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sterday I saw a lion kiss a deer
(어제 난 사슴에게 입맞춤하는 사자를 보았어요)
Turn the page
(이제 페이지를 넘겨봐요)
Maybe we’ll find a brand new ending
(우린 아마 새로운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 테니)”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 중 하나인 Adam Levine의 ‘Lost Stars’ 가사 중 일부이다.
이 음악을 배경으로 ‘Begin Again’ 영화 역시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우리는 흔히, 어쩌면 너무 잔인하게도 모든 것을 ‘경쟁’으로 여긴다.
특히 대한민국이라는, 풍부하지 않은 장소에서 태어난 이들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해 보인다. 태어났을 때부터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것들을, 조금 더 많이 가지기 위하여 우리는 남을 안아주는 법보다 짓밟는 법을 먼저 배웠다.
그리고 타인을 친구가 아닌, 적으로 여기게 되었고 그렇게 ‘다정하다’라는 형용사는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나날이 낯설어져만 갔다.
그런 우리에게, 가끔 초원을 찾아주는 ‘단비’ 같은 책이다.
너무나도 잔인한, 그럼에도 이 세상의 진리라고 여겨져 왔던 적자생존과 성악설에 반기를 든 책.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의 [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 많은 이들이 착각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적자생존’이라는 단어를 진화론의 아버지인 ‘찰스 다윈’이 만들었다고 여기는 분들이 있는데, 이 단어는 사실 그의 전도사를 자칭한 ‘허버트 스펜서’의 작품이다.
즉 다윈은 단 한 번도 ‘악한 자만이 또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종만이 자연에서 살아남는다’고 [ 종의 기원 ]에서 말한 적 없다. 오히려 그는 이런 문장을 책에 담았다.
“자상한 구성원들이 가장 많은 공동체가 가장 번성하여 가장 많은 수의 후손을 남겼다”
[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는 이런 다윈의 주장을 올바르게 또 과학적으로 검증한 책이다. 두 명의 저자는 이 책에서 하나의 가설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이다.
언뜻 낯설게 들리는 이 가설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사람은 자신의 종 스스로를 가축화 즉 ‘무리생활이 가능하도록 적응’시켰다는 의미이다.
저자들은 호모 사피엔스가 서로가 협력적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능력인 ‘친화력’을 발전시켰고, 이를 통한 자기 가축화는 우리를 현재 이토록 번성하게 해주었다고 주장한다.
조금 더 풀어서 천천히 말해보자.
가축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집에서 기르는 짐승’이라는 정의를 가지고 있다. 즉 가축화라는 단어 역시 ‘집에서 기를 수 있도록’ 종을 적응시킨다는 의미이다.
다만 이 가설에서는 그 대상이 사람이고, 우리는 스스로를 집에서 그리고 함께 지낼 수 있도록 친화력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 ‘사람 자기가축화’의 근거로 여러 구체적인 생물학적 증거를 제시한다. 이는 다른 말로 설명하면 얼마나 ‘친화적’으로 인간이 진화했는지를 가리는 척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기준들이 그것이니, 재미 삼아 여러분이 얼마나 ‘자상한’ 인간인지 체크해 보자.
눈썹과 눈의 거리가 가깝고, 눈썹 사이가 좁을수록 친화적이다.
두개골은 작고, 동그란 구형 일수록, 손가락은 약지가 검지보다 길수록 친화적이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자연선택이 다정하게 행동하는 개체들에게 우호적으로 작용하여 우리가 유연하게 협력하고 의사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켰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리고 위와 같은 가축화의 ‘신체적 징후’들은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수많은 세월 동안 서로에게 다정하게 대해오며, 의식뿐만 아니라 몸까지 함께 변화시켰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저자들은 ‘하얀 공막(눈동자를 제외한 부분)’을 우리 종이 자연에서 살아남고, 번성하기 위한 전략으로 친화력을 선택했다는 가장 큰 증거라 주장한다.
인류의 공막이 하얀색을 띠게 된 진화가 이루어진 시기는 약 8만 년 전으로 추측되는데, 이 새하얀 배경은 ‘눈동자’ 즉 개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뚜렷이 드러나게 하였다.
즉 지금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며 당연히 그러하듯, 고대의 인류 역시 서로 소통할 때 상대방의 눈을 쳐다보고 주의 깊게 의견과 감정을 공유하는 방향으로 진화해나간 것이다.
이러한 ‘눈 맞춤’ 빈도의 증가는 인간 간의 유대와 협력적 의사소통을 촉진시켰고, 협력할 때 분비되는 호르몬인 ‘옥시토신’을 훨씬 활발히 발현하게 하였다.
결국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이란 이러한 생물학적 증거를 토대로, 인간은 ‘본래 서로에게 다정하게 대해왔음’을 증명하는 역사적 검증이라 정리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러한 가설을 토대로, 행복한 상상과 추론을 경험했다. 인간은 본래 선(善)한 종이며, 서로를 위하는 것이 당연한 또 필요한 행위임을 유전자 단위부터 알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우리 종, 인류는 어쩔 수 없이 영원한 싸움과 전쟁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일까?
[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는 주장한다. 모든 대립을 없앨 수 있는 해결책은 의외로 아주 간단하다고. ‘우리’의 범위를 넓히는 것,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
보복성 비인간화로 이야기를 돌려보면, 결국 우리와 너희를 ‘구분’하고 ‘경계’짓는 것으로 모든 다툼은 발생한다.
그렇다면 그 구분과 경계를 확장해서, 모두를 ‘우리’의 범위에 포함시키면 어떻게 될까?
친화력은 어느덧 상대방으로 인식됐던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하고, 집단에 대한 애정과 정체성은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나는 [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를 읽으며 따스한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그동안 너무나, 지독히도 힘들지 않았는가. 이 ‘힘듦’은 나 자신을 더욱 예민하게, 거칠게 타인을 대하도록 만들었고, 분명 나와 같이 경쟁에 고통받고 있을 상대방을 오직 적으로만 여기게끔 하였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이제 타인을 내 자원을 탐내며 언제든 나를 해칠 수 있는 ‘악당’ 프레임에서 비로소 벗겨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우리’라는 새로운 울타리를 세울 수 있었다. [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가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디 서로가 서로를 위하며 성장했고 진화했기에, ‘다정함’은 우리의 본능이라는 것을. 나는 저자들의 주장에 공감할 수 있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함을.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