, 황제의 동상이나 석상 앞에 제물을 바치고 향을 피우며 황제를 “주님”으로 숭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주님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며 황제 숭배를 거부했고, 바로 이 때문에 초대 교회는 혹독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습니다. ‘주님’이라는 말 자체가 신앙 고백이었고,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사랑을 드리는 신앙 행위였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마리아의 태중에 현존하시는 주님께 흠숭을 드렸고, 믿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인 어머니 마리아를 진심으로 공경했습니다. ‘주님의 어머니’ 호칭은 초대 교회 때부터 이미 성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신심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루카 복음은 구약성경의 한 장면을 상기시키며 주님께서 마리아 안에 현존하시는 신비를 선포합니다. 다윗 임금은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 도성으로 모시려고 했습니다(2사무 6,1-23). 계약의 궤는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상징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십계명을 돌판에 새겨 모세에게 건네주셨고, 모세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궤를 만들어 십계명 판을 보관했습니다. 다윗 임금은 계약의 궤를 모시며, “이래서야 어떻게 주님의 궤를 내가 있는 곳으로 옮겨 갈 수 있겠는가?”(2사무 6,9) 하고 주님의 현존을 두려워했습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듣고,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하고 외쳤을 때, 이 말은 다윗 임금이 계약의 궤를 바라보며 고백한 말과 같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장면을 통해 마리아를 참된 계약의 궤라고 일러주는 겁니다. 마리아는 믿음과 사랑으로 주님을 온전히 받아들여 주님께서 그 안에 온전히 현존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느님의 현존을 세상에 드러내고 전하는 살아있는 계약의 궤입니다.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드님의 길을 충실히 따라
마태오 복음에는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가 등장합니다. 동방 박사들은“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탄생하신 메시아를 찾아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습니]다”(마태 2,11). 아기 예수님을 메시아 임금으로 알아보고 경배했으니, “어머니 마리아”를 ‘임금의 어머니’(게비라 gebirah), ‘모후’로 공경한 것도 분명합니다. 고대 이스라엘과 중동에서 임금의 어머니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임금의 어머니는 새 임금에게 면류관을 씌워주고(아가 3,11), 임금의 사후 유산을 관리했습니다. 솔로몬은 어머니에게 자리를 만들어 자기 오른편에 앉게 했습니다(1열왕 2,19).
모후는 임금의 다스림에 참여했고, 마찬가지로 임금의 고난도 함께 겪었습니다. 마리아는 ‘임금의 어머니’로서 메시아 임금의 운명에 동참했습니다. 헤로데가 박해를 일으키자, 천사는 요셉에게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마태 2,13) 하고 말했습니다. “아기와 그 어머니”는 험난한 피난길을 떠나 피난살이를 함께 했습니다. 헤로데가 죽어 박해가 끝나자, “아기와 그 어머니”는 이스라엘 땅으로 함께 돌아왔습니다. 마리아는 일생 동안 당신 아드님의 운명에 오롯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주님께 경배를 드리고 아드님의 길을 충실히 따르며 그분의 고난에 동참한 메시아 왕국의 모후이십니다.
[저는 믿나이다] (20) 사도 시대 황제들의 박해
순교로 복음 증거하고 선교한 사도 시대 그리스도인
‘선교’와 ‘순교’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긴밀하게 결합해 있습니다. 초대 교회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라는 주님 사명에 따라 땅끝에 이르기까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사도 1,18 참조)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모든 이에게 주신 이 사명은 처음부터 반대자와 박해자 앞에서도 목숨을 걸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해야 함을 뜻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들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애초부터 신앙을 위해 순교를 각오했고, 또 복음을 증거하다 기꺼이 제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이처럼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는 선교 열정을 고취시켰고, 신앙심을 북돋웠습니다. 이에 사도 시대 때부터 교회는 순교를 신앙의 진리에 대한 최상의 증거로 여겼습니다. “순교란 죽음에까지 이르는 증거를 가리킨다. 순교자는 자신과 사랑으로 결합된 그리스도,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한다. 순교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와 그리스도교 교리의 진리를 증언한다. 순교자는 용기 있는 행동으로 죽음을 참아 받는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473)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도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의연한 순교 장면이 모든 이에게 그리스도교에 대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순교 자체가 선교가 된 것이죠. 모든 선교사가 순교자가 될 순 없지만, 모든 순교자는 복음을 증거한 선교사입니다.
이번 호에는 초대 교회 시기 로마 황제들의 그리스도교 박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네로 황제(54~68년)입니다. 64년 7월 18일 밤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했습니다. 9일간 로마를 삼킨 이 화재로 20만 명이 넘는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화재 첫날부터 “네로가 자신의 도시를 짓기 위해 로마에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황제의 궁이 있던 팔라티노 언덕과 첼리오 언덕 사이 대전차경기장에서 발화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네로가 불타는 도시를 보며 트로이 멸망을 노래했다”는 말이 로마인들 입에 오르내렸죠.
네로는 자신을 향해오는 군중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방화범”이라고 내몰았습니다. 그리고 방화에 대한 합당한 죄를 묻는다며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해 동물 가죽으로 덮어씌우고 개나 야수들로 하여금 물어뜯게 하거나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밤에는 화형에 처해 거리를 밝혔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도 이때 순교했습니다.
네로 황제가 어떻게 그리 쉽게 그리스도인들을 대화재 책임의 희생 제물로 몰아갈 수 있었을까요? 지난 호에 설명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지 않았고, 로마인들의 가정에서 성행하던 갖가지 미신과 우상 숭배를 거부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외에 다른 우상을 섬기지 않기 위해 로마인들의 생활과 문화를 멀리하고, 자신들만의 신앙 공동체 안에서 따로 생활하였지요. 사람들 눈을 피해 기도 모임을 갖고 성찬례를 하는 것을 오해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근친상간하고, 살인 의식을 행해 인육을 먹는다는 나쁜 소문이 로마 사회에 퍼졌습니다. 이러한 소문으로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혐오했고, 네로는 로마 대화재의 주범인 국가의 적으로 손쉽게 다룰 수 있었습니다.
네로의 박해는 그가 죽은 후 곧바로 그쳤습니다. 다른 도시나 지방으로 박해가 번지지 않았고, 도미티아누스(81~96년)가 황제가 되기 전까지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없었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요한 묵시록에 묘사될 만큼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적’으로 여겨진 인물입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모든 이에게 ‘황제 숭배’를 강요했습니다.
에우세비우스는 「교회사」에서 도미티아누스가 메시아의 출현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의심 많은 황제가 다윗의 후손 가운데 예수님의 친척인 두 명을 법정에 소환했다. 도미티아누스는 예전 헤로데 왕처럼 메시아의 출현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도미티아누스는 두 사람을 심문했다. 그러나 그들이 손에 못이 박힐 정도로 심한 노동을 했고,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자 그는 그들을 조롱하며 집으로 되돌려 보냈다.”(3,20,1-6)
그가 메시아의 출현을 두려워한 것은 그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와 형 티투스 황제가 제1차 유다-로마 전쟁 때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파괴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유다인의 사정을 잘 알았죠. 그래서 유다인에 대한 세금도 과징했습니다.
그는 15년 재임 동안 요한 사도를 파트모스 섬에, 프라비아 도미틸라를 폰티아 섬에 유배시켰을 뿐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인을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특히 그는 생식기를 태우고, 손을 자르는 잔혹한 고문을 그리스도인에게 했습니다. 그는 신분과 나이를 구분하지 않은 잔인한 박해로 로마인들의 반발을 샀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사후 ‘기록말살형’을 받았습니다. 그가 생전에 선포한 모든 칙령이 폐기됐고, 그의 이름은 모든 공식 문서와 비문에서 삭제됐습니다.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황제가 될 권리를 박탈당했습니다.
“나를 짐승들의 먹이가 되게 놔두십시오. 나는 짐승들을 통해서 하느님께 이르게 될 것입니다.”(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