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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zqUtxilTl7U?si=Q6wK20wivDzZ8C8f
제55회:남도에서3년•보길도답사기(완도군)
1.일시:'23.7.28.금
2.장소:집(지도읍감정리1648)-땅끝항(해남)-산양항(노화도)-부용동(세연정-전시관)-동천석실-적자봉(곡수당.낙서재)-우리식당-글씐바위-성호해수욕장(해남땅끝)-귀가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의 세상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섬내에 명당자리가 있다 하여 甫吉島라 부른다.
보길도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숨은 진주다.
지형은 산지가 발달하고 사면은 급경사로 섬 중앙에 협소한 저지가 있으니 그곳이 부용동 윤선도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연안에는 도미.삼치.멸치 그리고 전복과 소라를 양식하는 바다의 목장 보길도다.
드높게 솟은 상록수림과 아름다운 바다풍경이 일품인 보길도는 섬전체가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통리해수욕장을 비롯해 세연정과 곡수당, 낙서재, 공룡알 해변은 물론 예송리해수욕장 앞에 펼쳐 있는 섬들은 보기만해도 가슴이 설레는 여행경험을 선사한다.
남도에서 여행 1번지는 강진이고 굳이 2번을 말 한다면 보길도다.
다산 정약용은 강진 유배지에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로 실학을 고산 윤선도는 어부사시사 오우가등으로 송강 정철과 함께 가사문학을 꽃피운 가치를 가진 곳이다.
육지에서 보길도 가는 방법은 해남과 완도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고 가는 두 가지가 있다.
해남에서는 땅끝항에서 노화도 산양항으로 완도에서는 화흥포항에서 노화도 동천항에 가는 배를 타면 된다.
완도에서는 남쪽으로 32km 거리에 07:00시부터 첫 배가 출항하며, 이후 07:50시부터 매 1시간 간격으로 배가 있다. (061-555-1010)
해남에서는 9km 거리에 35분 소요되며 07:00시부터 첫배가 출항하며, 이후 땅끝항 배시간표에는 1시간 간격으로 표시 되어 있으나 이는 선박회사 장보고호와 노화카훼리)두 군데서 운행하므로 실제로는 30분마다 있다. (061-536-5688)
첫배는 보내고 다음배를 타고 가게되었다.
-윤선도-
고산(孤山)윤선도(1587~1671)가 주로 활동했던 17세기는 대내·외적으로 격변기에 해당한다.
사림의 분열로 당쟁이 심했으며,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 등 두 차례의 전란은 당시의 국가체계를 뒤흔들 정도로 심대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의 격렬한 투쟁으로 점철되었던 조선 전기의 정치 판도는, 선조(宣祖) 연간(1567~1608)에 이르러 사림파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후 사림파 세력들은 견해 차이로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되었고,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게 된다.
윤선도 집안의 당파는 동인 계열의 남인에 속했는데, 그 자신이 이러한 정치적 위상에 생애 내내 험한 세월을 살아야 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반대하는 윤선도는 20년을 유배지에서 보냈고, 19년을 초야에 묻혀서 살았다.
강렬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 탓에 4번이나 유배를 당하며 모두 25년이나 귀양살이를 한다
85세 나이로 보길도 부용동 낙서재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유훈에 따라 그가 생전에 점지해 놓았던 전남 해남 구시리 문소동터에 안장(安葬)되었다.
참고로 정약용과의 인연은 외6대손으로 이어진다. 정약용이 18년의 유배기간동안 엄청난 저술을 남겼는데 자료나 정보수집은 결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분량이다. 정약용의 외가인 해남 윤씨의 재력이 뒷받침이 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방증이다.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이 지은 자산어보 역시 해남 윤씨 가문이 경영하고 있던 대규모 도서지역 간척지와 해전사업이 가문 내력으로 전해졌고 그 바탕으로 탄생했을 가능성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
-어부사시사-
그의 나이 65세이던 1651년에는 보길도의 부용동에 거처하면서 「어부사시사」 40수를 창작했으며 어부(漁父)로 살아가는 소탈한 삶에 대한 시다.
어부사시사」는 봄·여름·가을·겨울의 계절별로 10수씩 전체 40수에 사계절의 양상과 자연 인식의 구체적인 면모의 형상화는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각 계절의 특성을 적절히 취해 하루의 일과로 축약하여 이상화된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강호자연에서의 생활에 대한 자족감과 그로 인한 고양된 흥취가 적절히 발현되고 있는데, 바로 이런 면모가 윤선도를 조선시대 시가문학의 정점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만든 요인이라 하겠다.
어부사시사의 작품 세계를 논할 때, 매 작품마다 덧붙은 ‘후렴’과 전체 작품을 종결짓는 역할을 하는 ‘어부사 여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후렴’은 병렬적으로 제시된 계절별 10수씩의 작품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유기적인 성격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어부사 여음’은 「어부사시사」 40수를 통해서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연군의식’을 표출하고 있는 바, 이를 통해 작자가 작품의 주제 의식을 의도적으로 제시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화자는 자연에서의 자족적인 삶에 대해 노래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자신이 떠나 온 정치 현실에의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함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윤선도원림(甫吉島尹善道園林)-〕
윤선도원림은 보길섬 중앙에 협소한 작은 평지에 있는 부용동 마을에 세연정.낙서재.곡수당등의 윤선도 유적지다.
윤선도원림을 부용동원림이라고도 한다.
-부용동(芙蓉洞)-
1636년(인조 14)에 윤선도(尹善道)가 병자호란 때 왕을 모시지 못해 영덕에 귀양갔다가 풀리자 고산은 은둔차 제주로 가다가 이곳 보길도 부용동(芙蓉洞)에 세연지(洗然池)·회수담·옥소대·세연정·호광루·동화각·낙서재·동천석실·승룡대 등을 조성하고 자리잡았다. 수려한 자연경관에 반해 머물게 된 곳이다.
산세가 피어나는 연꽃과 닮았다 하여 부용동이라 이름 짓고25개의 정자와 대를 만들고, 漁父四時詞어부사시사, 오우가, 산중신곡 등 불후의 명작들을 남긴 곳이다.
해남 연동(蓮洞)의 본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이 섬에 별서(別墅:한적하게따로지은 집·별장)를 짓고 여기에 정원을 꾸몄다.
죽을 때까지 일곱 번을 드나들며 글을 쓰며 생활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윤선도원림 매표소를 지나 들어가면 윤선도 전시관이 나온다.
윤선도의 부용동 원림 이야기와 보길도와 윤선도의 인연, 어부사시사 이야기가 전시되어 있으니 즐거운 답사가 된다.
-세연정(洗然亭)-
‘주변 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해변에 바로 인접한 동구(洞口)에 이미 넓다란 담(潭)이 형성되고 있어 깊이가 한길에 이르고 있었는데 이 담가에 정자를 지어 경관을 즐기도록 하였다. 연못은 곡지(曲池)와 방지(方池)로 구성되는데 동구를 흐르는 내를 돌로 된 보(판석보)로 막아 만든 곡지에는 큰바위들을 점점이 노출시켰으며, 방지에는 한 쪽에 네모난 섬을 만들고 그 섬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방지의 동쪽 물가에는 돌로된 네모진 단 두 개(동대와 서대)를 나란히 꾸며놓았는데, 이곳은 무희가 춤을 추고 악사가 풍악을 울리던 자리이다. 방지 남쪽에 나지막한 동산이 있는데 세연정은 이 동산 위에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자연 순화적으로 꾸면 윤선도가 시를 쓰고 술을 마시며 즐기던 호남 3대 정원 중 하나인 곳입니다.
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을 판석으로 만든 보(길이 11m, 너비 2.5m의 돌다리)를 설치하여 둑을 조성하고 자연적으로 수위조절이 되도록 조성한 연못 세연지위에 사방이 트인 정자 세연정를 세웠다.
동대와 서대는 늘 아름다운 기녀들을 놓아 서로 마주보면서 노래에 맞춰 춤을 추게 한 곳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 술 한잔하며 시를 짓던 당시의 모습을 그려보라고 한다.
-적자봉(赤紫峰)-
적자봉은 높이 435m로 보길도의 주봉으로 산 이름은 고산 윤선도가 명명하였다.
원래 이름은 격자봉이었으나 언제부터인가 적자봉으로 변하였다.
해가 수평선으로 가라앉을 때 하늘과 바다가 붉은색·보라색·노란색·주황색으로 물든 무지개빛 노을은 신비로 워서 그렇게 이름 지었나 보다.
산정에서 이 장관을 바라보면 신선이 된 듯한 황홀함을 느낀다고 한다.
이처럼 붉은색과 보라색 등의 찬란한 빛이 황홀경을 되쏘는 봉우리라서 ‘적자봉’이라 한다. 정상에서 제주도, 땅끝, 진도, 거문도, 추자도, 다도해, 남은사, 부용, 부황 마을, 주변의 작은 섬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황칠나무, 붉가시나무, 구실잣밤나무, 후박나무, 가막살나무 등 난대성 수종들이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경치에 남해의 짙푸른 바다가 발아래 조화를 더하니 윤선도는 '선계인가 불계인가 인간이 아니로다.'라고 표현했다.
부용리 곡수당에서 출발하면 약 2시간 정도 소요되며, 중간 중간에 조망할 수 있는 명소들이 있다고 하니 '선계인가 불계인가 인간이 아니로다.' 윤선도의 표현을 실감하고 싶다.
글쎄 그런 날이 올까.
-동천석실(同天石室)-
천하의 명산경승으로 신선이 살고 있는 곳을 '동천복지(洞天福地)라고 한 데서 이름지어진 곳이다.
집은 북쪽을 제외하고 삼면은 문이나 창을 내어 주변의 경관을 음미하기가 좋다.
밖을 보면 동리 입구인 세연정 주변이 내려다보이고, 살림집이 있는 윤선도의 낙서재와 그 아래 곡수당(曲水堂)이 눈에 들어온다. 전경은 마치 산수화 같다
낙서재로부터 정북쪽으로 직선거리 약 1킬로미터 지점 해발 100~120m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을 "부용동(芙蓉洞)제일의 절승(絶勝)"이라 하여 정자를 짓고 부용동 전경을 바라보면서 시가를 읊었다 한다.
동천석실은 주자학에서 신선이 산다는 선계세상으로 부용동을 한눈에 굽어 볼수 있으며 낙서재의 정면에 바라보이는 산자락에 있다. 3,306m²(1,000여평)의 공간에 한칸 정자와 석문, 석담, 석천, 석폭, 석전을 조성하고 차를 마시며 시를 지었던 곳이다. 특히 석담에는 수련을 심고 못을 둘로 나누어 물이 드나들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구멍을 파고 다리를 만들어 '희황교'라 칭하였다. 지금도 석실앞에는 도르래를 걸었다는 용두암과 차를 끓여 마신 차바위가 있다.
다녀오는데 왕복 한시간이 소요되었다 .
입구 시냇가에 있는 사람들은 관광객들 인것 같은데 다슬기를 주우며 피서도 하게 되니 금상첨화다.
징검다리로 놓여진 화강암 하나하나의 크기가 두팔을 벌리는 크기여서 놀랍다. 어디서 어떻게 운반하였을지 의문이다
동천석실은 윤선도원림 여러곳중에서 최고의 걸작이다.
산중턱 협소한 바위에 자리하여 보길도의 유일한 평지에 자리한 부용동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건너 적자봉의 낙서재가 보이고 있으니 최고의 장소에 천혜의 석실이다.
눈에 선하다. 이렇게 강열하게 인상에 남은 곳이 남도에서 있었던가.
이런 감동을 주는 곳이 어디에 또 있을까.
-낙서재(樂書齋)-
낙서재란 독서를 즐기며 학문하는 선비의 삶을 상징한다.
서실(書室)을 갖춘 살림집으로 북향하고 있으며, 옆으로 낭음계(朗吟溪)라는 작은 시내가 흐리고 낭음계 양편에 곡수당(曲水堂)과 무민당(無憫堂)의 두 건물을 지었다.
고산은 격자봉(格紫峯)에 올라가서 주산(主山)의 형국(形局)을 파악하고 그 혈맥(穴脈)이 세차례나 꺽여 내려오는곳에 소은병(小隱屛)병풍바위 아래 낙서재터를 잡았다.
풍수지리에 밝은 고산이 격자봉의 吉地에 낙서재 터를 잡은 것이다. 1671년 돌아가실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뒤편의 큰 바위인 소은병, 달 구경하던 귀암, 서재, 전사청, 무민당 등 25동 건물을 지어 신선처럼 살았다 한다.
소은병은 낙서재터의 뒤에있는 2.5m 높이의 병풍바위이다. 소은(小隱)은 세속을 싫어하여 은둔해 있다는 뜻이며 은병청풍(隱屛淸風)이라는 부용동팔경이 있다.
낙서재 앞뜰에 있었다는 바위가 귀암이다. 2.8m의 거북바위라고도 한다. 고산은 4령(봉황 기린 용 거북)이라고 하고 저녁이면 귀암에 앉아 보름달을 즐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곡수당(曲水堂)과 무민당(無憫堂)-
건물의 곁에 넓고 네모진 연못이 있다.
곡수당은 격자봉에서 흐른 물이 이곳에 이르러 곡수를 이룬다 하여 붙인 이름으로 윤선도의 아들 학관이 휴식하던 장소였다.
낙서재와 함께 무민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상연지는 높이가 한 길 정도 되는 방대 위에 가산을 만들고 허리 부분에 구멍 하나를 뚫어 돌로 된 통을 끼워 뒤에서 끌어온 물이 구멍을 통해 연못으로 쏟아지게 했다.
특이한 구조로 과학적이다.
-글씐바위-
선조~숙종조의 대유학자인 우암이 숙종 때 왕세자 책봉 반대 상소를 올려 83세로 제주도로 귀양 가던 중 경치 좋은 이곳에서 잠시 쉬며 임금에 대한 서운함과 그리움을 시로 길도의 동쪽 끝자락 백도리의 해안 절벽에 새기어 놓았으니 바위송시열 글씐바위라 한다.
윤선도가 풍랑으로 잠시 머무르다 보길도의 모습에 매료되어 세연정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은 반면, 역시 제주도 유배길에 이곳에 들른 송시열은 해안 절벽에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싯구를 남겼다.
그 시대에 우암 송시열은 서인, 윤선도는 남인을 대표하며 조선 중기 치열한 당쟁의 격론 속에서 송시열의 탄핵으로 윤선도가 유배를 떠났을 정도로 화합할 수 없는 정적이었다. 동 시대를 살며 송시열은 예송논쟁(禮訟論爭)에서 윤선도와 늘 적대관계였다.
대단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던 도중 사약을 받고(정읍) 생을 마감한 송시열이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것이었을까.
바위에 새겨진 싯구는 탁본 등으로 훼손되어 착잡함을 더하지만 바다 건너 소안도를 눈앞으로 두는 경관은 너무도 아름다운 남해의 풍경이다.
『청산(靑山)도 절로 절로 녹수(綠水)도 절로 절로
산 절로 수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그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 하리라
늙고 병든 몸이 북향(北向)하여 우니노라
님 향하는 마음을 뉘 아니 두리마는
달밝고 밤 긴 적이면 나뿐인가 하노라』
『임이 헤오시매 나는 전혀 믿었더니
날 사랑하던 정을 뉘 손에 옮기신고
처음에 뮈시던 것이면 이대도록 설우랴
팔십세 늙은 몸이 거치른 만리길을 가노라.
한마디 말이 어찌 큰 죄가 되어 세 번이나 쫓겨나니 신세만 궁하구나.
초구(임금이 하사한 옷)에는 옛은혜 서려 있어 감격하여 외로이 눈물 흘리네』
보길도는 지도에서 보듯 남쪽에서는 길이 연결되지 않아 서쪽의 공룡알 해변에 갔다가 이웃한 예송리해수욕장에 가려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
여행사이트 추천코스는 세연정-동천석실-낙서재곡수당-망끝전망대-공룡알해변-송시열암각시문-예송리갯돌해수욕장-선양항 순으로 하고있으며 적자봉을 오르겠다면 하루를 숙박해야 한다.
세번째 보길도 방문에도 불구하고 또 숙제를 남기게 된다.
동경과 그리움인가 욕심도 있는가 보길도 숙제를 인생 숙제라고 생각하고 싶다.
갑판에서 불어오는 여름바람이 얼마나 시원하는지 아시겠는가?
목마르고 배고프니 선실에서 간식은 꿀맛이다.
40여분 동안 배타고 가면 시간이 왜 이리도 빠르게 가는지 모르다.
동천석실 아래를 바라보니 부용동 마을은 무릉도원이라고 생각되었다.
황칠나무 아주머니 투박한 사투리도 순박한 모습도 보길도의 향수가 되어 오래 남을 것 같다.
선상에서 보여주는 땅끝 전망대가 서서히 커지고 있으니 사람들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해남 땅끝항에 도착한다.
빨간 아취형 보길대교가 사랑스러 웠습니다.
남도 밥상은 항상 즐거운 시간입니다. 보길대교 옆 우리식당에서 도가니탕도 그랬습니다.
여름휴가를 해남땅끝 송호해변으로 4년째 찾아온다는 최학식 사위와 민어회식으로 하룻밤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 상경하여서도 민어회 맛을 보기로 하여 자리를 가지자고 약속도 합니다.
4월에 1차로 2박3일을 여행하고 이번에 2차로 4박5일 남도 여행 함께한 강서이순테니스회 이상무국장님(전S신문사)과 최학식고문님(신협창단12인)은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들입니다.
유배문화가 꽃핀 남도의 유적답사를 사랑한다고요ᆢ^^
긴 장마동안 비워둔 집이 곰팡이가 끼어 대광해수욕장 유랜드 모텔에서 지내게 되어 미안한 마음입니다.
남도여행 모두가 그리운 추억으로 남게 되었으나 이번 여행에서는 보길도 답사가 특히 인상에 남는다고 합니다.
바닷가 산골짜기 열악하고 누추한 곳에서 8윌25일이면 3년차가 끝나는 날입니다.
세월이 흐르다보니 애증과 함께 정든 곳이 되었습니다.
폭염에 대광해수욕장에서 20여일 야영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바다는 시원한 바람이 불고 짠 바다 물속을 들어가노라면 시원하고 좋아요. 그런데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귀경하는 날부터 시원한 빗줄기가 반갑습니다.
2023.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