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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씬 레드 라인 ]
1999년 2월 개봉한 테렌스 맬릭 감독의 영화 <씬 레드라인>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에 있는 작은 섬 과달카날에서 벌어진 치열하고 참혹한 전투를 다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철학적인 사색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인간의 구원에 관해 묻습니다.
<씬 레드라인>은 유독 내레이션이 많은 영화로, 자연 풍광을 담은 화면과 함께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하고 끝납니다. 이 영화의 내레이션은 여러 인물의 내면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씬 레드라인>은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고 더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자주 비교됩니다. 두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의 손꼽히는 전투를 다뤘다는 점은 같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전쟁의 참혹함을 시각적으로 잘 표현했다면 <씬 레드라인>은 전쟁 속 사람들의 내면을 잘 묘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임스 존스가 쓴 1962년 작 동명의 전쟁 소설이 원작입니다. 존스는 실제 과달카날 전투 참전자였습니다. 이 소설은 1942년의 과달카날 전투 당시 해병대를 대신해 상륙한 미국 제25 보병사단 병사들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제목의 의미는 위와 같이 적의 포화에 맞서 위치를 사수하는 앏은 방어선을 일컫는 말이자, 내러티브의 바탕이 되는, 과달카날에 있었던 실제 작전명입니다.
한편으로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The border between the sane and the mad")라는 미국 중서부의 속담이기도 합니다.
또 이 가느다란 붉은 선은 이성과 광기의 경계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영화는 출연진이 쟁쟁합니다, 숀 펜, 짐 커비즐, 에이드리언 브로디, 존 쿠삭, 우디 해럴슨, 닉 놀티 등 유명한 배우들이 여럿 출연합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사실은 조지 클루니와 존 트라볼타가 단역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같은 시기에 개봉해서 흥행에 실패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제작비 5200만 달러에 미국 흥행 3640만 달러, 해외흥행 6172만 달러, 다 합치면 9800만 달러이니 제작비를 뽑았다고 하겠지만 해외배급 홍보비 및 세금, 인건비 관련을 따지자면 극장 수익은 거의 없다고 봐야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라이언 일병 구하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의 관심이 높아서 다른 맬릭 영화치고는 비교적 흥행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더 명작인지 <씬 레드 라인>이 더 명작인지는 평론가 사이에서도 큰 논쟁거리입니다.
사실 두 영화는 비교 자체가 어려운 게,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한 편의 소설이라면 <씬 레드 라인>은 한편의 서정시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다.과달카날 전투를 다루고 있으나 과달카날 섬에서 찍은 장면은 하나도 없습니다.
당시 과달카날 섬이 말라리아 위험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장면을 오스트레일리아의 퀸즐랜드 북부에서 찍었으며 일부 장면은 솔로몬 제도와 미국에서 찍었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원주민들은 멜라네시아인들입니다. 과달카날 섬이 속한 솔로몬 제도는 멜라네시아 지역에 포함됩니다.
[ 간략한 줄거리 ]
1942년 태평양의 격전지 과달카날 섬, 일본군은 남태평양 공격선을 구축해 호주를 점령한 후 미국 본토까지 침공하기 위해 과달카날 섬에 비행장을 건설하는 등 침략의 기세를 높이고, 이에 위협을 느낀 미국은 해병대를 보내 과달카날 탈환 작전에 나서나 상황은 좀처럼 호전되지 않습니다.
미국은 사기가 떨어진 해병대 병력을 지원하기 위해 육군을 과달카날 섬에 상륙시키기로 결정하고, 불안과 공포 속에 과달카날 섬에 도착한 육군 지원 부대는 일본군의 별다른 저항 없이 섬에 상륙합니다.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섬의 210고지 탈환 작전을 지휘하고 있는 고든 중령은 고지의 정상에 벙커를 구축하고 있는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중대별로 정면 돌파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 명령으로 아군 병력은 엄청난 피해를 당하지만 고든 대령은 계속 무리한 공격만을 강요합니다.
많은 희생을 치른 과달카날 전투로 인해 미군과 연합군은 남태평양 전선에서 전세를 뒤집는 유리한 위치를 점령하지만, 정작 전투에 참여한 군인들은 동료 대원들의 보상 없는 죽음, 개인적으로 느끼는 피폐함 등으로 절망감을 느낍니다.
미군은 일본군이 과달카날 섬에 비행장을 건설한다는 소식을 듣고 대규모 병력을 급파합니다. 과달카날은 작은 섬이지만 호주와 미국 본토까지 공격할 수 있는 전략상 요충지이므로 절대 뺏길 수 없는 지역입니다. 미군의 예상과 달리 섬에 상륙한 해병대는 고전하다 거의 전멸할 지경에 이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고지 아래에 접근한 선발대는 일본군 포의 정확한 좌표를 파악합니다. 일본군 포를 요격한 중대는 사기충천하여 고지에 오르고 백병전을 벌여 완전한 승리를 거둡니다.승전보를 접한 사단에서는 특별 보급품을 보내고 병사들에게 포상휴가를 줍니다. 병사들은 잠시 승리의 기쁨을 누리지만 새로 부임한 중대장은 전투력을 강조하며 대원들을 독려하고 전투는 다시 시작됩니다.
* 주인공 위트
[ 파멸(일본)의 서곡, 과달카날 전투 ]
호주 북쪽에 그린랜드 섬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섬 파푸아뉴기니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뉴기니 섬은 마치 거북이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기어가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꼬리 쪽에 제법 큰 뉴브리튼 섬이 있고 이 섬 동쪽에 솔로몬 제도가 있습니다.
* 일본군의 태평양전쟁 최대 진출도, 오른편 아래 솔로몬 군도와 과달카날이 보입니다
수백 개의 섬으로 연결된 솔로몬 제도는 서북 방향에서 남동쪽으로 1500㎞에 걸쳐 뻗어 있습니다. 이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이 부겐빌 섬이고 두 번째 큰 섬이 과달카날 섬입니다.1942년 초 일본군은 뉴브리튼 섬의 라바울 항(호주 군사기지)을 점령, 그곳에 공군기지를 건설했습니다.
2월에는 라바울 기지에서 이륙한 일본 공군 폭격기가 뉴기니 해군기지 포트 모레스비를 폭격했고 3월에는 뉴기니의 꼬리 북단을 점령했습니다. 1942년 6월. 과달카날 섬을 점령한 일본이 이곳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미군이 눈치채면서 문제가 달라지게 됩니다.
이 섬에 비행장이 건설된다는 것은, 곧 호주가 일본군의 공습거리 내에 들어옴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당시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일본군을 감안했을 때 호주를 일본군이 점령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죠. 이 당시의 일본군은 사실상 무서울 것이 없었으니 그 걱정이 과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이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생각한 미국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과달카날전투가 시작 됩니다. 당시 일본군은 솔로몬제도의 과달카날 섬에 비행장 건설을 시작했는데, 이는 미국-호주간 항로를 위협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항로의 위협뿐 아니라, 호주본토를 침공할 수 있는 비수와도 같은 기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 과달카날 섬, 위 플로리다 섬 바로 아래 툴라기 섬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미드웨이 전투 이후 태평양 전선에서 소규모 반격을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일본군이 위와같이 툴라기 섬을 점령하고 주변의 큰 섬인 과달카날 북부에 비행장을 건설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반격을 서둘렀습니다.
연합군과 일본군의 승패가 뉴기니에 달려있는 만큼 미국은 작전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훈련된 병력과 보급 역량, 항공전력 가운데 어느 것도 충분하지 않았지만, 루스벨트 대통령과 마셜 원수는 과달카날의 일본군이 증강되어 대규모 전력을 동원해도 감당할 수 없게 되기 전에 공격을 감행하자는데 동의했습니다. 그 뒤에 이어진 전투는 그동안 양측의 균형이 얼마나 아슬아슬하게 맞춰졌는지를 보여줍니다.
8월 7일에 미 해병 제1사단이 태평양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툴라기와 주변의 작은 섬들, 그리고 과달카날 북쪽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툴라기와 그 주변의 싸움은 현지 일본군의 전멸로 끝났지만, 과달카날 전투는 양측의 예측과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일본군은 툴라기에서 그랬듯이 완전히 기습당했으며 몇 주일 동안 미군의 규모도, 과달카날 사수 의도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미군 역시 현지의 지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고 일본이 앞으로 얼마나 이곳의 탈환을 원하는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상황이 상륙한 미군에 불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일본군의 반격으로 미국 항모들이 철수했고 상륙한 해병대는 항공 엄호도 받지 못했습니다. 미 해군은 미드웨이에서 목숨을 잃은 헨더슨 소령의 이름을 딴 헨더슨 비행장이라고 이름을 붙인 과달카날의 비행장을 당장 완성하지 않는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 일본군 시체
헨더슨 비행장은 일본의 예상대로 미군 작전의 핵심기지가 되었으며 일본군은 이곳을 작전 거점으로 삼은 미 해병 항공대를 상대로 몇 개월에 걸쳐 탈환을 시도했습니다. 상륙한 미군에 닥친 또 다른 재앙은 아직 하역하지 못한 보급물자와 일부 해병대 병력을 실은 수송선들이 철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8월 8~9일 밤에는 5척의 중순양함과 한 척의 호주 순양함을 격침시켰습니다. 미 해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인 이 전투로 수송선들까지 무방비로 노출되었지만, 일본 측 함대 사령관인 미카와 제독은 다른 미 해군 함선들의 위치를 모르는 상황에서 모험을 감행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냥 철수해 버렸습니다.
* 일본군의 첫번째 공격, 이치기 연대원들의 시체들
미 해병대는 고립되었지만, 곧 수송선들이 조금씩 물자와 병력을 이송했고 헨더슨 비행장으로도 호송선단을 통하여 항공기들이 운반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군도 8월 17일부터 과달카날 섬에 남아있는 소수의 지상군 병력에게 증원 병력을 찔끔찔끔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병력과 물자를 과달카날로 계속 투입하며 헨더슨 비행장에도 공습과 함포사격을 계속했습니다. 일본 육군도 미 해병대를 향하여 몇 차례나 반자이를 외치며 무모한 돌격을 시도했습니다. 지상전에서 미 해병대는 최악의 환경에서도 일본군과 싸우는 방법을 배우며 전황을 점점 유리하게 이끌었으며 이후 점차 육군 병력으로 대체되었습니다.
* 일본군 수송선 잔해
바로 이 대체된 육군이 일본군과 전투하는 얘기를 영화 <씬 레드라인>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10월에 이르면 상황을 심각하다고 판단한 미군이 추가로 항공기와 물자를 보내면서 그 이후의 전황은 의심의 여지없이 미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갔습니다.
6개월에 걸친 과달카날 전투 기간 동안 주변 해역에서도 몇 차례의 해전이 있었습니다. 수송선단을 호위하는 미국과 일본 해군 함대는 종종 충동했으나 미군은 일본의 통신 암호를 해독했고 호주 장교들이 지휘 하에 솔로몬 제도에 거주하는 민간인들로 구성된 연안 감시단의 보고까지 받은 덕분에 일본군의 접근을 미리 알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지상군 증원 병력을 태운 일본 전투함들-주로 구축함들-도 잠수함이나 항공기, 미 해군 함정들로부터 꾸준히 공격을 받았습니다. 먼저 일본, 그리고 미국이 항모를 한 척씩 잃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또 한 척의 항모를 잃었으며 일본 역시 두 척의 항모에 큰 손상을 입었습니다.
마지막으로 11월 중순 며칠에 걸쳐 전개된 해전에서 일본은 두 척의 전함을 상실했습니다. 이 지역에서 진행된 해전들에서 양측은 여러 척의 순양함과 구축함도 잃었습니다. 일본은 전투 초반에는 야간전에서 우위를 보였지만, 곧 야간전에서도 상당한 손실을 입게 되었습니다.
10월~11월 동안 진행된 이 해상 소모전에서 미 해군은 결국 승리를 거두었으며 지상의 전황도 계속 일본에 불리해져 갔습니다. 함포가 날아드는 지상전이 몇 차례나 거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지의 미 해병대는 굳건히 버텼습니다. 반면 일본 해군은 거듭되는 함정 손실을 감수하고 전투를 계속해야 하는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육군과 해군의 항공기 손실도 보충하기 힘든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1942년 12월 끝 무렵에 일본군 최고사령부는 과달카날에 남은 육군 병력을 철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일본은 새로운 공세를 벌이기 위해 증원병력을 파견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투입된 병력 4만 명 중 1만 명의 잔존 병력을 빼내는 데 성공하면서 과달카날 전투는 종료합니다.
이 전투는 생존자들에게 긴 악몽처럼 기억됩니다. 미 해병 1사단이 전투에 복귀하기까지 1년에 걸친 휴식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전쟁 전체로 보면 그 여파는 컸습니다. 미국은 뉴기니에서 그랬듯이 일본군이 용맹하지만 무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충분한 전력과 유능한 지휘관이 결합하면 한때 무적으로 여겨지던 일본 해군과 육군도 막아내고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도 컸습니다. 일본과의 싸움은 길고 힘들 것이 분명했습니다. 일본 역시 새로 점령한 지역을 계획처럼 쉽게 방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름조차 생소한 태평양의 섬들을 탈환하고 타국에 돌려주기 위해 미국이 희생을 감수할 리 없다는 기본 전제가 잘못되었다는 사실도 분명해졌습니다. 하여튼 이번 전투를 통하여 도꾜의 일본 수뇌부는 최악의 전략적 사고를 보여주었습니다.
* 과달카날 전투의 평가
연합군에게 과달카날 전투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전쟁의 이니셔티브를 거머쥐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과달카날 섬을 잃은 뒤에 일본은 감히 태평양 어디서도 공격을 꿈꾸어보지를 못했습니다.
이후의 전략은 방어에 급급하기에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에게 과달카날은 전력, 또는 국력을 갉아먹은 거대한 블랙홀과 같았습니다. 선박이나 항공기의 손실만 해도 거대했습니다. 6개월의 전투에서 전사한 장병만 25,000명이었습니다.
* 세월이 흘러...일본군 잔해
과달카날의 전략적 큰 의미는 일본 군부가 유한한 국력에도 불구하고 무한하게 전선을 확대한 팽창주의의 풍선이 터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일본 해군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훌륭한 인품과 리더십으로 부하들에게 존경받는 지휘관이었지만 국력에 어울리지 않게 엄청나게 전선을 확대한 전략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비판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그를 변호하는 측은 야마모토가 전쟁의 신속한 종결을 위해 적 함대와 결전이 필수적이며 이런 전선 확대는 그런 계기를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이라고 했지만 호주 점령같은 발상은 근본적으로 일본의 국력에 무지했었기 때문에 나온 소리였습니다.
과달카날 전장으로 시야를 좁혀서 본다면 미군의 막대한 물량공세에 대책이 없었던 일본의 형편이 전쟁의 패배를 예견한 것이 되었습니다. 풍부한 전쟁 물자 동원의 능력이 있었고 보급에 지장이 없었던 미국에 비해 보급에서도 미군의 방해로 막대한 어려움을 겪은 일본은 너무나 대조적인 것이었습니다.
[ 전쟁의 조력자, 호주의 연안 감시대 ]
지구의 다섯 번째 대륙인 호주는 면적이 미합중국보다 약간 작은, 아주 거대한 나라입니다. 해안선의 길이만 해도 5천 킬로가 넘고 그에 비해 당시 인구수는 2천만 명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요컨대 호주는 인구에 비해 지켜야 할 땅과 바다의 크기가 너무도 넓었습니다.
제한된 호주의 국방예산과 병력과 장비로는 이 거대한 영토를 온전히 지켜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대신 호주가 대안으로 세운 것은 바로 조기감시체제의 확립이었습니다.
호주는 1차 대전 당시부터 해당 지역에서 오래 거주한 다양한 계층의 인력을 동원해 전체 해안선은 물론 본토너머의 솔로몬 뉴기니 일대에까지 촘촘한 정보감시망을 구축했습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호주 북부의 다윈까지 위협할 정도로 압도적이었지만 일본군의 배후에 도사린 채 일본군의 움직임을 상세히 감지해 본국으로 송신하는 이 연안감시대원들 때문에 번번이 작전마다 낭패를 보기 일쑤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전체 태평양전선의 향배를 갈랐다는 과달카날 전투인데, 당시만 해도 무적을 자랑하던 라바울의 일본해군 항공대는 출격 즉시 솔로몬 제도 곳곳에 있던 호주연안감시대의 관측에 걸려 단 한 번도 과달카날 미군을 기습하지 못했습니다.
일본 항공대는 항로를 이리저리 바꾸었지만 그때마다 호주 연안감시대는 일본 항공기들의 움직임을 낱낱이 미군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감시 대원들은 적기의 공격루트 파악은 물론 일본함대의 움직임과 섬에 상륙한 일본육군의 동향도 수십년에 걸쳐 구축한 광대한 지역 정보망과 연락망을 활용해 연합군에게 제공했습니다.
결국 연안감시대 정보의 도움이 미군의 과달카날 승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미군의 전투기록에서도 분명히 명시되어 있을 정도였습니다. 뒤늦게 이를 알아챈 일본군은 솔로몬 제도의 곳곳을 뒤져 이들 연안감시대를 찾아내려 했지만 해당지역에서 수십 년을 거주해 자기집 안방과도 같았던 이들 호주 연안감시대를 색출하는 일은 수풀 속에서 바늘 찾기에 가까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연안감시대원들은 오래전부터 해당지역에서 생업을 유지해왔던 터라 현지인들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 결과 다수의 원주민 첩보원들과 우호적인 조력자들을 곁에 두고 있었습니다.
* 연안감시대의 무전기
이들을 통해 얻은 생생한 일본군의 일거수일투족이 매일 브리스베인의 맥아더 대장과 하와이의 니미츠 제독에게 전달되고 있었으니, 태평양전쟁 초반 열세의 무기와 장비와 병력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이 소신 있는 선택과 집중을 통한 전세의 역전과 반격의 배경에는 호주 연안감시대라는 확실한 센서와 정보감시망이 있었기에 가능한 성과였습니다.
연안 감시대원들은 원래 무역상, 농장주, 탐광자(探鑛者), 공무원 같은 직업인들이었습니다.그들은 뉴기니에서 뉴헤브리디스 제도에 걸친 약 4,000km에 이르는 초승달형 해역에서 일본의 육,해군의 행동을 감시하여 수집한 정보를 연합군 사령부에 송신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솔로몬제도의 부갠빌도에 있던 잭 리드라는 감시원이 타전한 통보에 의해 방어에 임하고 있던 미군 전투기들이 과달카날에 날아온 일본 비행기를 44대 가운데 36대까지 격추하기도 했습니다.
정보수집 뿐만 아니라 감시대원들은 격추된 연합군 비행기의 조종사나 격침된 함정의 생존병을 수백명이나 구출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존 F. 케네디 중위를 정장으로 하는 어뢰정의 승무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 보우자
이 정찰망의 큰 성과는 많은 현지주민의 선의와 때로는 그 놀라운 용기에 힘입은 바가 컸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정찰원, 길안내역, 인부, 혹은 스파이로서 연합군에 협력하기도 했습니다. 정찰원의 한사람인 자코브 보우자는 1942년 과달카날에서 정찰행동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일본군 정찰대에게 붙잡혔습니다.
일본군은 그가 미군 해병대원에게서 받은 작은 성조기를 갖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보우자가 일본군의 심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하자 일본군은 그를 나무에 붙들어 매고 총대로 마구 때렸습니다. 그래도 입을 열지 않자 일본군은 총검으로 그의 가슴을 다섯 번이나 찌르고 칼로 그의 목을 쳤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보우자는 포승줄을 이빨로 끊고 5km나 되는 길을 기어서 해병대진지까지 찾아갔습니다. 그 진지에서 다량의 출혈 때문에 졸도할 때까지 그는 과달카날에 있는 일본군 병력에 관한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연안감시대가 과달카날을 구했다”라고 남태평양 관구 사령관 할제이 제독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과달카날이 태평양을 구했다.”
* 일본군 목을 들고있는 원주민 병사
* 연안 감시대의 나날들
해안이나 산등성이, 산꼭대기 등의 빈틈없이 위장된 지점에서 연안감시대는 일본군의 움직임을 포착하려고 수평선을 감시하며 긴장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통보할 만한 정보가 있을 때 그들은 무선으로 그것을 보냈습니다. 연합군 사령부는 이런 정보를 수신받고 수분 이내에 태평양 전역에 통보하였습니다.
일본군은 하늘에서 감시대의 은신처를 거의 발견할 수는 없었으나 감시대의 신호를 포착하여 발신원을 탐지하기 위해 무선방향탐지기를 사용했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군 정찰대는 감시대가 활약하고 있는 섬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현지주민의 통보에 의해 일본군의 접근을 알게 되면 감시대원들은 도보나 배로 보급물자가 숨겨져 있는 오지로 도망치곤 했습니다. 과달카날의 어떤 대피지점에는 식량 110상자, 쌀 23부대, 등유, 220통 외에 50상자의 위스키까지 숨겨져 있었습니다.
감시대의 은신처는 대개는 풀로 이은 오두막집이었는데 물자의 보급은 공중투하나 또는 가끔은 잠수함에 의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중투하는 그때마다 사전에 협의를 할 수가 없어서 부정확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연안감시대원들의 살아남기 위한 절대조건은 비밀의 유지였으나 그들은 때로는 목숨을 걸고 위험한 지역에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격추된 비행기의 조종사나 군함의 침몰당한 승무원들을 해상에서 구출했습니다.
[ PT109와 케네디 대통령 ]
2차대전 당시 26살이었던 케네디 중위는 1943년 초 솔로몬 군도에 도착하여 툴라기 기지에서 어뢰정 PT109의 지휘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 해 여름에 렌도바 섬의 새로운 어뢰정 기지로 이동하게 됩니다. 8월 1일 미군 정보망에 의해 일본군 구축함 서너 척이 콜롬방가라 섬에 있는 일본군 기지로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PT109를 포함한 15척의 어뢰정 편대가 출동 명령을 받게 됩니다.
* 케네디 중위
1943년 8월 2일 밤, 솔로몬 제도 난바다의 블라케트 해협을 14척의 어뢰정과 함께 초계중이던 케네디 중위의 어뢰정 PT109호는 일본 해군의 구축함 아마기리호와 충동을 합니다.
구축함이 어뢰정을 두동강 나게 했을 때 케네디 중위는 조종석의 벽에 부딪쳤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해서 죽는 것인가"하고 순간적으로 생각했다고 나중에 술회합니다.
* PT109 승무원들, 맨 오른편이 케네디 정장
연료 탱크에 불이 붙어 불길에 싸인 어뢰정은 침몰했습니다. 13명의 승무원 중 2명이 전사하고 1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생존자들은 안전지대로 헤엄쳐 탈출하려고 했습니다. 케네디는 화상을 입은 승무원 맥마혼 수병의 구명조끼 끈을 이빨로 물고 헤엄을 치면서 그를 끌고 갔습니다.
다리에 부상을 입은 맥마혼은 이제는 더 이상 헤엄칠 수 없다고 말했을 때 케네디는 고함을 쳤습니다. "보스턴의 사내가 이런 곳에서 정말 챙피한 소리를 하는구나. 너는!" 맥마혼은 끝내 견뎌냈습니다.
4시간 후 11명의 승무원들은 플럼푸딩 섬에 당도했습니다. 그들에게 다행스러웠던 것은 가까운 콜롬방가라도에 있던 호주군 연안감시대원인 레지넌드 에번즈 중위가 어뢰정이 격침된 날 밤 해협에 불길이 오르는 것을 보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가까운 섬의 감시대원에게 무선으로 연락한 결과 어뢰정 109호가 행방불명임을 알게되었습니다. 그의 부하인 두 사람의 척후가 섬에 헤엄쳐 온 생존자들을 발견했고, 그들을 구조하기 위해 어뢰정이 보내졌습니다.
* PT109 사고지역
구원의 어뢰정 157호가 나타나 6일동안 죽음의 고통을 맛본 승무원들을 태우고 무사히 렌도바 기지에 귀환했습니다. 그 뒤 1960년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출마한 케네디는 솔로몬 군도에서의 경험을 선거 유세 기간 동안 가는 곳마다 이야기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일본 구축함 아마기리의 함장이었던 하나미 고헤이는 케네디 후보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당시 PT109와 충돌한 구축함의 함장이었음을 알립니다. 아울러 케네디의 용감성을 칭찬하며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습니다. 케네디가 이 편지를 들고 다니면서 선거기간 동안 십분 활용했음은 두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 영화 <PT109>에서...
[ 설리반 5형제의 몰살 ]
12월 7일을 기억하라! 이 날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일입니다. 미국인들은 이 구호를 부르짖으며 태평양 전쟁을 수행하면서 전의를 불태워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미국인들 속에 아이오와주 워털루 출신의 설리반 5형제도 있었습니다.
설리번 형제들에게 진주만 습격은 더욱 충격적인 일이었는데 이들의 유일한 누이, 제느비에브의 약혼자 윌리엄 볼이 진주만에서 침몰한 전함 아이오와에 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해군에서 복무한 전력이 있는 맏형 조지(28), 차남 프랭크(26)와 삼남 조셉(23), 사남 매디슨(22), 그리고 막내인 알버트(20)까지 모두 해군에 자원 입대를 신청합니다. 그런데 당시 미 해군 규정에는 가족은 같은 함정에 배치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맏형 조지는 해군 장관 앞으로 편지를 씁니다. "우리 형제는 언제나 함께였었고 함께 승리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설리번 5형제는 같이 근무한다는 조건으로 해군에 지원하게 됩니다. 편지를 받은 워싱턴의 해군성에서는 설리번 형제의 동반 입대가 멋진 선전 효과를 거둘 수 있겠다고 판단, 이를 허락 합니다. "다섯 형제도 함께 입대했으니 여러분도 겁내지 말고 입대하라"는 메시지였겠죠.
이듬해인 1942년 1월 해군 훈련소에 같이 입대한 설리번 5형제는 훈련을 마치고 새로 취역한 경순양함 주노에 함께 배치됩니다. 700여 명의 주노 승조원들 가운데는 설리번 형제를 비롯하여 코네티켓에서 온 로저 4형제 등 모두 7쌍의 형제들이 있었지요.
실전을 대비한 훈련을 마치고 남태평양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주노는 1942년 9월 미군의 대반격이 시작되던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두 달 후 설리번 형제는 그들의 마지막 전투를 치르게 되는데 이 해전은 앞으로 몇 달을 끌게 될 과달카날 전투의 첫번째 교전이었습니다.
11월 13일 새벽, 미일 양국 해군의 수많은 함정들이 침몰해서 훗날 '철선들의 바닥'(아이언 바텀)이라고 이름 붙여진 해역에서 교전이 벌어집니다. 칠흑 같은 어둠속 적과 아군의 식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의 치열한 혼전이었습니다.
겨우 30분간 벌어진 이 전투에서 미 해군 7척, 일본 해군에서 5척의 전투함이 침몰하고 쌍방 1,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전투 시작 10분 만에 주노의 뱃머리에 일본 구축함이 발사한 어뢰가 명중합니다. 수병 17명이 즉사했고 전투력을 잃은 주노는 전열을 이탈, 수리를 위해 에스피리토 산토로 뱃머리를 돌립니다. 생존자 증언에 의하면 설리번 5형제는 맏형 조지가 등을 다친 것 이외에 이 최초의 폭발에서는 목숨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전 11시, 일본 잠수함 이-16함이 발사한 어뢰가 느릿느릿 함대의 끝을 따르던 주노의 탄약고에 명중, 주노는 대폭발을 일으킵니다. 40톤이 넘는 주노의 포탑이 1킬로미터가 넘게 날아갈 정도의 엄청난 폭발이었죠.
* 주노
승조원 중 600여명이 침몰한 주노와 함께 바닷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리고 시꺼먼 중유와 불길로 뒤덮인 바다 위는 수십명의 부상자들이 질러대는 고함과 비명으로 아비규환을 이뤘습니다.
대폭발을 일으킨 주노는 바로 바닷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부상자 중에는 설리번 5형제의 맏형인 조지도 있었습니다. 조지는 물위에 떠 있는 생존자들의 얼굴에 기름을 닦아내고 혹시 동생들이 아닐지 헤엄쳐 다녔습니다. "프랭크? 조셉? 매트? 알?" 조지는 동생들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불렀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함대를 이끌던 길버트 후버 중령은 일본 잠수함의 위협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주노의 생존자들을 구조하는 것은 또 다른 손실을 불러 오리라 판단하고 매정하게도 휘하 전 함정에게 에스피리토 산토로 직행할 것을 명령 합니다.
후버 중령의 이러한 명령은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됩니다. 바닷물 속에서 허우적대며 멀어져 가는 아군 함정들을 망연자실 바라보아야 했던 생존자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응급처치를 받지 못한 중상자들은 곧 숨을 거두었고, 온 몸에 검은 중유를 뒤집어 쓴 생존자들에게 남태평양의 작렬하는 태양이 쏟아졌습니다.
물도 식량도 없는 상태에서 탈진한 생존자들은 하나 둘 물속으로 사라져 갔지요. 이내 피냄새를 맡은 상어떼가 몰려 들어 이 곳은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나흘째 되던 날, 심한 부상을 당한데다 동생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조지 설리반은 정신 이상을 일으킵니다.
그는 간신히 올라 앉아 있던 구명보트 위에서 목욕을 하겠다며 옷을 벗고 상어떼가 득실 거리는 바다로 뛰어 들었고 곧 그의 모습은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주노의 침몰에서 살아남았던 생존자들 중 구조된 숫자는 10여명, 이들이 구조되기까지 일주일의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그리고 설리번 형제들의 남은 가족들에겐 비극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 영화에서...
다섯 형제가 남태평양에서 목숨을 잃은 지 두 달이 넘었지만 정작 고향의 부모들에겐 아무런 통보도 없었습니다. 이듬해 43년 1월 설리번 부부는 다섯 아들의 운명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것도 해군성의 공식적인 통보가 아니라 마을에 떠돌던 흉흉한 소문 때문이었죠. 걱정이 된 어머니는 해군 장관 앞으로 편지를 씁니다. “귀찮게 해드려 죄송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너무 걱정이 되는군요. 소식을 알고 싶으니 제발 사실을 알려 주세요”
해군성에서 돌아 온 답신은 설리번 형제가 ‘작전 중 실종’ 되었다는 간단한 내용이었을 뿐, 주노함의 침몰에 대해선 함구했습니다. 과달카날에서 벌어진 전투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 해군의 손실이 일본 측에 알려질 경우 전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그해 8월이 되어서야 미 해군은 공식적으로 주노함의 침몰 사실을 인정하고 사상자 수를 발표했습니다. 설리번 형제가 목숨을 잃은 지 9개월 만이었죠. 루즈벨트 대통령이 편지를 보내 부부를 위로했습니다.
“미국 대통령으로써 저는 모든 미국인이 슬픔을 함께 하고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드님은 우리가 한 팀이 되어 싸우면 절대 패배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정신이 최후의 승리를 가져다 줄 것으로 믿습니다”
* 설리반 5형제의 부모
설리번 형제들의 죽음은 미국인들이 전쟁의 실상을 직시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로 승리에는 그 만한 댓가가 따른다는 것이죠. 설리번 형제의 고향집에 몰려 온 기자들이 이 가족의 비극을 전하자 사람들은 전쟁이 바로 자신들의 형제나 남편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지요.
해군의 요청으로 설리번 가족들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전시 공채를 팔고, 군에 입대하라고 청년들을 격려했으며 군수산업 노동자들이 무기를 더 빨리 만들 수 있도록 독려했습니다. “미국, 영국, 러시아 그리고 연합국의 어머니들이여. 용기를 잃지 마세요. 우리 아이들은 헛되이 죽지 않았습니다”
설리번 부부의 마지막 남은 자식이자 유일한 딸인 제네비에브도 해군 여성 지원부대에 입대했습니다.
설리번 부부는 워싱턴에 가서 다섯 형제들에게 추서된 명예 전상장을 받았습니다. 헐리우드에서는 형제들의 생애를 담은 영화를 만들고 있는 제작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구축함에 ‘설리번 형제'함(USS The Sullivans, DD-537)이라는 이름을 붙여 진수시켰습니다.
* 루스벨트 대통령의 편지
"이 멋진 배에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이들이 여기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겠지요. 우리 아이들은 이제 바다로 돌아 갑니다”
설리번 부부는 1944년 1월까지 70여 곳의 도시를 돌며 100만명 이상의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후 결국 설리번 가족들의 슬픔은 그들만의 것이 돼버렸죠. 설리번 부부는 만년에 쓸쓸한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아버지 톰은 아들들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리며 술에 빠져 살다가 1965년 생을 마감했습니다. 어머니 알레타는 병마에 시달리다 남편을 떠나 보낸 지 7년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든 전쟁은 비극 입니다. 죽어 가던 설리번 형제들이, 전쟁에서 죽어 갔던 모든 병사들이 남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가서 우리가 조국을 위해 장렬히 죽었다고 말해 달라”가 아니라 혹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이고 죽었다. 전쟁이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가 물어보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설리번 형제의 이름을 땄던 첫 번째 구축함은 2차대전과 한국전을 치르고 1965년 퇴역했으며, 미 해군은 1995년 8월 알레이버크급 이지스 구축함에 두 번째 ‘설리번 형제함, USS The Sullivans, DDG-68’ 이라는 이름을 붙여 진수 시켰습니다. 이 진수식에는 설리번 5형제 중 유일한 기혼자였던 막내 알버트 설리번의 손녀가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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