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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면 살리라 : 박봉수 목사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자가 크게 입을 벌리고 양에게 물었습니다. "내 입에서 무슨 냄새가 나지 않나 맡아보게"
양이 코를 가까이 대고 맡아보니 고약한 냄새가 났습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고약한 냄새가 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사자는 버릇없는 놈이라고 그 양을 잡아먹었습니다. 양은 정직했지만 어리석었습니다.
이번에는 사자가 늑대에게 물었습니다. 눈치 빠른 늑대는 고개를 저으면서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사자는 자기 맘에 들려고 거짓말을 했다고 늑대도 잡아먹었습니다. 늑대는 눈치는 빨랐지만 역시 어리석었습니다.
이번에는 사자가 여우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여우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사자님 저는 감기 때문에 냄새를 맡을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자는 할 수 없이 여우를 살려 주었습니다. 여우는 지혜로웠습니다. 그래서 살았습니다.
이솝은 이 우화에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똑같은 인생의 문제를 만나도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어리석게 대처하면 죽게 되고, 지혜롭게 대처하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4절을 보면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지식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내 말대로만 하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자식에게 주는 교훈이 바로 지혜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결국 요약해 보면 지혜를 얻으면 살 것이요, 지혜를 얻지 못하면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혜는 무엇입니까?
사전을 찾아보니까 '사물의 도리나 선악을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이라고 풀어놓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지혜를 마음의 작용이라고 했다는 점입니다.
성경 히브리어 원문에서 지혜라는 말은 '레브 쉬메'입니다.
여기서 '레브'는 마음이라는 말이고, '쉬메'라는 말은 듣는다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 말을 'hearing heart'라고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 원어 성경에서도 지혜란 마음의 작용이라는 뜻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에서 지혜란 마음으로 듣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지혜는 지식과 다릅니다. 지식은 머리의 작용입니다. 머리로 생각하고, 머리로 이해하고, 머리로 인식해서 어떤 내용을 알게 되는 것 이것이 지식입니다.
그런데 지혜는 마음의 작용이기 때문에 이해하고 아는 것이 아니고 깨닫는 것입니다.
전혀 못 보던 것을 보게 되고, 못 듣던 것을 듣게 되어 '아! 그렇구나'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지혜로웠다는 솔로몬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두 여인이 솔로몬 왕에게 와서 판단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이야기인 즉 한 집에서 두 여인이 각각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한 아이가 죽었습니다.
죽은 아이의 엄마가 몰래 아이를 바꾸었습니다.
다른 여인이 아이의 젖을 물리려고 보니 자기 아이가 아닙니다.
결국 한 아이를 두고 두 여인이 서로 자기 아이라고 싸우게 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여인 말고는 어떤 아이가 누구 아이인지를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갑자기 칼을 가져 오라 명했습니다.
그리고 칼로 아이를 반으로 나눠서 두 여인에게 반씩을 주라고 명했습니다.
그 때 진짜 어미인 여인이 왕께 청했습니다. '아이를 죽이지 말고 저 여인에게 주십시오.'
그런데 다른 여인은 아이를 나누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의 판결은 간단했습니다.
아이를 죽이지 말고 저 여인에게 주라 했던 그 여인에게 아이를 주라는 것입니다.
그 여인이 진짜 아이의 어미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어떻게 이렇게 판단할 수 있었습니까?
왕상 26:3을 보면 아이의 어미가 아이를 칼로 나눈다 하니까 그 마음이 불이 붙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바로 솔로몬은 이 여인의 마음의 절규를 마음으로 들었던 것입니다.
그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읽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혜는 마음의 일입니다. 결코 머리의 일이 아닙니다.
지혜는 마음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가 좋다고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지식을 많이 얻을 수 있을 뿐입니다. 마음이 좋아야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건강해서 마음이 활기차게 작동할 때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가 좋은 것도 중요합니다만 마음이 건강한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마음이 건강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우선 마음이 맑은 것입니다. 마음이 욕심으로 흐려지면 마음이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고, 만물의 이치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맑으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마음이 활짝 열려야 합니다. 마음이 여러 가지 상처와 아픔으로 닫혀지면 역시 수많은 힌트와 깨달음이 몰려 와도 받을 수 없고 들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강해야 합니다. 마음이 염려와 걱정으로 약해지면 마음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강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혜는 마음으로 앞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땅을 치며 후회하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서 병원에 가보니 폐암이라는 진단입니다.
3개월 전에 종합 검사 때도 나타나지 않던 암 세포가 이미 온몸에 퍼져있었습니다.
청천 벽력과 같은 소리에 땅을 치며 통곡을 합니다. 그 때 의사가 충고하던 말이 생각이 납니다.
"선생님 담배를 끊으십시오. 이렇게 담배를 피우다가는 오래 살지 못합니다!"
"아 ! 그 때 의사 선생님의 말을 왜 내가 귀담아 듣지 않았던고, 이럴 줄 알았으면 힘들더라도 그 때 담배를 끊는 건데..."
후회는 바로 지혜가 부족했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어리석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듣던 개미와 배짱이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배짱이는 오늘의 즐거움에 취해 여름 내내 놀고 지냅니다. 그러나 개미는 추운 겨울이 올 것을 알고 여름 내내 땀흘리며 일합니다.
다가올 겨울을 준비한 것입니다.
성경 잠언은 이런 개미에게서 지혜를 배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지혜입니까? 마음으로 앞을 내다보는 지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오늘에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다가 올 미래를 볼 줄 압니다.
그래서 미래를 준비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막상 미래가 다가올 때 후회합니다.
그러나 때가 늦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미래가 다가올 때 기뻐합니다.
준비를 잘했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마음으로 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인생은 마치 정글 속에서 길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워낙 밀림이 깊고 잡초가 무성해서 도무지 길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헤치고 나가야 합니다. 바로 이때 길을 찾는 능력이 지혜입니다.
또한 인생은 마치 엉킨 실타래를 푸는 것과 같습니다.
어디가 시작점인지 찾기가 힘이 듭니다. 어떻게 꼬였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풀어가야 합니다. 바로 이때 엉킨 실타래를 푸는 능력이 지혜입니다.
한번은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소문을 듣고 금은 보화를 잔뜩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솔로몬을 시험하기 위해 문제를 냈습니다.
솔로몬의 눈에 겨우 보일 정도의 먼발치에 꽃 두 송이를 놓았습니다.
하나는 생화이고 다른 하나는 조화였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에게 어느 것이 생화이고 어느 것이 조화인지를 맞춰 보라고 제안했습니다.
솔로몬은 잠시 생각한 뒤에 신하들에게 벌통을 가져오라고 명했습니다.
그리고 벌통 문을 열게 했습니다. 금새 벌들은 생화를 향해 날아갔고, 그것으로 생화와 조화를 구별해 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풀어 가는 마음의 힘입니다.
우리 인생 길에 놓인 문제들을 풀어 가는 마음의 힘을 말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올바른 길을 찾아내는 마음의 힘을 말합니다.
지혜는 어떻게 구합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솔로몬이 자식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권면하는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이 짧은 본문에서 지혜와 명철을 얻으라는 말이 네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얻으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나라는 동사입니다. 이 동사는 장사꾼이 손님들에게 자기 물건을 자랑하면서 사라고 권할 때 쓰는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자식에게 이 지혜가 그 엇보다도 귀하니까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이 지혜를 가져야 한다고 강권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교육 현실을 돌아보면 온통 자식들에게 지식을 얻으라고만 하고 있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들어가라고만 하고 있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박사학위를 따라고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과외도 시키고 학원에도 보내고 사교육비가 천장부지로 올라가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 뒷바라지를 합니다.
심지어 어떤 엄마는 아이를 과외 시키기 위해 파출부까지 나가는 사람이 있을 정도입니다.
정말 눈물겹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물론 지식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많아 높은 지위에 올라도, 돈을 많이 벌어도, 명예를 많이 얻어도 지혜가 부족하면 인간답게 사는 길을 모릅니다.
어리석어서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앞에 닥친 인생의 문제를 제대로 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늘 불행합니다. 남들에게도 큰 불행을 안겨줍니다. 언제나 후회하며 살고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혜를 얻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나도 지혜로워야 하지만 자식들에게 지식보다도 지혜를 가르쳐야 합니다.
지혜를 얻게 해 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지혜는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솔로몬은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렇게 지혜로울 수 있었습니까? 그 답에 왕 3장에 나와있습니다.
솔로몬은 21살 나이에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되자 제일 먼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기브온으로 가서 소위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를 드리는데 제물을 천 마리나 드린 것입니다. 한 마리면 충분한데 자그마치 천 마리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그 밤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이 때가 대단히 중요한 순간입니다.
솔로몬이 이 때 다른 것이 아닌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또 한번 큰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전무후무한 지혜를 솔로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지혜는 하나님께로서 오는 것입니다. 바울도 지혜를 하나님의 은사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중요한 말씀으로 우리를 권면해 줍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지혜를 얻는 지름길은 먼저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이 지혜가 부족하다면 아마도 지혜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녀들을 위해서도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런데 큰 지혜를 얻으려면 잘 구해야 합니다. 솔로몬처럼 지혜를 제일 중요한 것으로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구하면 큰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무엇을 줄꼬라고 물으셨을 때 바로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장수도 구하지 않고, 부귀도 구하지 않고, 대적들이나 원수들을 물리쳐 달라고 하지도 않고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 것을 주목하셨습니다.
왕상 3:10을 보면 이 기도가 주의 마음에 맞은 지라고 했습니다.
이 기도를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혜가 정말 중요하고 무엇보다도 내게 필요하다고 깨닫고 진심으로 구한다면 큰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을 먼저 구하고, 부귀를 먼저 구하고, 건강을 먼저 구하고, 성공을 먼저 구하고 나서 지혜를 구한다면 그 사람은 큰 지혜를 얻기 힘들 것입니다.
둘째, 부모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서 2절에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었노라"고 말씀했습니다. 솔로몬이 자기도 아버지에게서 어머니에게서 지혜를 배웠다고 고백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잘되기를 가장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 부모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평생 자기가 살면서 깨달았던 가장 중요한 지혜를 자식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제가 어려서 이웃 아저씨 가운데 평생 술만 퍼마시다가 알콜 중독으로 사람 구실하지 못하다가 세상 떠난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마지막 유언으로 한 마디를 남겼답니다.
"술을 마시지 말라!" 이분이 평생 뼈저리게 깨달은 지혜가 있다면 바로 한 가지 술 마시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 깨달은 가장 소중한 지혜를 자식에게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큰아들이 이 지혜를 귀하게 듣지 않았습니다. 부전자전이라고 아들도 술을 퍼마셨습니다.
그래서 악순환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아들도 망하고 그 가문이 패가망신을 당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님들이 하시는 말씀을 잔소리로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어르신들이 하시는 말씀을 잔소리로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랜 세월 삶으로 온 몸으로 깨달은 지혜를 말씀해 주시는 것을 잘 새겨서 들어야 합니다.
그저 요즘 부모님들 가운데 자식보고 '공부해라! 공부해라!' 성화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자기가 공부 안한 분들이 더 성화입니다. 공부에 한이 맺혀있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더 열심히 했더라면 내 꼴이 이 모양이 아닐텐데' 후회하는 분들이 더 야단입니다.
부모님들이 공부하라고 성화를 부리는 것은 잔소리가 아니고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살 수 있습니다.
셋째, 지혜를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 8절을 보면 지혜를 품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품는다는 말은 남편이 아내를 포옹하는 것, 엄마가 아이를 껴안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철학이란 말을 영어로 Philosophy라고 합니다. 이 말은 헬라어 '필로스'와 '소피아'를 합성한 말입니다. 필로스는 사랑한다는 것이고 소피아는 지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행위입니다.
그렇습니다. 지혜는 우리가 늘 사랑하며 그 지혜를 마음에 담고 살 때 더 풍성히 얻어집니다.
사랑하는 부부도 떨어져 살면 그 사랑이 점점 식는 것처럼, 반대로 부부가 함께 살면서 사랑을 나누면 나눌수록 그 사랑이 더 깊어지는 것처럼, 지혜도 그렇습니다.
늘 지혜롭게 살려고 지혜를 사랑하며 활용하면 지혜는 더욱 풍성해 집니다.
어떤 오페라 극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공연장 내에서는 모자를 벗어주십시오'라고 안내판이 붙어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 아는 상식이고 예절입니다. 그런데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오페라 막이 열리기 직전까지 모자를 혼자 쓰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마이크에서 이런 멘트가 흘러 나왔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 극장에서는 연세가 높으신 어르신들께는 모자 쓰는 것을 허용해 드리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가 급히 모자를 벗더랍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는 마음에 담고 쓰면 쓸수록 도억 풍성해 집니다.
그리고 지혜를 사랑하며 사용하면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행복해 지고 덕을 세우고 기을 창조해 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혜를 풍성히 얻으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더욱 행복해 지고 더욱 윤택해 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시고 모두가 더불어 행복해 질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가정
박조준 목사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 effer)는 독일 나치 치하에서 구속되어 있을 때 결혼을 바로 앞둔 조카딸에게 결혼축하 설교문을 하나 써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설교문에서 이렇게 말했 습니다. 결혼이란 서로 사랑하는 것 이상이란다. 결혼은 보다 지고한 존엄성과 힘을 간직하고 있어. 왜냐하면 결혼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으로서, 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인류를 존속시키실 뜻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야. 연애 중일 때는 너희들이 세상에서 단 두 사람만 서로 보지만, 결혼생활에서는 네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세대를 연결하는 사슬의 고리가 되는 거야.
연애 중일 때는 네 행복의 천국만을 보지 만 결혼생활에서는 이 세상과 인류를 위한 책임을 지게 되지. 네 사랑은 네 자신의 개인 소유물 이지만 결혼이란 개인적인 것 이상이란다. 결혼은 하나의 사회적 신분이고 임무야. 기독교에서 결혼은, 고대 사회에 알려지지 않았던 신성한 의무와 그 중요성을 성취시키고 있습니다. 잊혀졌던 여자의 존엄성이 밝혀졌고 그 가치가 인정이 되었습니다.
모세의 법이나 로마 법에서도 아내의 권리를 남편의 권리와 동등시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남편은 물론 아내도 상대방의 완전한 성실성을 요구하게 권리가 주어졌 습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된 것입니다. (벧전 3:7) 예수님 시대에 가장 엄격한 종파였던 엣세네파(the Essenes)는 결혼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 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앞으로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의 형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하늘나라를 배우는 학교일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예상되는 하나님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정확히 말해서 교회는 가정 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생활을 확립하지 아니하고서 교회를 확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통하여 부어 주시는 축복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가정 생활의 질서와 법도를 확립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부흥과 그 완성 방법을 찾아야 할 곳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그 자체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지 아니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있습니다. 행복과 안일만을 가정생활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혼과 가정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시편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127:1)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가정에 주님을 진정으로 모시면 우리의 가정은 사시사철 항상 아름답고 영원한 꽃향기가 발하는 화원이 될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정의가 아니라 한 개인의 정의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란 추상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원리로 볼 것이 아니라 우 리의 일상생활 경험에 입각해서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가정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창조력이 움트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십니다. 항상 우리 곁에 살아 계시는 인격체인 하나님은 항상 창조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증거는 매일 매일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깨 그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창조의 능력도 주셨고, 즐거워할 줄 아는 능력도 주셨으며, 새로운 인간의 탄생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이처럼 창조의 능력은 가정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움텄습니다.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의 테두리이며, 수평적으로는 남편과 아내의 테두리인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새로운 인간 이 탄생하며, 각양 각색의 특징을 지니고 서로 영향을 미치는 창조적인 사람들이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새로 태어난 인간에게 건설적인 창조 능력을 심어 줄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의 능력이 움트는 곳인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그만한 책임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창조력의 꽃을 피우려고 하는 씨앗의 온상 노릇을 해야 합니다.
창조의 능력은 좋은 분위기와 참다운 용기를 통해서 개발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변의 분위기가 한 인간의 성장에 있어서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긴 설명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식물이 주변 환경에 의해서 그 성장 속도를 달리하는 것과 똑같 은 것입니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고 하더라도 따뜻한 온실 안에는 꽃이 자라 아름답게 피고 각종 과일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아무리 냉랭하다고 하더라도 가정의 따뜻한 분위기는 훌륭한 인간이 탄생하고 자라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창조의 샘이란 말은 가정이 어린아이들의 창조 능력을 키워 주는 장서라는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아내의 창조 능력을 키워 주는 곳이 될 수도 있고, 남편의 창조 능력을 키워 주는 곳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녀들이 자라서 부모에게 용기를 북돋워 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부모는 이러한 자녀들에 의해서 새로운 창조능력을 개발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서로가 이야기하며 또 그것을 들어주며, 다른 사람의 생각에 관심을 쏟는 대화 의 분위기가 필요합니다.
전혀 엉뚱한 이야기라고 해도 그것을 열심히 들어 줄 수 있는 태도를 통해서 서로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신뢰의 분위기는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용기를 북 돋워 줍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창조력의 샘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이 변화하게 하십니다.
어린아이의 생각이 머지않아 십대 청소년의 생각으로 발전하고 또 점점 성숙해져서 성인의 생각으로, 나중에는 전체 가정의 생각으로 발전 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격려하고, 서로 생각을 교환하며, 기술을 가르쳐 주고, 서 로 자극해 주는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사회를 위한 큰 업적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정을 벗어나서 아주 커다란 계획을 자신이 떠맡아 보고자 하는 의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나 교회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여러 방면으로 창조력을 개발해 나아갈 수 있는 가정입니다.
여러분, 가정주부이십니까?
바로 가정이라 불리는 창조체의 주인이신 것을 기억하세요. 직장 생활을 하는 평범한 사원이라고요? 가정이란 창조체를 이끌어 나가는 아버지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2.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올바른 인간관계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인간관계란 어느 누구에게나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린애가 세상에 나오면 제일 먼저 그 부모와 인간관계를 가지 게 됩니다. 인간관계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수지 않고 계속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스승과 다름없는 존재란 것을 부모 자신이 생각하고 있든, 못하고 있든 간 에 아이들에게 사람 다루는 법을 은연중에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가르쳐 주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성경에 나오는 대로 가르쳐 주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가르침은 자녀와 함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순간순간 이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올바른 인간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틀을 어디서 이루어져야 할까요?
바로 그곳이 가정 입니다. 가정이란 인간의 존귀함에 대하여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가정이란 자녀들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을 배워야 하는 곳이며, 따라서 이 우주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하는 사실도 배워야 하는 곳입니다. 단순하게 말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말처럼 해야 합니다.
이 말은 부모 된 우리가 완전하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완전할 수 있습니까?
물론 그럴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형제 자매는 어떻습니까? 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가정의 자녀들도 어린 시절에 우리 모두가 죄인이며 우리 모두가 허물 많은 사람인 것 을 배워야 합니다. 더구나 부모도 성경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실수를 할 수가 있으며 때로는 부모들이 죄악에 빠져 들어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도 자녀에 게 잘못을 사과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과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완전한척하는 것은 거짓을 가르쳐 주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실수에 대한 합리화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이야기하고 성경과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된 데에 대해서 서로 지적해 주며 토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설사 같은 실수가 되풀이되는 한이 있어도 다음 번에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상대방에게 힘을 더해 줍니다. 이와 같은 기대를 가지는 가정의 인간관계는 항상 새로운 감흥을 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중에 잠언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인간관계를 올바르게 가질 수 있도록 한 개인이 개 발해 나갈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잠17:22)는 말씀과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케 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 (잠 12:25)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에 있어서 그 분위기의 중요성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정을 올바른 인간관계를 이루는 장소로 삼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진실입니다.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진실 됨을 되풀이해서 행하는 길입니다. 완전한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까? 아닙니다. 인간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가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알 자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가정이란 서로 의지하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믿고 아껴주며 서로 자신을 희생하고 서로 존중해 주는 곳입니다. 누군가가 앞장서서 이러한 일을 의도적으로 가르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인간관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서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도 남편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가정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사랑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사랑을 표시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곳이 가정입니다. 사랑이 한 사람의 인격의 일부가 되려면 매일매일의 가정의 생활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좌절과 고통에 빠져 있을 때 서로 용서하고 서로 믿으면서 꽃피우는 부부간의 사랑,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은 영원히 시들지 아니하는 꽃입 니다. 자녀는 부모에게서 사랑이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않는 것이란 사실을 배우면서 성장해 야 합니다.
인간의 사랑이 완전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오랜 세월을 두고 서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의 특징은 변함없는 사랑에 있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 속 에서도 사랑의 인내를 드러낼 수 있는 곳이 가정이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자신의 모든 힘을 기울여서 노력하고 다져 나갈 필요가 있는 바른 인간관계를 만드는 곳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영혼의 안식처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 젊은이나 늙은이,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고난이 닥칩니다. 건강한 사람이라 해서 무서운 질병에 빠져들지 않는다는 법은 없습니다. 행복하게 살던 사람이라고 해서 뜻하지 않은 사고로 고통에 시달리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평탄한 나날만이 계속된다고 생각하고 고통의 나날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다면, 질병이나 고통의 순간을 감당해 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기쁨과 슬픔의 두 가지 일이 항상 섞여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양쪽 측면에서 모든 일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우리 인간은 그 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 이 필요로 할 때 완전하게 돌봐 줄 수 없고 우리가 원하는 것도 다른 사람에 의해 완전하게 충족될 수 없습니다. 인생은 계속 흘러갑니다. 우리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아무 것도 요구되지 않는 그저 즐겁기 만한 시간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인생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이란 이웃끼리 서로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대방의 짐을 덜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고난의 때, 폭풍우의 날에 우리의 안식처, 훌륭한 병원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가정뿐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돌 보아 주는 행동도 우선은 제일 가까운 데서부터 차차 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을 위로해 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 우리의 아픔을 전부 위로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위로 받는 목적은 다른 사람을 위로함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은 우리에게 서 위로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위로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장소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은 남을 위로할 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로는 우리의 가정과 직결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무엇입니까?
약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과 이해로써 감싸주는 곳 입니다. 모든 것을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보금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열등감에 빠져 있는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전문적인 심리치료자만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사랑과 이해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가정이 오히려 참신한 치료법을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무엇입니까?
고난의 시절에 피난처를 제공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 다. 인간이 영생을 얻으므로 현재의 생활이 무척 의미가 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 코 무엇이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지속시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죽음으로 끝내서는 안됩니다.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허락하신 가정을 통해서 창조력이 움트게 하고, 올바른 인간관계를 이루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고, 우리의 영혼이 피곤할 때 가정을 통해 위로를 받음으로 이 땅위의 낙원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