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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례후학(先禮後學)
먼저 예의를 배우고 나중에 학문을 배우라는 말이다. 곧 예의가 첫째라는 뜻이다.
先 : 먼저 선(儿/4)
禮 : 예도 례(礻/13)
後 : 뒤 후(彳/6)
學 : 배울 학(子/13)
이 성어는 먼저 예의를 배우고 나중에 학문을 배우라는 뜻으로 예의가 우선임을 이르는 말이다. 무슨 일이든지 선후가 있는 것이다. 공부를 하려고 하면 우선 공부를 할려고 하는 마음가짐과 자세가 중요하다. 책과 공책과 숙제를 제대로 챙기거나 해오지 못하는 학생은 공부할 자세가 되어 있지 못하여 반드시 뒤쳐진다.
중국 칭다오[靑島] 최대 가전회사 하이얼[海尔]의 장루이민 회장과의 인터뷰 기사에 선난후이(先難後易)라고 해놓고 ‘선진국을 먼저 공략해 성공하면 나머지 시장은 쉽게 진출할 수 있다’고 해설해 놓았다. 이는 직역하면 ‘먼저 어려운 일을 하고 뒤에 쉬운 일을 한다’가 될 것이다.
어려운 것을 먼저 돌파하고 극복하는 것은 배움의 자세에도 통할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어려운 일을 해 내고자 하는 정신적인 자세가 먼저 중요함을 깨쳐야 한다.
우리나라에 처음 서원(書院)이 설립된 것은 조선조 중종(中宗) 37년이던 1542년 경상북도 영주(榮州)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으로 전해고 있다. 성균관(成均館)에 따르면 전국에는 모두 378개의 서원이 분포되어 있으나 미복원된 서원의 수 또한 상당수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다음은 서원에 대한 성균관의 소개 글이다.
서원은 향교(鄕校)와 더불어 지방교육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이다. 향교(鄕校)가 국립 교육기관이었던 데에 비해 서원은 사학(私學)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해 왔다. 정치적 탄압으로 중앙 정계에서 물러난 학자들에 의해 대부분의 서원이 설립되었던 까닭에 ‘성현(聖賢)을 본받는다’는 교육목표는 초기 서원 교육에서 중요시 되었다.
특히 국가로부터 사액(賜額)을 받는 서원은 국가에서 발간한 서적을 배부 받을 수 있었고, 독립적인 재정운영으로 재원을 마련, 교육과 연구에 필요한 유교관련 서적들을 구입 비치하였기에 서원은 지방 유림(儒林)들의 도서관 역할도 맡았다.
가람기획이 2006년 7월 펴낸 ‘조선의 서원’에 다음의 글들이 눈에 들어온다.
관학(官學)인 향교는 관료주의적 운영으로 15세기말부터 교육기능이 쇠퇴하면서 양식있는 선비들이 관학을 기피하는 등 부진을 면치 못하게 되자 사림(士林), 즉 유학(儒學)을 공부하는 많은 선비들은 새로운 형태의 학당(學堂)을 갈구하게 된다.
사림은 조선시대 성리학(性理學)의 도통(道統)을 이어받은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그의 학통을 이은 김종직(金宗直)이 김굉필(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등의 제자를 배출하면서 새로운 학풍과 학통의 선비그룹 즉 사림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지조와 절개를 모범삼아 벼슬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사회 모순의 비판 세력으로 남아 개혁을 주장하던 사림은 훈구세력과 대립하면서 네 차례의 사화(士禍)를 유발하게 되고, 그로 인해 큰 타격을 입은 사림은 그들의 세력을 결집하기 위한 새로운 장으로 서원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박석홍 소수서원(紹修書院) 학예연구원은 서원의 제향의례(祭享儀禮)에 관한 글에서 “서원은 선례후학(先禮後學)이라는 두가지 특별한 기능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전자는 훌륭한 인물을 높이고 오래도록 기리고자 사당을 세워 선현에게 향화(香火)를 올리는 제향 기능이고, 후자는 선현의 학덕을 계승코자 학교를 세워 많은 인재를 길러내는 강학기능을 말한다.
서원에서의 제향의식은 선현의 업적을 찬양하고 그 정신을 이어받고자 해마다 정한 날에 향중(鄕中) 유림들이 모여 정성스레 향사례(享祀禮)를 거행하는 것이다.
서원은 유생들이 책을 읽고 학문에 힘쓰는 곳이지만 선현에 대한 제향을 하는 곳이었으므로 서원이 설립되는 장소는 배향하고자 하는 선현의 연고지가 대부분이다. 대체로 선현의 출생지이거나 고향, 또는 성장한 곳, 유배지, 관리로 근무한 곳, 은거하여 후학을 가르친 곳, 묘(墓)가 있거나 충절과 연관된 곳 등을 서원의 입지(立地)로 정하였다.
서원의 구성은 교육시설인 강학공간과 향사(享祀)를 지내는 제향공간(祭享空間), 그리고 제향과 강학 기능을 지원하고 관리하는 부속공간으로 크게 나뉜다. 건물의 배치 형태는 일반적으로 강학공간을 앞쪽에 두고, 제향공간을 뒤쪽에 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소수서원(紹修書院), 회연서원(檜淵書院)과 같이 동쪽에 강학공간을 두고, 서쪽에 제향공간을 배치한 동학서묘(東學西廟) 방식을 따른 서원도 있다. 서원의 이들 세 공간은 각각 담장을 둘러쌓아 각 공간마다 고유한 영역을 형성한다.
서원에서 당시 젊은이들은 소학을 필수과목으로 배웠다. 소학은 유교사회의 도덕 규범 중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내용을 가려 뽑은 책으로 효(孝)와 경(敬)을 중심으로 한 가정, 사회에 대한 이상적인 인간상과 아울러 수기(修己) 치인(治人)의 군자를 육성하기 위한 계몽 교훈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오늘날도 자녀들의 인성교육을 제대로 하려면 소학에서 그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가족들과 함께 선현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서원을 찾아보면 어떨까. 서원을 찾으면 당시 선비들의 기개와 정신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거슬러 가는 기분을 자아낸다.
선현의 가르침과 생전의 업적을 기억하는 자랑과 보람에 더하여, 산수가 수려한 경관을 직접 볼 수 있어 체험의 즐거움 또한 클 것이다. 해방 이후 현대 교육의 거센 물결에 그 존재마저 잊혀진 서원들. 이제 우리의 교육문화유산이 된 서원의 기능과 역할 등 그 가치가 재조명되어 지금의 교육현실을 되살리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환주문과 선례후학(先禮後學)
환주문(喚主門)은 도동서원의 본래의 정문이었다. 현재는 수월루 아래의 외삼문이 도동서원의 정문 역할을 하고 있으나, 수월루와 외삼문은 조선 후기에 증축되었던 것인데, 그나마 소실되어 현존건물은 1973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따라서 1604~5년 도동서원이 재건될 당시에는 이 환주문(喚主門)이 정문이었던 것이다.
정문이라면 크고 웅장한 것이 상례이지만 이 환주문은 작고 낮게 만들어져 있다. 그 시대 사람들이 특히나 의관을 갖추고 이 문을 들어가려면 허리를 굽혀 몸을 낮추어야 했을 것이다. 즉 자동으로 절을 하는 모양이 되는 것이다.
환주문(喚主門)은 '주인을 부르는 문'이라는 뜻인데, 마음 속의 주인을 불러 예를 갖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환주문을 들어서면 학문을 닦는 강학공간이니, 학문을 하기 전에 먼저 예의를 갖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것을 여기서는 선례후학(先禮後學)이라고 하며, 예를 먼저 배우고 학문은 그 다음이라는 뜻이다.
이 뜻을 조금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인성교육이 먼저이고, 지식교육은 그 다음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이 황폐화되고, 사도가 무너져가는 현대의 교육현실에 대하여, 이 환주문이 주는 선례후학의 정신은 많은 시사점을 던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계단 입구의 좌우 소맷돌에는 태극문양과 꽃봉오리 문양이 예쁘게 조각되어 있다. 이 또한 사람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발아래로 이끌어서, '계단조심', 'Watch your step!'을 알려주려는 배려인지 모른다.
문의 발아래 받침돌에도 커다랗게 꽃봉오리무늬가 새겨져 있어서, 이를 감상하려면 자연히 고개를 숙이게 되고 아울러 자신의 매무새도 다시 살피게 되는 것이다. 이 역시 낮은 문과 함께 선례후학을 실천하는 자동화시스템이다. 지붕에도 선비의 상투를 닮은 절병통을 얹어 놓은 것이 여간 예사롭지 않다.
예(禮)를 실천하기 위한 공간인 '작은 문'의 생각이 일본에서는 아주 극단화되어 나타나는데, 일본의 전통 다실의 '니지리구치'가 바로 그것이며, '기어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이 문의 크기는 가로 2자(약 60cm), 세로 2자2치(약 66cm) 정도이다.
문앞에 있는 섬돌(구쓰누기이시) 위에 쪼그려 앉아서 문지방을 양손바닥으로 짚고, 머리부터 문안으로 넣고 무릎걸음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이 이 문의 통행방법이다. 이것이 '청정무구', '무념무상'의 세계인 다실로 들어가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다도가 무가사회를 중심으로 발달한 것이라는 점을 상기해 보면, 그 '무념무상'이라는 말에 어쩐지 으스스한 생각이 든다. 머리는 문 안에, 몸은 문 밖에...
소수서원, 공부보다 예(禮) 우선하는 정신 되새긴다
1.
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 사상의 본거지이자 인재를 배출한 요람이었다. 성균관이나 관학인 향교와 달리 16세기 이후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이다. 사림은 성리학적인 세계의 구현을 목표로 삼았고 성리학을 체계화한 주자를 큰 스승으로 섬겼다.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周世鵬)은 1542년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들여온 회헌 안향(安珦) 선생이 공부했던 숙수사 터에 사당을 짓고 이듬해 주자가 강학한 백록동서원을 본받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주세붕은 목사 안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곳은 문정공 안축이 죽계별곡을 지은 곳으로 마치 신령한 거북이 엎드린 듯한 형상으로 산 아래에 죽계가 있으며, 구름에 둘러싸인 소백산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물 등 진실로 산수풍광이 백록동서원이 있는 중국의 여산에 못지않다”면서 “구름과 산, 언덕과 강물, 그리고 흰 구름이 항상 골짜기에 가득하므로 감히 이곳을 ‘백운동’이라 이름 짓고 감회에 젖어 배회하다가 사당 건립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고 밝혔다.
2.
1548년 풍기 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선생이 백운동서원의 격을 높이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편액과 토지를 내려줄 것을 조정에 건의하자, 1550년 명종(明宗)은 친필로 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과 함께 서적과 노비를 하사했다. 왕이 현판을 내렸다고 해서 이를 사액(賜額)서원이라고 하는데, 백운동서원은 이때부터 소수서원으로 이름이 바뀐다. 소수는 ‘기폐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 紹而修之), 즉 ‘이미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서 닦는다’는 말에서 유래한다.
조선 500년을 관통하는 유학 이념이 녹아있는 사설 교육기관인 서원은 인재 양성뿐만 아니라 시정을 비판하는 사림의 공론을 형성하면서 널리 퍼져 1개 도의 서원이 80∼90곳을 헤아리게 됐고, 사액서원도 130여 곳에 이르렀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난립한 서원 철폐령을 내렸을 때, 미국의 하버드대학보다 무려 93년 먼저 설립된 소수서원은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됐다.
3.
우리나라 최초 사액서원이자 사립대학
서원이 관학인 향교와 달리 마을과 떨어져 주변 풍광이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곳에 있듯이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인 소수서원도 낙동강의 원류를 이루는 죽계수가 감돌고 바위와 울창한 송림이 한데 어우러져 수려한 경관을 빚어내는 절경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중앙고속도로 풍기 나들목에서 나와 931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소수서원(사적 제55호)에 닿는다. 소수서원으로 들어서는 매표소 입구부터 300∼500년 된 소나무 숲이 반긴다.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되라는 의미로 학자수(學者樹)라고 부른다.
소나무 내음을 따라 걷다 보면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당간지주(보물 제59호)를 만난다. 당(幢)이라는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이를 고정시켜 받쳐 세우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박석홍 전 소수박물관장은 “소수서원 자리는 통일신라 때 세워진 숙수사라는 큰 절이 있던 터였고 안향이 숙수사에서 수학해 과거에 급제했다”며 “세조 3년 단종 복위운동 실패로 순흥도호부가 폐부될 때 소실되고 유일하게 당간지주 1기만 남았다”고 말한다.
당간지주를 지나면 암수한몸인 은행나무 고목과 향사 전날 제물들을 위에 올려놓고 제관들이 그 생김새와 흠집을 살피며 제물로서 합당한지 검토하던 성생단(省牲壇)이 나타난다. 서원의 성생단은 사당 근처에 있는 것이 관례인데, 소수서원의 성생단은 서원 입구에 있다.
또 서원 영역으로 들어가기 전 오른쪽에 경렴정(景濂亭)이라는 아주 소박한 정자가 문 앞에 앉아 있다. 주세붕이 세운 정자로 유생들이 자연을 벗 삼아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곳이다. 정자의 이름은 중국 북송의 유학자 염계 주돈이의 호에서 ‘염’ 자를 따오고, 높인다는 뜻에서 ‘경’ 자를 붙였다고 한다. 죽계수가 내려다 보이는 경렴정의 현판은 조선 3대 초성(草聖)으로 불리는 황기로가 썼는데 마치 용이 비천하는 듯한 빼어난 글씨로 평가받는다.
경렴정을 지나 정문인 지도문(志道門)으로 들어서면 강학당(講學堂, 보물 제1403호)과 마주한다. 지도문은 표적을 향해 활을 쏘듯 도를 향해 뜻을 세우고 나아감을 이르는 말이고, 강학당은 서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유생들이 강의를 듣던 곳이다. ‘백운동’ 현판이 걸린 강학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의 4칸 가운데 3칸은 대청이고, 1칸은 온돌방이다.
대청의 문을 들어 올려 처마에 걸면 탁 트인 마루가 되고, 건물 사방으로 너비 1m 정도의 툇마루가 빙 둘러 연결돼 있다. 대청에는 ‘소수서원’ 편액이 높이 걸려 있다. 박석홍 전 관장은 “소수서원은 엘리트 유생들의 수학 공간만은 아니었다”면서 “퇴계는 배움을 열망하던 순흥 땅의 무쇠장이 배순을 제자로 삼아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는 유교무류(有敎無類)를 몸소 실천했다”고 설명한다.
강학당 뒤로는 원장의 집무실 겸 숙소인 직방재와 일반 교수의 집무실 겸 숙소인 일신재가 배치돼 있는데 각각 독립된 건물이 아니라 하나의 건물로 이루어졌다. 직방재바로 옆에는 서적과 서원에서 출판한 판각을 보관했던 정서각이 있다.
서책은 ‘좌우지선’(坐右之先)의 예를 따라 으뜸자리에 둔다고 스승의 우측에 세웠고, 임금이 직접 지어 하사한 ‘어제(御製) 내사본’을 비롯해 3천여 권의 장서가 있었다고 한다. 장서각 앞에는 밤에 서원 경내를 다니는 데 지장이 없도록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관솔불을 켜 놓았던 정료대가 서 있다.
4.
충효예학이 살아 숨 쉬는 선비정신의 산실
일신재 오른편에는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가 자리하고 있다. 소수서원은 1888년까지 350년간 무려 4천200여 명의 유생을 배출했는데 퇴계 이황 선생의 제자들은 대부분이 소수서원 출신이다.
일명 동몽재라고 불리는 학구재는 ‘학문을 구한다’라는 뜻을 가진 건물로 정면 3칸 중 1칸이 마루로 구성돼 있다. 중앙에 있는 마루의 앞과 뒤는 벽이 없이 모두 개방해 놓았다. ‘배움의 깊이를 더하면 즐거움에 이른다’는 뜻을 담은 지락재는 ‘높은 곳을 우러러보는 공간’이라 하여 ‘앙고재’라고 부르는데, 학구재와 똑같이 3칸 규모이지만 마루가 오른쪽으로 두 칸이 나 있다. 지락재의 마루에서는 바로 옆 담장 너머 죽계천의 풍경과 계곡 물소리가 한가득 담긴다.
박석홍 전 관장은 “학구재와 지락재는 직방재와 일신재보다 기단 높이도 낮고 한 자 낮게 뒷물림돼 지어져 있는데, 이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공경의식이 건축에도 반영됐기 때문”이라며 “학구재와 지락재는 '工'자 형태로 지어졌는데 '工'은 '공부(工夫)'의 앞글자인 ‘공’을 따온 것으로 유생들의 배움을 장려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그의 설명대로 소수서원은 충효예학이 살아 숨 쉬는 선비정신의 산실이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5.
우리나라 서원 대부분이 중국을 본받아 전학후묘(前學後廟)로 학문을 갈고 닦는 강학 영역을 앞쪽에, 제사를 지내는 제향 영역을 뒤쪽에 배치한다. 하지만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전통 위차법(位次法)인 이서위상(以西爲上)을 따라 동학서묘(東學西廟)다. 강학당 옆쪽에 담장을 둘러서 별도의 구역을 이룬 곳에 문성공묘(보물 1402호)가 있다.
이곳에는 문성공 안향 선생을 주향으로, 문정공 안축과 문경공 안보를 배향한 뒤 문민공 주세붕을 추배해 4명의 위패를 봉안했다. 대부분의 사당을 ‘사’(祠)라 칭하지만 임금이 인정한 특정한 사당만을 ‘묘’(廟)라 칭한다. ‘묘’로는 역대 임금들을 모신 종묘, 공자를 모신 문묘가 있다.
문성공묘 뒤편에는 제기를 보관하고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마련하던 전사청이 있다. 전사청 바로 옆 영정각에서는 주희, 안향, 주세붕, 이원익, 허목, 이덕형 등 6명의 선인 초상과 만난다. 안향의 초상화(국보 제 111호)와 주세붕의 초상화(보물 제717호)의 진품은 소수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영정각 앞에는 해그림자를 통해 시간을 재던 해시계인 일영대도 있다.
6.
주세붕·이황의 글씨 만나는 죽계천
서원을 둘러보고 난 뒤 죽계천으로 나가면 붉은 글씨로 ‘敬’, 흰 글씨로 ‘白雲洞’이라고 새겨놓은 경자바위를 만난다. ‘敬’(경) 자는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세우고 쓴 글씨로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죽계천은 1456년 금성대군과 이보흠이 이끈 단종 복위운동 실패로 무참히 살육된 순흥부 주민들의 시신이 수장되었던 곳으로 주세붕이 그 원혼을 달래기 위해 ‘敬’ 자에 붉은 칠을 하고 위령제를 지냈다는 순흥 땅의 아픈 역사와 전설이 얽혀 있다.
'백운동(白雲洞)'은 퇴계 이황 선생이 썼다고 한다. 경자바위 아래의 취한대(翠寒臺)는 소실되어 터만 남아 있던 것을 근래에 복원한 정자로, 퇴계 선생이 짓고 나서 ‘죽계수의 맑고 시원한 물빛에 취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고 해서 ‘취한대’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죽계천 건너 뒤쪽으로 이어져 있는 소수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기면 지역 기증자들의 유물과 영주 지역의 선사시대, 삼국시대 그리고 불교문화, 옛 선현들의 개인문집, 나라의 교지 등을 볼 수 있다. 퇴계 선생이 별세하기 2년 전 선조에게 올린 ‘성학십도’(聖學十圖) 목판 원판이 전시돼 있고, 서원에 관한 다양한 자료를 통해 유교사상과 소수서원 역사 등을 배울 수 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조선 초기의 천재 수학자며 천문학자인 영주 출신 무송헌 김담 선생 탄신 600주년 기념 ‘김담, 역법을 완성하다’특별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소수서원 탐방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오래전 유생들이 공부하고 토론했던 공간을 둘러보면서 공부에 앞서 예를 우선시했던 선례후학(先禮後學)의 정신을 되새김질하는 여정이다. 인성 문제가 사회 문제로 불거지는 요즘, 소수서원은 올여름 피서지로 추천할 만한 곳이다.
▶️ 先(먼저 선)은 ❶회의문자로 之(지; 가다)와 어진사람인발(儿; 사람의 다리 모양)部의 합자(合字)이다. 어진사람인발(儿)部는 본디 人(인)과 같은 글자이지만 이 모양이 아래에 붙는 글자는 그 위에 쓰는 자형(字形)이 나타내는 말의 기능을 강조하여, 앞으로 나아가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先자는 ‘먼저’나 ‘미리’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先자는 牛(소 우)자와 儿(어진사람 인)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先자의 갑골문을 보면 본래는 牛자가 아닌 止(발 지)자와 儿자가 결합한 모습이었다. 이것은 사람보다 발이 앞서나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先자는 ‘먼저’라는 뜻을 갖게 되었지만 소전에서는 止자가 牛자로 잘 못 옮겨졌다. 소전에서의 牛자와 止자가 서로 비슷하여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先(선)은 (1)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이어 앞선 먼저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어떤 명사(名詞) 앞에 붙이어 돌아 간의 뜻을 나타내는 말 (3)바닥이나 장기, 고누, 윷놀이 따위에서 맨 처음에 상대편보다 먼저 두는 일, 또는 그 사람 (4)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먼저, 미리 ②옛날, 이전 ③앞, 처음, 첫째 ④돌아가신 이, 죽은 아버지 ⑤선구(先驅), 앞선 사람 ⑥조상(祖上) ⑦형수(兄嫂) ⑧앞서다, 뛰어넘다, 이끌다 ⑨나아가다, 앞으로 가다 ⑩높이다, 중(重)히 여기다, 뛰어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앞 전(前)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뒤 후(後)이다. 용례로는 할아버지 이상의 조상을 선조(先祖), 학교나 직장을 먼저 거친 사람 또는 나이나 학식 등이 자기보다 많거나 나은 사람을 선배(先輩), 남의 앞에 서서 인도함 또는 앞장서서 안내함을 선도(先導),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가 죽은 열사를 선열(先烈), 맨 앞이나 첫머리를 선두(先頭), 먼저와 나중을 선후(先後),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을 선산(先山), 다른 문제보다 먼저 해결함 또는 결정함을 선결(先決), 맨 먼저 주창함을 선창(先唱), 선수를 써서 자기에게 이롭도록 먼저 상대방의 행동을 견제함을 선제(先制), 다른 일에 앞서 행함 또는 앞서 행한 행위를 선행(先行), 어떤 임무나 직무 등을 먼저 맡음 또는 그 사람을 선임(先任), 먼저 약속함 또는 그 약속을 선약(先約), 남보다 앞서서 먼저 차지함을 선점(先占), 맨 앞장을 선봉(先鋒), 남보다 앞서 길을 떠나감을 선발(先發), 차례에서의 먼저를 선차(先次), 세상 물정에 대하여 남보다 먼저 깨달음을 선각(先覺), 무엇보다도 먼저를 우선(于先), 다른 것 보다 앞섬을 우선(優先), 남보다 앞서 함을 솔선(率先), 앞장서서 인도함을 수선(帥先), 앞서기를 다툼을 쟁선(爭先), 선조의 덕업을 받듦을 봉선(奉先), 실력이 비슷한 사람끼리 두는 바둑을 상선(相先), 실력이 비금비금한 사람끼리 두는 바둑을 호선(互先), 남보다 앞서 일을 도모하면 능히 남을 누를 수 있다는 뜻으로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남보다 앞서 하면 유리함을 이르는 말을 선즉제인(先則制人), 사보다 공을 앞세움이란 뜻으로 사사로운 일이나 이익보다 공익을 앞세움을 일컫는 말을 선공후사(先公後私), 소문을 미리 퍼뜨려 남의 기세를 꺾음 또는 먼저 큰소리를 질러 남의 기세를 꺾음을 일컫는 말을 선성탈인(先聲奪人), 근심할 일은 남보다 먼저 근심하고 즐길 일은 남보다 나중에 즐긴다는 뜻으로 지사志士나 인인仁人의 마음씨를 일컫는 말을 선우후락(先憂後樂),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라는 뜻으로 장래를 미리 예측하는 날카로운 견식을 두고 이르는 말을 선견지명(先見之明), 먼저 들은 이야기에 따른 고정관념으로 새로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이르는 말을 선입지어(先入之語), 먼저 예의를 배우고 나중에 학문을 배우라는 말을 선례후학(先禮後學), 먼저 의를 따르고 후에 이익을 생각한다는 말을 선의후리(先義後利), 다른 사람의 일보다 자기의 일에 우선 성실해야 한다는 말을 선기후인(先己後人), 먼저 앓아 본 사람이 의원이라는 뜻으로 경험 있는 사람이 남을 인도할 수 있다는 말을 선병자의(先病者醫), 선인의 행위를 들어 후학을 가르침을 일컫는 말을 선행후교(先行後敎), 꽃이 먼저 피고 나중에 열매를 맺는다는 뜻으로 딸을 먼저 낳은 다음에 아들을 낳음을 이르는 말을 선화후과(先花後果), 먼저 곽외郭隗부터 시작하라는 뜻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나 말한 사람부터 시작하라는 말을 선시어외(先始於隗) 등에 쓰인다.
▶️ 禮(예도 례/예)는 ❶형성문자로 豊(례)가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보일 시(示=礻; 보이다, 신)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신에게 바치기 위해 그릇 위에 제사 음식을 가득 담은 모양의 뜻을 가진 豊(풍, 례)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제사를 풍성하게 차려 놓고 예의를 다하였다 하여 예도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禮자는 ‘예절’이나 ‘예물’, ‘의식’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禮자는 示(보일 시)자와 豊(예도 례)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豊자는 그릇에 곡식이 가득 담겨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예도’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예도’라는 뜻은 豊자가 먼저 쓰였었다. 고대에는 추수가 끝나면 신에게 감사하는 제사를 지냈다. 이때 수확한 곡식을 그릇에 가득 담아 올렸는데, 豊자는 바로 그러한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그러나 후에 豊자가 ‘풍성하다’나 ‘풍부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면서 소전에서는 여기에 示자를 더한 禮자가 뜻을 대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禮(례)는 ①예도(禮度) ②예절(禮節) ③절(남에게 공경하는 뜻으로 몸을 굽혀 하는 인사) ④인사 ⑤예물(禮物) ⑥의식(儀式) ⑦책의 이름(=예기禮記) ⑧경전(經典)의 이름 ⑨단술(=감주), 감주(甘酒: 엿기름을 우린 물에 밥알을 넣어 식혜처럼 삭혀서 끓인 음식) ⑩예우(禮遇)하다 ⑪신을 공경(恭敬)하다 ⑫절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예의에 관한 모든 질서나 절차를 예절(禮節), 사회 생활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공손하며 삼가는 말과 몸가짐을 예의(禮儀), 예로써 정중히 맞음을 예우(禮遇), 예법에 관한 글을 예문(禮文), 예로써 인사차 방문함을 예방(禮訪), 존경하여 찬탄함을 예찬(禮讚), 예법과 음악을 예악(禮樂), 예법을 자세히 알고 그대로 지키는 사람 또는 그러한 집안을 예가(禮家), 사례의 뜻으로 주는 물건을 예물(禮物), 예법을 따라 베푸는 식으로 결혼의 예를 올리는 의식을 예식(禮式), 예로써 정중히 맞음을 예대(禮待), 예법으로써 그릇된 행동을 막음을 예방(禮防), 예절과 의리를 예의(禮義), 혼인의 의례를 혼례(婚禮), 스무살이 되어 남자는 갓을 쓰고 여자는 쪽을 찌고 어른이 되던 예식을 관례(冠禮), 예의에 벗어나는 짓을 함을 결례(缺禮), 볼품없는 예물이란 뜻으로 사례로 주는 약간의 돈이나 물품을 박례(薄禮), 장사지내는 예절을 장례(葬禮), 예법에 따라 조심성 있게 몸가짐을 바로함을 약례(約禮), 예의가 없음을 무례(無禮), 아내를 맞는 예를 취례(娶禮), 언행이나 금품으로써 상대방에게 고마운 뜻을 나타내는 인사를 사례(謝禮), 공경의 뜻을 나타내는 인사를 경례(敬禮), 말이나 동작 또는 물건으로 남에게서 받은 예를 다시 되갚는 일을 답례(答禮), 예절과 의리와 청렴한 마음과 부끄러워 하는 태도를 예의염치(禮義廉恥), 예의와 음악이 깨지고 무너졌다는 뜻으로 세상이 어지러움을 이르는 말을 예괴악붕(禮壞樂崩), 예의가 지나치면 도리어 사이가 멀어짐을 예승즉이(禮勝則離), 예의를 숭상하며 잘 지키는 나라를 예의지국(禮儀之國), 예의가 너무 까다로우면 오히려 혼란하게 됨을 예번즉란(禮煩則亂), 예의는 서로 왕래하며 교제하는 것을 중히 여김을 예상왕래(禮尙往來), 어느 때나 어느 장소에서나 예의는 지켜야 한다는 말을 예불가폐(禮不可廢) 등에 쓰인다.
▶️ 後(뒤 후/임금 후)는 ❶회의문자로 后(후)는 간자(簡字)이다. 발걸음(彳; 걷다, 자축거리다)을 조금씩(문자의 오른쪽 윗부분) 내딛으며 뒤처져(夂; 머뭇거림, 뒤져 옴) 오니 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後자는 ‘뒤’나 ‘뒤떨어지다’, ‘뒤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後자는 彳(조금 걸을 척)자와 幺(작을 요)자, 夂(뒤져서 올 치)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後자는 족쇄를 찬 노예가 길을 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後자를 보면 족쇄에 묶인 발과 彳자가 그려져 있었다. 발에 족쇄가 채워져 있으니 걸음이 뒤처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後자는 ‘뒤떨어지다’나 ‘뒤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後(후)는 (1)무슨 뒤, 또는 그 다음. 나중 (2)추후(追後) 등의 뜻으로 ①뒤 ②곁 ③딸림 ④아랫사람 ⑤뒤떨어지다 ⑥능력 따위가 뒤떨어지다 ⑦뒤지다 ⑧뒤서다 ⑨늦다 ⑩뒤로 미루다 ⑪뒤로 돌리다 ⑫뒤로 하다 ⑬임금 ⑭왕후(王后), 후비(后妃) ⑮신령(神靈)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먼저 선(先), 앞 전(前), 맏 곤(昆)이다. 용례로는 뒤를 이어 계속 됨을 후속(後續), 이후에 태어나는 자손들을 후손(後孫), 뒤로 물러남을 후퇴(後退), 일이 지난 뒤에 잘못을 깨치고 뉘우침을 후회(後悔), 같은 학교를 나중에 나온 사람을 후배(後輩), 반반씩 둘로 나눈 것의 뒷부분을 후반(後半), 핏줄을 이은 먼 후손을 후예(後裔), 뒷 세상이나 뒤의 자손을 후세(後世), 뒤에서 도와줌을 후원(後援), 뒤의 시기 또는 뒤의 기간을 후기(後期), 중심의 뒤쪽 또는 전선에서 뒤로 떨어져 있는 곳을 후방(後方), 뒤지거나 뒤떨어짐 또는 그런 사람을 후진(後進), 맨 마지막을 최후(最後), 일이 끝난 뒤를 사후(事後), 일정한 때로부터 그 뒤를 이후(以後), 정오로부터 밤 열두 시까지의 동안을 오후(午後), 바로 뒤나 그 후 곧 즉후를 직후(直後), 그 뒤에 곧 잇따라 오는 때나 자리를 향후(向後), 앞과 뒤나 먼저와 나중을 전후(前後), 젊은 후학들을 두려워할 만하다는 후생가외(後生可畏), 때 늦은 한탄이라는 후시지탄(後時之嘆), 뒤에 난 뿔이 우뚝하다는 뜻으로 제자나 후배가 스승이나 선배보다 뛰어날 때 이르는 말을 후생각고(後生角高), 내세에서의 안락을 가장 소중히 여겨 믿는 마음으로 선행을 쌓음을 이르는 말을 후생대사(後生大事), 아무리 후회하여도 다시 어찌할 수가 없음을 후회막급(後悔莫及) 등에 쓰인다.
▶️ 學(배울 학, 가르칠 교, 고지새 할)은 ❶회의문자로 아이들이 양손에 책을 들고 가르침을 본받아 깨우치니 배우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學자는 ‘배우다’나 ‘공부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學자는 臼(절구 구)자와 宀(집 면)자, 爻(효 효)자, 子(아들 자)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갑골문에 나온 學자를 보면 집을 뜻하는 宀자 위로 爻자를 감싼 양손이 그려져 있었다. 한자에서는 爻자가 무늬나 배움과 관련된 뜻을 전달하고 있으니 이것은 ‘배움을 가져가는 집’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니까 갑골문에서의 學자는 집이나 서당에서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이었다. 금문에서는 여기에 子자가 더해지면서 ‘아이가 배움을 얻는 집’이라는 뜻을 표현하게 되었다. 그래서 學(학, 교, 할)은 (1)철학 또는 전문적인 여러 과학을 포함하는 지식의 조직체. 곧 현실의 전체 또는 그 특수한 영역 및 측면에 관하여 체계화된 지식의 계통적 인식 (2)학문(學問) 등의 뜻으로 ①배우다 ②공부하다 ③흉내내다 ④모방하다 ⑤가르침 ⑥학교(學校) ⑦학문(學問) ⑧학자(學者) ⑨학통(學統) ⑩학파(學派) 그리고 ⓐ가르치다(교) 그리고 ㉠고지새(되샛과의 새)(할)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닦을 수(修), 익힐 련(練), 익힐 습(習),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가르칠 교(敎), 가르칠 훈(訓), 가르칠 회(誨)이다. 용례로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 기관을 학교(學校), 배우는 사람으로 주로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사람을 학생(學生),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히는 일을 학문(學問), 사물을 배워서 익히는 일을 학습(學習), 학문에 능통한 사람이나 연구하는 사람을 학자(學者), 학문의 실력이나 역량을 학력(學力), 공부하여 학문을 닦는 일을 학업(學業), 학문의 사회나 학자의 사회를 학계(學界), 한 학년 동안을 규정에 따라 나눈 수업 기간을 학기(學期), 출신 학교에 따른 연고 관계를 학연(學緣), 학문의 기술 또는 학문의 방법이나 이론을 학술(學術), 공부한 이력을 학력(學歷), 공부하는 데 드는 돈을 학비(學費), 배워서 얻은 지식을 학식(學識), 한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는 벗을 학우(學友), 학생의 무리 또는 학문을 닦는 사람을 학도(學徒), 학업을 닦음을 수학(修學), 실지로 보고 학식을 넓힘을 견학(見學), 배우지 못함이나 학문이 없음을 불학(不學), 일정한 목적과 방법으로 그 원리를 연구하여 하나의 체계를 세우는 학문을 과학(科學), 인간이나 인생이나 세계의 지혜와 궁극의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학문을 철학(哲學), 언어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을 어학(語學), 학교에 들어감을 입학(入學), 개인의 사사로운 학설 또는 개인이 설립한 교육 기관을 사학(私學), 외국에 가서 공부함을 유학(留學), 학문에 나아가 닦음 또는 상급 학교로 나아감을 진학(進學), 학교에서 학기를 마치고 한동안 수업을 쉬는 일을 방학(放學), 방학을 마치고 다시 수업을 시작함을 개학(開學), 다니던 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옮겨가서 배움을 전학(轉學), 학문에 힘써 공부함을 면학(勉學), 배우고 때로 익힌다는 뜻으로 배운 것을 항상 복습하고 연습하면 그 참 뜻을 알게 된다는 학이시습(學而時習), 학문은 미치지 못함과 같으니 쉬지 말고 노력해야 함을 이르는 말을 학여불급(學如不及), 배우는 일에 정성을 다해 몰두함을 학업정진(學業精進), 배움이란 마치 물을 거슬러 배를 젓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퇴보한다는 학여역수(學如逆水), 외고 읽을 뿐으로 이해하려고 힘쓰지 않고 또 실천하지 못하는 학문을 기송지학(記誦之學), 배우지도 못하고 아는 것이 없음을 불학무식(不學無識), 널리 공부하여 덕을 닦으려고 뜻을 굳건히 함을 이르는 말을 박학독지(博學篤志)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