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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미르얌은 어느 날 가까운 벗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의 안식, 바로 그 중심 자리로
이끄는 말씀입니다. 그분께서는 몸소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여 인류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진리와 사랑의 인도자로 거듭나셨습니다.”
비로소
예수님을 통해 선포되기 시작한 하늘 어머니에 관한 말씀으로 인하여, 인류는 구약시대 대언자들의 한계를 벗어나, 안정되고 차분한 하늘 사랑을 배워
오를 수 있게 되었지요.
‘알레쎄이아’와 ‘에무트’ / [Audio]
“성녀
미르얌은 어느 날 가까운 벗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의 안식, 바로 그 중심 자리로
이끄는 말씀입니다. 그분께서는 몸소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여 인류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진리와 사랑의 인도자로 거듭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말씀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성령님의 사랑의 안식, 그 중심 자리로 이끄는 말씀이라는 설명인데, 여기에 중요한 ‘하나님과
성령님의 사랑의 안식’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안식의 중심 자리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이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몸소 그 깨달음, 하나님과 성령님의 사랑의 안식의 중심 자리로 가는 길, 이치,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여, 인류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진리와
사랑의 인도자로 거듭나셨습니다. 하나님과 성령님의 사랑의 안식, 그 중심 자리로 우리를 이끄는 진리와 사랑의 인도자이십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은 어머니에게서 느끼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과 성령님의 세계에까지 이어지는, 사람들이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참된 이치’라는 의미를 갖는 ‘진리眞理’라는 한자어로 번역된 히브리어 에메트는 사실 이 단어와는 살짝 개념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영어의 ‘truth’는 “사실인가, 사실이 아닌가?”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말 그대로 ‘사실’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그런데 영어나 독일어의 뿌리가 되는 헬라스어의 ‘진리’, 즉 신약성서의 “진리가 자네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네”라는 말씀 속에 들어
있는 그 ‘진리’ 대목에는 알레쎄이아라는 헬라스어가 쓰였습니다. 이것은 플라톤 철학과 관련이 있는 개념입니다. “우주는 두 세계로
되어 있다. 이데아의 세계가 있고, 이 지상의 보이는 만물 세계가 있다.” 플라톤 철학자들은 이 가운데 이데아의 세계가 본질적인 세계이고 만물
세계는 허상에 가까운 세계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플라톤 철학 속에서 ‘진리’라는 것은 만물의 이 ‘허상 세계’가 아니라 본질적인 ‘진짜’,
그림자가 아닌 ‘실체’, 그 실체 세계를 구성하는 이치를 말하는 것인데, 그것을 말할 때에 쓰이던 헬라스어가 알레쎄이아입니다.
이처럼 만물 세계의 허상 저편에 있는, 무언가 본질적인, 형이상학적인 그 세계의 이치, 이것이 신약성서에 사용된 헬라스어
알레쎄이아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플라톤 철학에서 ‘진리’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것’, ‘그림자 같은 것’ 등의 반대
개념으로서, ‘참된 것, 실재하는 것, 허상이 아닌 실제’ 등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헬라스어 70인역 성서가 이 알레쎄이아로 번역한 히브리어 에메트는 동사 아만에서 나온 것인데, 히브리어
아만은 ‘지속하다, 지탱하다, 확고하게 하다, 신실하게 하다’ 등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우주를 지속시키고 영구적이게 하고,
물이 마르지 않고 영원히 흘러가게 하고, 하늘이 영원히 존재하게 하고 지탱하고 확고하게 하는 그 ‘성실’, ‘성실한 것’, 이것이 히브리어
에메트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충실, 충직’ 등과도 통하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이 아만이라는 동사에서 발전한 또
하나의 명사가 에무나인데, 지난 시간에 “의인은 저마다의 에무나로 인하여 산다”라는 하박국서 2:4를 우리가 살펴본
적이 있잖아요? 그 ‘저마다의 성실’, ‘저마다의 충실’ 대목에 쓰인, 하나님 앞에서의 ‘성실’, 율법 앞에서의 ‘충실’로 말미암아 살게 된다고
했던 그 히브리어 에무나입니다. 이처럼 ‘우주를 지속하게 하다. 지탱하다. 확고하게 하다. 영구적으로 존재하게 하다’라는 개념의
동사 아만에서 발전한 명사가 바로 오늘 살펴보는 히브리어 에메트입니다.
‘우주를
지속하게 하는 것, 지탱하는 것, 변하지 않게 하는 것, 있다가 사라져 버리지 않게 하는 것, 영원히 존속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에메트의 개념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한자어 ‘진실’ 하나로 다 설명하기에는 살짝 부족한 면이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시다”라는
대목에 쓰인 단어가 바로 이 에메트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확실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확실하신 분이시다” 등에서
‘확실, 확고함, 성실’, 우주를 지탱하는 성실하고 영원하고 확실한 그 ‘불변성’, 이것이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에메트의
개념입니다.
헬라스어
알레쎄이아는 “진짜냐, 가짜냐?”, “실체냐, 허상이냐?”, “본질이냐, 그림자냐?”하는 기준에서 말하는 ‘실체, 본질’을 의미하는
‘진짜’의 개념이고, 히브리어 에메트는 “변하느냐, 변하지 않느냐?”, “있다가 사라지느냐, 영구적이냐?”, “흔들리느냐, 흔들리지
않느냐?”, “확고하냐, 확고하지 못하느냐?”하는 기준에서 말하는 ‘확실한 것, 확고한 것, 지탱하는 것, 지속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불변’의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신 그 말씀은 “하나님의 그 확고한 것, 우주를 지탱하는 그 이치, 우주를
성실하게 유지하는 그 성실한 이치에 관한 가르침, 그것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나님처럼 우주적으로 확고하고 확실하고 성실하게 하리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변질되지 않는,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리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타락하다’라고 말하는
‘타락墮落’을 단순히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이해하기가 쉬운데, 그보다는 ‘부패, 변질’의 의미가 더 큽니다.
사랑과 안식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변질되지 않는 ‘확고한 이치’, 우주를 지탱하는 하나님의 ‘확고하고 충실한 가르침’의 인도자로 가장 먼저 나오신 분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의 안식’, 창조 6일이 지나고 7일 째에 안식하신 그 ‘사랑의 안식’, 앞에서 살펴본 ‘진리’가 우주의 그 확고한 것,
그 확실한 것, 영원히 변하지 않는 든든한 것이라면, 그 우주와 더불어 하나님과 더불어 성령님과 더불어 우리가 평안하게 요동하지 않는 것,
흔들리지 않는 것, 변하지 않는 것, 썩어들지 않는 것, 그것이 ‘안식’인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안식의 중심 자리로 이끄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성령님의 ‘사랑의 안식’, 인격적이고 은혜롭고 성실한 부부가 서로의 품에 안겨 있는 그 세계, 엄마의 품에서 평안히 잠들어 있는 아기의
표정이 바로 이러한 ‘안식’의 출발선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아이의 얼굴이 알파 포인트이고, 지상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오메가 포인트는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가 부부가 되어 하나님 사랑 안에서 서로의 품에서 평안히 쉬는 그 세계입니다. 이것을 종교적으로 승화시켜서
이해할 때, 하나님과 성령님의 ‘사랑의 안식’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바로 그러한 사랑의 안식, 그 중심 자리로 이끄시는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구약성서에서도
이러한 사랑의 안식에 관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교감, 말씀과 더불어 삶으로 이루어 가는 사랑의 교감과 안식에 관하여 깨우치고자
하나님께서 예로 드신 것이 ‘신부’라는 개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구약성서로부터 하나님과 인류의 사랑의 안식에 관하여 가르쳐 나오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탈선하지 않았다면, 그때부터 굉장히 높은 단계에서 사랑의 역사를 시작할 수 있었는데, 타락한 후에 그것을 기초부터 다시
시작한 것이 구약시대의 사랑의 역사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레미야 2:32를 보시면, “처녀가 자기 패물을 잊을 수 있겠느냐? 신부가 자기 예복을 잊을 수 있겠느냐? 그런데 내 백성은 셀 수 없이 많은
나날 동안 나를 잊었다” 하셨는데, 이처럼 ‘처녀’, ‘신부’라는 소재를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신부’, ‘아내’라고 선언해 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11:2에서도 바울이 “나는 전능하신 분의 열정으로 여러분에게 열정을 다 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한 남편 곧
그리스도께 순결한 처녀로 드리려고 약혼시켰습니다” 하였는데, 여기서도 ‘약혼’, ‘처녀’라는 소재가 곧 ‘신부’, ‘아내’의 개념과 통하는 것
아닙니까? 이러한 소재들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두루 쓰였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1:2 역시 “또한 나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샬렘이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전능하신 분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였는데, 여기서 ‘새 예루살렘’은 1차적으로는 예수님을 영접한 예수님의 공동체, 초대교회, 기독교회를 의미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을 보면, 하늘의 의인들이 예수님과 더불어 재림하는 장면이 있지요? 요한계시록 21:2는 바로 그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재림역사에 참여하고자 내려온다는 그림인데, 역시 여기에도
‘신부’처럼 단장하고 내려온다는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초대교회 이후의 기나긴 ‘약혼기’를 마감하고, 예수님의 재림을 통하여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과 교회가 ‘부부시대’로 들어간다는 이야기인 것이지요.
사랑과 안식의 시대적 승화
이처럼
구약시대, 신약시대, 재림시대가 공통적으로 ‘신부’라는 소재로 설명되고 있는데, 시대를 따라 이상적으로 발전하는 흐름으로 그 양태가 전개됩니다.
앞에서 “하나님과 성령님의 사랑의 안식 세계의 중심 자리로 이끄는 말씀”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처럼 하나님 사랑의 주변부에서 점차 중심 자리로
들어가는 발전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장 ‘주변부’를 공부했던 구약시대 유대인들의 하나님 사랑의 모범은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었습니다. 분명
‘신부’는 신부인데, 호세아 앞의 고멜과도 같은 ‘신부’였다는 것이지요. 고멜처럼 방황하고 방황하다 하나님 앞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아내’ 이미지입니다.
그런가
하면, 신약시대, 예수님 이후 재림 때까지를 우리가 신약시대라고 표현한다면, 이 기간의 하나님과 예수님을 향한 기독교회의 사랑은 사마리아 여자의
그것에 비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사마리아 여자와 같은 이방인들을 바탕으로 하여 펼쳐진 것이잖아요? 물론 그때의 사마리아 사람들
역시 ‘유대교인’이었지만, 그 혈통적 본질은 앗시리아가 실시한 혼혈주의에 따른 ‘이방인들’로 평가되고 있었기에, 오늘날의 기독교와 비슷하다는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나사로의 누이요, 마르다의 여동생이던 베다니의 마리아처럼, 그러한 ‘삶의 아픔’을 간직한 여자에 비견할 수도
있습니다.
베다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바짝 따라다녔던 막달라 마리아와는 조금 차이가 있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지역에 찾아가실 때에만 등장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그 현장에서는 그녀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습니다. 물론 “그 외에도 많은 여인들이 함께 하였다”라는 문구 속에 베다니
마리아도 포함될 수 있겠지만, 막달라 마리아와는 무언가 살짝 다른 예수님과의 거리감, 공간적 심정적 거리감이 깃들어 있는 모습으로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옥합을 깨어 예수님께 부어 드린 그녀의 행적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라는 예수님 말씀도 있기는 하지만, 막달라 마리아와는
달리 모종의 심정적 무거움을 간직한 여인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를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그분을 부인했다가 다시 회복했지만, 그 일로 인하여 그의 마음속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던, 예수님을 자신이
부인했다고 하는 엄청나게 무거운 마음의 짐이 있었습니다. 바울 역시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교회를 박해했잖아요? 그래서 바울도 자기가 예수님의
교회를 박해했다고 하는, 자기 손에 그 교회의 피가 묻어 있다고 하는 심정적 자책 죄의식이 그를 평생 짓눌렀습니다. 이처럼 무거운 심정의
바윗돌이 자신의 가슴을 누르고 있는 듯한 죄책감을 간직한 그들인데, 이러한 관점에서 바울과 베드로로 대표되는 2000년 기독교회가 사마리아
여자와 베다니 마리아를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지녔던 예수님에 대한 ‘신부 신앙’을 오늘날의 기독교회가 지고지순한
신앙 세계에 들어간 이들이라면 모두 간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이러한 신앙공부를 통하여, 하나님과 성령님의 사랑의 안식에 구약시대보다 더
깊이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천년 시대에는 이러한 ‘신부 신앙’이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요, 어떠한 신앙 형태로 나타나야 하는 것일까요? 물론
선생님께서는 여러 가지 예를 들어서, 여러 인물들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이제 우리가 성서적인 예를 통해서 정리해 본다면, 그것은 필시
예수님 앞에서 보였던 막달라 마리아의 성숙한 섬김의 자세를 기본으로 하여 펼쳐질 것입니다. 엘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으로 대표되는 구약시대
선지자들의 기본, 그리고 신약시대 베드로와 바울과 사마리아 여자와 베다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등의 삶의 기본은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 기본이 무엇인가? 막달라 마리아로 대표되는 성녀들의 섬김의 자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누가복음 8:1-3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전능하신 분의 왕국을 선포하시며 복음을 전하셨고 열두 제자도 그분과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악한 영과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몇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믹달 여자라고 불리는 마리아와 헤로데스의 신하인 쿠자의 아내 요한나와 슈샨나와 그 밖에 여러 여자들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그들을 대접했습니다.” 여기서 보이는 것처럼 막달라 마리아와 그 시대의 성녀들은 온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 온 마음과 뜻과 자신들의 가산을 다하여 예수님과 제자들과 교회를 섬기고 보살피는 누이로서, 나아가 어머니로서 성숙한 신부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이제 막 결혼한 ‘신부’가 ‘어머니’와 ‘할머니’의 단계로, 나아가 성령님을 온전히 닮아 성장해 오르는 과정 속에서 남편이 그녀에게서 느끼는 그 평안함, 그 깊이, 그것이 바로 사랑의 안식이고, 그 안식의 ‘승화’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세계가 바로 하나님과 성령님의 안식의 세계인데, 그러한 세계의 중심 자리로 이끄는 말씀이 바로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음’이었다는 것입니다. (Hong,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