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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에는 크고 작은 문제들과 갈등들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니고 또 천사들만 모여 사는 곳이 아니라 죄많은 인생들이 모여 사는 삶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집단과 집단 사이에 갈등이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어떤 대상과 아니면 가장 가까운 자기 주변의 어떤 사람이나 조직 속에서 갈등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아주 가까운 사랑하는 아내와 보이지 않는 갈등속에 빠져 있는 사람도 있고 부모와 형제, 자식들 사이에서도 갈등에 빠져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직장에서 상사나 부하와의 갈등에 빠져 있는 사람도 있고 또 내가 속한 집단이나 조직과 또 다른 집단과 조직간에 갈등속에 있는 그런 경우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 정치권의 갈등 양상을 보면 그 정도를 넘어서서 한 여름의 무더위보다도 더 우리 국민들을 짜증스럽게 하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원래 정치 집단이라는 것은 정권 획득을 목표로 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국가나 자파의 이익을 위해서 협력하고 경쟁하고 갈등하면서 발전하고 자신들의 뜻을 펼치는 그런 집단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갈등속에서도 지켜야 될 기본적인 원칙들이 있는데, 오늘 우리 정치권을 보면 사실 그런 최소한의 원칙들도 지켜지지 않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렇게 갈등속에 있다가는 나라를 거들 내고 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염려를 가지게 합니다.
그리고 더 넓게 보면 더 큰 집단이나 조직, 사회에도 문제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 갈등도 있고 민족과 민족 사이에 갈등도 있습니다. 그 갈등이 집단과 집단의 갈등인 동시에 또 개인과 개인간의 갈등이며, 또한 개인 내적인 갈등등 갈등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이사야 11장에 나타나는 아주 이상적인 한 상황을 이사야 선지자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이스라엘 민족은 수천년 역사 속에서 가장 심각한 갈등을 경험했고 또 갈등을 아직도 겪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나눌 때 "살롬"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 살롬이라는 말은 '평화'라는 말입니다. 살롬이라는 이 말을 하면서 그들은 끝없이 평화를 희구하고 소원하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역사 속에서는 한번도 진정한 평화가 정착되었던 일들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의 갈등이 세계적인 갈등으로 비화될 조짐도 항상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살았던 우리 한민족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수난과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또 내적인 갈등도 지금 심각하게 겪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인사할 때 요즘 젊은 세대들은 "좋은 아침" 이렇게 서양식으로 인사하는 사람도 있지만 과거에 우리들이 인사할 때는 "밤새 평안하셨습니까?" "밤새 안녕하셨습니까?"이렇게 인사했습니다. 밤새 안녕 못할 일들이 수없이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 한국 사람들이 인사하는 표현법은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그들이 살롬이라 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랬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그 때에 이루어질 모습들
성경 본문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정말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상적인 한 사회의 모습, 이상적인 공동체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때에 주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주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실 때 함께 거하며 함께 누우며 함께 있어 함께 먹으며 함께 엎드리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을 합니다. 독사에게 물려 죽으려고 도저히 상상을 할 수 없는 그런 위험한 행동을 하는데도 독사가 어린아이의 손을 물지 않고 해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여러분 이리가 어린아이와 함께 있을 수 있습니까?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울 수 있습니까?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을 수 있습니까?
서로 해하고 해를 당하는 위협적인 존재 갈등 관계에 있는 무리들이 아무 문제없이 함께 거하고 있는 모습을 여기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함께 거하며 함께 누우며 함께 있어 함께 먹으며 함께 엎드린다는 것입니다.
사자는 육식동물입니다. 그 육식동물인 사자가 소처럼 풀을 뜯는다는 이 말은 사자가 식성이 바뀌고 사자의 포악한 성품이 바뀌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오시는 그날,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 이러한 이상적인 사회가 될 것이라고 노래했습니다.
9절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서로 해하지 않고 서로 상하게 하지 않고 서로 상처 주지 않고 상처받지 않는 이상적인 모습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래 전에 우리 한국교회에서 열심히 불렀던 복음성가 가운데 본문 이사야 11장을 내용으로 하는 히브리적인 멜로디의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꽃동산 되리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도 같이 뒹구는
참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이 노래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아시는 분들은 같이 불러 보도록 합시다.
1절
사막에 샘이 넘쳐 흐리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꽃동산 되리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도 같이 뒹구는
참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2절
사막에 숲이 우거지리-라
사막에 예쁜 새들 노래 하리라
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낙원 되리라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않는 참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이 노래는 이스라엘 민족의 소원이 담긴 노래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믿는 사람들의 소원과 희망이 담긴 노래가 되어질 줄 믿습니다.
2.왜 서로에게 갈등이 일어나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부족함으로 인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갈등과 분열과 많은 문제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갈등이 없었으면 참 좋겠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갈등은 상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이 갈등에 대해서 사회학자들이나 심리학자들이 내리는 정의는 참 다양합니다. 그 중에서 아주 대표적인 갈등에 대한 정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R. H. 밀즈라는 유명한 사회학자는 "갈등이란 둘 이상의 개인이나 집단간의 불일치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또 J. 브라운 같은 학자는 "갈등이란 서로의 관심과 이해가 다른 당사자 사이에 일어나는 대립적인 작용이다."고 정의 했습니다.
F.도우슨 같은 사람은 "갈등이란 양립할 수 없는 목적, 불충분한 보상 및 간섭을 지각하는 당사자간의 싸움이다." 이렇게 정의를 합니다.
사람이 모인 곳에는 갈등이 있고 특별히 한국같이 좁은 땅덩어리에 작은 자원을 가진 나라에 이렇게 인구가 밀집되어 있으면 갈등이 더욱 심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 호주라든지 뉴질랜드라든지 스위스,오스트리아,덴마크,노르웨이같이 인구가 작고 자원이 풍부한 나라에는 우리나라에 비하면 갈등이 훨씬 줄어듭니다. 크고 넓은 방에 한사람이나 두 사람을 집어넣으면 별로 갈등이 없지만 그 속에 열 명이나 스무 명, 제대로 누울 수 없을 만큼 사람을 집어넣으면 그 속에 구조적인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사실 여러 가지 다른 요인도 있지만 그런 환경 적인 요인도 많은 것을 우리가 인정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갈등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왜 갈등이 생기느냐?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기심이나 탐심이 갈등을 조장하기도 합니다만 학자들이 보는 갈등의 원인을
1) 퍼스낼리티의 불일치로 봅니다.
성격이나 신념, 사상, 목표 등이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방향을 향해서 나아가게 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같이 공동체를 이룰 때 거기에는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그 믿음이 좋은 초대교회의 사도바울과 안디옥교회 담임 목사인 바나바 사이에 갈등이 생겼어요. 왜 갈등이 생겼습니까? 믿음이 좋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기를 원했던 영적으로 성숙했던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마가라는 한 사람을 두고 일어난 것입니다. 마가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주의 일을 하느냐? 에 따라서 서로 다른 의견과 다른 방향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1차 선교 여행 때 골탕을 먹이고 애를 먹였던 마가 같은 사람을 선교 여행 때 데려가면 주의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저 사람은 데려가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가지고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저런 사람조차도 우리가 함께 데려가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옥신각신 하다가 결국 서로 제갈 길로 가 버립니다. 그러나 그 갈등이 결국은 그 공동체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하나님 나라가 더 크게 확장되어졌던 것도 봅니다.
여러분 세계 기독교 역사를 보면 교회 내적인 갈등이 때때로 선교의 역사, 전도의 역사를 이루었던 것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오늘 이 바나바와 바울의 예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갈등의 요인은
2) 개인이나 집단의 이해관계와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난 몇 해 동안에 우리 사회를 떠들썩했던 소용돌이들 속에는 사실 약사와 의사들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했습니까? 기업주와 노동자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했습니까? 서로서로 이해관계가 달랐고 다른 목표 때문에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2)역할의 차이 때문이라고 봅니다.
남편과 아내의 역할의 차이, 사회적으로 경영자와 노동자의 역할 차이,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역할 차이, 부하와 상사의 역할 차이, 장교와 사병의 역할 차이 등 서로의 역할 차이를 제대로 잘 활용하면 협력 관계가 형성되지만 서로 역할이 다른 것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면 그것이 갈등 관계로 형성이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한 여성이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가는데 그 여성에게는 몇가지의 역할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딸의 역할이 있고 그 다음에는 어느 집에 시집을 가면은 며느리와 아내의 역할이 있고 이제 나이가 많아서 늙어지면은 시어머니 역할을 해야 됩니다. 그 역할을 따라서 같은 한 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나 생각이 각각 다 다릅니다. 역할이 우리 인간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 각기 다른 역할을 맡은 사람들끼리 만나서 서로 다른 역할을 감당하면서 협력 관계를 이루어야 되는데 다른 역할을 하면서 서로 갈등 관계로 분위기를 몰아가는 그런 경우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야당 보십시오.
자기들이 여당때 했던 말과 지금 야당때 하는 말이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또 지금 여당 보십시오. 자기들이 야당때 노동자들 앞에서 약간 선동적인 발언도 하다가 지금 여당 되니까 노동자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세요. 노동자들은 지금 여당이 자기 탄압한다 이렇게 느낄 만큼 자기 역할들에 따라서 기본적인 사고나 말과 행동이 다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갈등 관계에 빠져서는 안되고 우리에게 비록 이런 역할이 주어졌지만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역할 자들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3) 감정 조절의 미숙으로 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정은 모든 것이 우선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지위나 학벌이나 가문이나 명예나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보다도 우선하는 것이 감정이기 때문에 이 감정을 잘 다스리고 Control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에 보면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더 위대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기 힘들고 감정을 조절하기 힘들다는 겁니다. 부부 싸움도 아주 조그마한 일을 가지고 일어납니다. 남편이 한마디 하면 못들은 척하고 그냥 넘어가면 문제가 없는데, 아내는 그것보다 더 강한 감정을 담아서 반격을 하고 그 반격을 받은 남편이 또 다시 더 강하게 하다가 보면 부부 싸움으로 발전을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또 아내가 좀 잔소리를 해도 남편이 넓은 마음으로 스펀지처럼 받아 들이면 괜찮은데 거기에 또 속 좁은 남편이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그것이 점점 에스컬레이터 되어서 문제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까? 아이들을 꾸중 할 때도 부모들은 교육적인 꾸중을 해야 되는데 교육적으로 꾸중하지 못하고 감정을 담아서 남편하고 속상한 일 있으면 그날 아이들에게 감정을 담아서 쏟아 붓는 그런 아내들도 많이 있잖아요.
이번에 지난3일 동안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이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정말 여러분 가정에 믿음의 아들 딸들이 분명히 변화되어서 돌아왔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엄마,아빠들은 옛날에 우리 아들 딸을 바라보던 그 선입견과 시각에서 우리 아들 딸을 바라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번에 우리 아들딸들이 분명히 변화되었어요. 수련회 장소가 논산 훈련소 옆이었고 그 교회 옆에는 공동묘지가 있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전부다 공동묘지에 가서는 무덤 옆에 누워 자신을 돌아보며 명상에 잠기다 왔습니다. 그 청소년 시절에 무덤 옆에 가서 무언가 생각하고 자기 인생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돌아왔단 말입니다. 아직까지 무덤에 가서 누워 보지 못한 부모들은 여러분 아이들을 좀더 넓게 바라보고 이번 여름방학이 여러분 믿음의 자녀들이 변화되는 그런 기회가 될 수 있도록 부모들이 옆에서 잘 도우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지금 마음으로 결심하고 각오하고 돌아왔는데 부모들이 옆에서 또 옛날 하던 식으로 잔소리해 버리면 아이들이 감정이 폭발해 가지고 옛날 원위치 해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족들간에, 공동체를 구성한 구성원간에 감정조절의 미숙함에서 벗어나서 성숙한 사람들이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4) 서로 간의 신뢰성 상실로 봅니다.
어떤 젊은 부부가 연세 많으신 어른을 떼 놓고 자기들 아이들만 데리고 여름 휴가를 갔어요. 여름 휴가를 가면서 부부간에 짰습니다. "여보 우리 3박 4일만 보내고 돌아온다고 어머니에게 말씀하고 4박 5일을 지내고 옵시다" 이렇게 계획을 세우고 갔어요. 대관령을 넘어서 강원도 동해 바다를 갔습니다. 돌아오는 날 며느리가 집으로 전화했어요. 며느리가 시침떼고 "어머니 지금 우리 차가 고장이 나서 오늘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차를 고쳐서 가려고 하면 아무래도 내일 집에 돌아갈 수밖에 없겠습니다." 시어머니 되시는 분은 그저 "아이고 얘들이 고생하겠다."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휴가를 하루 더 멋있게 보내고 돌아왔어요. 그런데 아이들하고 남편하고 그 휴가를 갔던 사람이 입을 정확하게 안 맞췄습니다. 어느 날 이야기를 하다가 남편은 앞 타이어 오른쪽이고 아내는 뒤 타이어 왼쪽이 펑크가 났다고 하였으므로 그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두고두고 불신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진실되지 못함과 거짓말은 두고두고 우리 인간관계를 허물게 됩니다. 한번 신뢰가 무너지면은 상대방이 아무리 진실 된 말을 해도 그 다음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 정치권을 보면 우리 야당과 여당이 하는 짓거리가 아마 이와 유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3.어떻게 갈등을 극복할 것인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항상 갈등이 있어 왔었습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갈등이 있고 앞으로도 갈등이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갈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갈등 속에 있는 사람들이, 갈등의 주인공들이 그 갈등을 어떻게 이해하고 풀어 나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갈등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는 갈등의 순기능이요
다른 하나는 갈등의 역기능입니다.
갈등의 순기능이라는 것은 갈등이 건설적으로 작용하는 것이고
갈등의 역기능이라는 것은 갈등이 파괴적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갈등의 순기능이 그 갈등 때문에 조직이나 집단이 또 가정이 더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이라면,
갈등의 파괴적인 역기능은 그 갈등 때문에 함께 망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갈등의 순기능 건설적 작용은 그 집단이나 어떤 조직이 또 그 가정에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고 또 문제 인식으로 말미암아 집단 사고가 이루어지고 통합적인 사고가 이루어지고 또 창의성이 요구됨으로 말미암아 어떤 문제에 실마리를 발견하고 또 조직 구성원들이 분명히 자기 의사를 밝히면서 문제 해결을 시도함으로 말미암아 조직이나 집단에 체질이 개선되어지고 또 그것으로 말미암아 집단 응집력이 생기고 결국은 건설적으로 작용해서 발전하고 갱신하게 되어집니다.
그러나 갈등의 파괴적인 기능은 어떤 집단이나 개인 사이에 갈등이 있으면 먼저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그 갈등 대상자를 향해서 정죄하고 비판하고 비난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갈등 속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어떤 의사를 결정하는 기간이 장기화되어지고 또 의사 결정이 장기화되어 지므로 말미암아 침체에 빠지게 되고 서로 협동하고 협력해야 될 일이 분열로 치닫게 되고 결국은 조직이나 집단이나 가정이 파괴되어 지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저는 갈등이 있느냐? 없느냐? 보다 갈등은 항상 인간이 사는 사회에는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전제하에서 어떻게 잘 관리하고 지혜롭게 갈등을 처리해 나가느냐 하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 될 줄 믿습니다.
1) 갈등을 처리하는 기술이 필요한데, 각자가 가지고 있는 편견이나 선입견,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베드로가 지독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요나가 지독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 이방인들은 전부다 저주받아 죽어야 돼." 이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자기 환상을 통해서 깨어지고 변화되고 그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을 버리고 고넬료와 만남을 통해서 이방인 선교에 문을 열어 가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편견이나 고정관념, 선입견이 강한 사람은 지독한 우월감에 빠져 있든지 지독한 열등감속에 빠져 있는 경향이 많습니다. 지독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지독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떤 집단 속에 있으면 그 사람과 다른 사람 관계가 제대로 형성될 수 없어요. 늘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고정관념이나 편견이나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노력해야 됩니다.
2) 분명한 목표를 설정할 때 우리는 갈등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경쟁자를 집단 내에 두기 때문에 갈등이 더 첨예화(尖銳化)됩니다. 그러나 경쟁자를 집단밖에 두고 목표를 설정하면 우리는 갈등을 빨리 해소해 나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전도하지 않고 그냥 친목 단체 비슷한 교회로 자리잡기 시작하면 그 교회는 끝없이 싸움과 갈등이 지속됩니다.'김집사가 잘났니. 박집사가 잘났니. 이집사가 잘났니. 누구는 목사파 누구는 장로파 누구는 전도사파 누구는 집사파 누구는 권사파' 이래서 한국 교회가 얼마나 시끄럽습니까? 그러나 열심히 전도하고 열심히 선교하는 교회는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에 서로서로 싸울 일이 없고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가정도 마찬가지고 어떤 조직이나 단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도 목표가 분명하면 그 목표에 모든 힘을 다 결집해서 총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런데 목표가 불명확하고 지도자가 목표를 정확하게 제시하지 않으면 그 사이에 갈등 세력들이 더 활발하게 활동함으로 말미암아 힘이 분산되는 역작용 파괴적인 작용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3) 강력한 개인이나 집단간에 협상력, 교섭력을 구축해야 합니다.
교통순경은 경찰들 가운데 가장 말단 지위에 있지만 교통순경의 위력은 대단하지 않습니까? 사거리에 교통순경이 딱 서 있으면 가던 차도 멈추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습니까? 교통순경은 자기에게 주어져 있는 국가 권력을 최전방에서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든 집단이든 교통순경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라면 당회가 교통순경 역할을해야합니다. 교통순경이 고급 차가 오면 빨리 보내 주고 큰 트럭이나 청소차가 오면 무조건 세워 놓지 않고 순서에 따라 정확하게 질서를 유지하게 하지 않습니까? 사회에 공정성이 파괴되어지면 갈등이 생겨납니다. 우선 순위를 정확하게 정해서 흐름을 원활하게 해줄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갈등의 소지를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부모가 공정하지 못하면 자녀들 사이에 늘 갈등이 있게 됩니다. 형제간에 우애가 없는 집안은 왜 우애가 없는지 아십니까? 부모가 공정하지 못하면서 아이를 늘 비교합니다. 동생 앉혀놓고 형님은 어떻고 너는 이 모양 이 꼴이냐? 또 형님 앉아 놓고 동생은 잘났는데 너는 왜 이 모양 이 꼴이냐? 하면서 비교를 합니다. 두 사람 다 있을 때 공정하지 못하고 정당하지 못한 태도를 취할 때 갈등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자녀들간에 우애가 없는 집안에는 첫째 부모의 책임이 있습니다. 나라에 갈등이 많으면 정치 지도자에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에 문제가 많으면 목사가 1차적 책임이 있고 당회원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4) 서로 간에 존중하는 태도를 회복해야 만이 갈등이 해결되어 집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우리는 잘 알지 않습니까?
한 사람은 나라의 왕자였고 한 사람은 목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자인 요나단이 다윗을 향해서
"네가 왕이 될 것을 나도 알고 우리 아버지도 안다"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2인자의 자리에 세우고 상대방을 높이는 나보다 남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이기심을 다 벗어버리고 인간의 탐욕을 버리고 나보다 남을 더 귀하게 여기는 자세가 될 때 갈등이 해소가 됩니다.
부부간에 왜 갈등이 생깁니까?
못난 남편이 꼴에 남자라고 아내보다 더 잘났다고 큰소리 치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깁니다.
또 못난 아내가 남편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여자의 목소리가 집에서 커질 때 그 가정이 갈등이 생기지 않습니까?
서로 남편은 아내를 소중하게 여기고 아내는 남편을 소중하게 여기는 관계가 되어질 때 가정에 갈등이 없어지는 것처럼, 한 조직이나 사회나 국가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졌던 갈등은 바로 누가 더 크냐? 누가 더 높으냐? 에 있지 않았습니까?
5) 상호간에 대화의 기술을 개발해서 쌍방간의 대화를 잘 유지할 때 갈등이 해소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청소년들이 컴퓨터 채팅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부모와 자식 사이에 대화가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컴퓨터 채팅에 빠져듭니다.
요즘 주부들이 컴퓨터 채팅에 빠져들어 정신을 잃고 있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남편들에게 책임이 있어요. 남편들이 아내를 존중하고 아내와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지 않기 때문에 대화의 상대를 컴퓨터 속에 가상 세계 속에서 찾는다는 말입니다. 서로간의 대화를 일방적인 대화가 아니라 쌍방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로 회복을 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이런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내 쪽에서 먼저 변화를 시도하고 내쪽에서 나 자신을 쳐서 이기며 내가 포기해야 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 자신들이 바로 알고 내가 먼저 상대방보다 이 갈등을 해소하는 원칙을 지켜 나가는 태도가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이사야 11장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가정에, 내가 속한 조직이나 단체에 그리고 우리 나라가 정말 갈등을 해소하고 아름다운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룰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 중 고등부 학생들이 집에서 형제가 하나 아니면 둘 셋 정도밖에 안 되는데 이번에 수십 명이 같이 모여서 조별로 공동체 훈련을 철저하게 했습니다.
이 공동체 훈련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향해서 배려하고 다른 사람을 수용하고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훈련을 했습니다. 이 공동체 훈련을 하고 온 여러분 자녀들을 여러분과 더불어 정말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 수 있는 우리 한밭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