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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세메스인들이 당한 재앙
삼상 6:17-21
17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드린 금 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18 드린 바 금 쥐들은 견고한 성읍에서부터 시골의 마을에까지 그리고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놓은 큰 돌에 이르기까지 다섯 방백들에게 속한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성읍들의 수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
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20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21 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삼상 6:17-21 / 그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무시하고 잘못 다룸으로써 여호와께 지은 죄를 씻기 위하여 금으로 종기 모양의 예물 다섯 개를 만들어 주께 보냈는데, 자기들이 다스리는 다섯 도성 아스돗과 가사와 아스글론과 가드와 에그론을 위한 것이었다. 18) 그들은 또 블레셋의 제사장들이 제안하였던 것보다 더 많은 쥐를 금으로 만들어 보냈는데, 블레셋의 다섯 왕들이 다스리던 모든 지역의 요새화된 도성뿐만 아니라 시골의 작은 마을들을 위해서도 그 숫자대로 각각 한 마리씩 금쥐를 만들어 속죄예물로 보냈기 때문이다. 벧세메스의 주민들이 법궤를 모셔 놓고 제물을 바쳤던 그 큰 바윗돌은 오늘날까지도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남아 있어 그때의 옛일을 증거해 주고 있다. 19) [기럇여아림으로 가는 법궤]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법궤를 보고 기뻐하며 뛰어가 맞이할 때에 ㄱ) 여고니아의 아들들은 이렇게 하지 않고 방관만 하였다. 이렇게 몇 사람이 여호와의 법궤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벧세메스 주민들 가운데서 70명을 쳐죽이는 중한 벌을 내리셨다. 여호와께서 무서운 형벌을 내리셨기 때문에 백성이 아주 슬퍼하였다. (ㄱ. 70인역에 따라 내용을 보충하였다) 20) 그래서 살아 남은 벧세메스 사람들이 모여 `도대체 누가 그토록 거룩하신 하나님 곁에서 가까이 지내며 살아 남을 수 있겠는가? 법궤를 이제 여기서 다른 곳으로 보내야 되겠는데 어디로 보내면 좋단 말인가?' 하고 탄식하였다. 21) 결국 그들은 기럇여아림으로 심부름꾼들을 보내 `블레셋 족속이 여호와의 법궤를 되돌려 보냈습니다. 내려와 법궤를 가져가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돌려보내면서 속건제물을 함께 드렸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기쁨으로 맞고 제사했지만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다가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이 희생으로 인하여 여호와의 궤를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하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드린 속건제물(17-18)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드린 금송아지와 금쥐는 블레셋 전체 성읍과 주민을 의미하는 것임을 다시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곧 블레셋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 굴복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속건제물을 드렸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당하고 있었던 재앙을 면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습니다. 여호수아의 밭에 있던 돌이 ‘오늘까지’, 곧 사무엘서가 기록된 당시까지 있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당한 재앙(19)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할 당시에 여호와의 궤를 만지거나 들어다보지 말라고 경고하였으며, 누구든지 그 경고를 무시하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민 4:15, 17-20). 이는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는 것은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침해하는 것으로 율법으로 금지하였습니다. 지성소에만 보관하여 대제사장만 1년에 한 번 들어가서 볼 수 있었기에 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호기심이 생겼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벧세메스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20-21) 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다가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자 슬피 울며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탄식을 하였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아직도 정확히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말씀을 무시한 채, 거룩한 하나님의 궤를 구경거리 삼는 경솔함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처럼 여호와의 궤만 옮기면 되는 줄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령을 보내어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블레셋 사람들이 가져온 여호와의 궤를 옮겨가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적 용 : 당신은 오늘 블레셋인들의 속건제물과 벧세메스인들의 죽음을 통하여 어떤 신앙적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까?
여호와의 궤가 이동하면서 침묵하던 하나님이 먼저 블레셋에게 그리고 이제 레위인들을 시작으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스스로 그의 위엄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보는 금지된 영역에 대한 경솔한 호기심의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블레셋에서의 소문을 분명 들었을 것인데도 경외하는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힘은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이제 멈추고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에서 할 수 있는 힘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 설 교 >
진정한 충성
사무엘상 6:1-16
<바이올린의 예술>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20세기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을 추억하는 기록 영화입니다. 미국의 공영방송인, PBS에서 “The Art of Violin” 이라는Title로서 한번씩 방송합니다.
(A documentary showcasing the unique talent of the 20th century’s greatest violinists.)
21세기의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들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연주자마다 곡 해석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고, 다르게 연주한다고 해설가는 이야기합니다. 같은 작곡가의 음악을 연주하더라도,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연주하는 방법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 귀에는 뭐가 다른지 구분이 되지 아니합니다.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있습니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가 가운데 한 사람인 Ivry Gitlis 가 있습니다. 이분은 UNESCO Goodwill 대사로서도 활동한 분인데, 이분이 나와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일 어떤 곡을 연주하는 방법이 하나 밖에 없다면, 그것은 그 음악에 대한 모욕이다. 그 음악의 품질이 워낙 저질이기 때문에, 연주하는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고 설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음악의 위대함은 다양성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교회에도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씀사역자들이 있고, 교회를 다스리고 치리하는 장로, 교회의 재정을 담당하고, 구제와 봉사의 직분을 담당하는 집사, 기도하는 직분인 권사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찬양으로, 식당 봉사, 빌딩 관리, 주일학교 교사 등 많은 사람들이, 많은 분야에서 열심히 주님을 위하여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매우 다른 은사와 다양한 직분이 있지만, 그러나 공통적인 사명이 있다. 그것은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칭찬할 때도 업적, achievements, 혹은 결과가 아니라, 신실함, 충성된 삶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충성된 종”으로 살기 위하여 살아야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진정한 충성된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함께 생각하겠습니다.
1.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 하는것이 진정한 충성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으로 블레셋 사람에게 법궤를빼앗겼는데, 그 빼앗긴 법궤를 다시 찾게 되는 사건이 나옵니다.
법궤는 구약의 가장 거룩하고, 가장 능력있는 기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영광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자를 높여주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자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를 소중히 여길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성전이나, 성전의 기구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된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귀하게 여길 때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성도들이 법궤나, 성전 건물 그 자체를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결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리고 법궤라는 상자나 혹은 성전이라는 건물 자체에 어떤 신비한 신적인 요소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물건들이 무슨 신비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느끼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도록 하셨습니다.
육신의 눈에는 성전이 보이고, 눈에는 법궤가 보이지만, 그러나 우리들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면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잘못 사용하였습니다.
성전의 법궤가 마치 무슨 마술적 능력이 있는 것처럼, 이것을 가지고 나가서 싸우면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법궤를 가지고 나서 열심히 싸웠음에도 불구히고, 크게 패배하였고, 법궤는 빼앗겼고, 대제사장 엘리의 가문은 멸망했습니다. 철저하게 망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이 법궤가 가는 곳마다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섬기던 다곤 신상이 박살이 났고, 하나님의 법궤가 가는 마을마다 그 마을 사람들에게는 독종이 생겼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저들은 견딜 수가 없어서, 이 법궤를 이 마을로 저 마을로 옮겨 다니다가, 마지막에 에그론이라는 마을에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에그론 사람들은 이 법궤가 자기들 마을로 올겨 오는 것 자체를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이 법궤는 블레셋 땅에 일곱 달을 머물게 됩니다. 이제 블레셋 사람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회의를 합니다. 법궤가 이곳에 있으면 더 큰 재앙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자고 결정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는 것은 당연한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려보내는지 그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을 자기들의 신을 섬기는 블레셋의 제사장에게 물어 보았더니, 반드시 속건제를 드리고 또 선물을 보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자기들의 우상, 다곤 신을 섬기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처럼, 선물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다곤 신을 섬길 때 하듯이, 하나님도 선물을 좋아하는 것처럼, 마치 하나님이 금을 좋아하는 것처럼, 금으로 만든 선물을 드리면 하나님의 진노가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이 틀렸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방법대로 섬겨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충성입니다. 이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자기들의 생각대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합니다.
이것이 틀렸습니다. 가장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에서도, 제사의 형식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심령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겸손한 마음이며, 정직하고, 신실한 생활입니다. 아무리 많은 소, 양을 잡아 하나님께 제물을 바쳐도, 그 마음이 하나님께 정직하지 못하면, 그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신실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사람들이 금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합니다. 자기들을 괴롭힌 그 독종 모양과 같은 금독종 다섯과 곡식을 다 먹어 버리니는 쥐의 모양과 같은 금쥐 다섯을 만들어서 법궤와 같이 보내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자기들 땅에 독종이나 쥐가 없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입니다.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면, Humanism, 인본주의 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을 섬길 때에, 열심도 필요하고, 많은 충성도 있어야 하지만, 그러나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섬겨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모래위에 쌓는 집과 같습니다.
오래전 야마니 사우디아라비아 전 석유상이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석기시대가 돌이 없어서 끝난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종이가 많이 있지만 종이 신문인 워싱턴포스트가 아마존 CEO에게 넘어갔습니다. 1990년대 전자제품의 왕으로 군림했던 일본의 소니가 몰락했습니다. 전자제품을 만드는 재료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Cellular Phone의 No. 1, 최강이었던 핀란드 노키아가 몰락했습니다. 얼마 전 Microsoft가 노키아를 72억불에 인수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세계 Cellular Phone 시장은 삼성, 애플, MS+노키아, 구글+모토로라의 4강 체제가 되어서 앞으로 더욱 뜨겁게 경쟁을 벌릴 것으로 사람들은 예상합니다. 물론 지금 애플과 삼성이 최고의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미국 경영 컨설턴트 짐 콜린스는 저서 <How the mighty fall?> (위대한 기업은 다 어디로 갔을까) 에서 한때 위대 했지만 그러나 몰락한 기업의 특징들을 설명합니다.
1) 성공에 대하여 자만심으로 가득찬 단계; 2) 욕심으로 인하여 원칙 없이, 사업 확장을 확장하는 단게; 3) 위험과 위기의 경고를 무시하는 단계; 4) 회생과 구원을 위하여 무분별하게 노력하는 단계; 5) 유명무실해지거나 사라지는 단계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유명한 기업이라도 한순간 자만하거나, 방심해서 추락한 사례는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사역의 성공과 실패는 이러한 요소들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공과 실패, 번영과 몰락은 오직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하며,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살아 나가고 있는가? 달려 있습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우리들이 되어야합니다.
2. 진정으로 충성된 삶은 우리에게 아픔, 희생, 손해가, 인간적인 모든 감정을 극복하고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본문은 블레셋이 법궤를 이스라엘 경내, 벧세메스로 보내는 사건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먼저 수레에다 법궤를 싣고, 소 두 마리로 하여금 이 수레를 끌게 합니다. 그 소는 암소 2 마리이며, 지금 송아지를 낳아서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암소 두 마리입니다. 그리고 본문을 보면 소를 모는 사람이 없습니다. 소를 모는 사람이 없이, 수레에다가 법궤를 실어 놓고, 멍에를 메게 하고 그리고는 이스라엘 지역으로 보냈습니다.
특히 소는 한번 다녔던 길은 잘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보지 않은 길은 사람이 몰아주어야 합니다. 만약 모는 사람이 없으면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소는 벧세메스로 가지 아니할 확률이 99.99%입니다. 소를 모는 사람이 없고 한 번도 벧세메스로 가보지 아니하였고 그리고 송아지가 집에 있으니까 송아지를 생각해서 집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벧세메스의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갔다고 합니다.“Then the cows went straight up toward Beth Shemesh, keeping on the road and lowing all the way;
도로 중앙에서 정확하게 벧세메스를 향하여 갔습니다. 헤매지 아니했습니다. 흔히 우리가 drive하면서, 잘 아는 길도 때로는 lost 하며, 헤매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암소들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곧장 갔다고 합니다. “they did not turn to the right or to the left.”
이것은 하나님이 이 소를 벧세메스로 인도하고 계심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법궤를 반드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법궤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되기 위하여 짐승까지도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인생을 가장 복된 길로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처음길이라고, 경험이 없다고 너무 당황하거나 낙심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인도하십니다.
이스라엘을 광야 40년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인생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소들은 법궤를 싣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습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일에 곧게, 바르게, 일관성있게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르게 순종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암소가 벧세메스로 향하여 가면서 울면서 갔습니다. 왜요? 가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역이기에 가야합니다. 그러나 눈물이 있고, 슬픔이 있습니다.
왜? 새끼가 뒤에 있으니까요. 새끼를 떼어 놓고 가기 때문에, 저들이 울면서 갔습니다. 젖 먹는 새끼를 버려두고, 벧세메스로 간다는것이 소들의 아픔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는 구레네 시몬이 생각이 납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지기는 졌는데, 왜 자기가 십자가를 지는지 모르고 졌습니다. 억지로 졌습니다. 그러나 뒤에 생각합니다. “내가 이 십자가를 너무나 잘 졌다.” 하나님께서 이 가정에 넘치는 복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구레네 시몬의 아들인 루포에게 문안 하였고, 그의 어머니를 바울이 나의 어머니라 할 정도로 온 가정이 믿음 생활을 잘 했습니다. 루포의 어머니는 곧 구레네 시몬의 부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억제로 십자가를 진 구레네 시몬의 가정에 큰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지는 순간에는 이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 내가 이 십자가를 져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어쩌면, “참 오늘 재수 없는 날이네” 라고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 십자가는 자기의 인생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때로는 모험적인 일도 해야 되고, 힘든 일도 해야 됩니다. 어떻게 시작했던지 중요한 것은 끝까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께 봉사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많은 괴로움 속에서 울면서 할 수도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피곤한 가운데 할 수 있습니다. 화가 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 127:5-6 /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우리는 인간적인 정이나, 인간적인 욕심이나, 인간적인 어떤 것을 다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주님을 섬겨야합니다. 인간적인 정을 극복하고 주님께 충성해야합니다.
3. 진정으로 충성된 삶은 끝까지 하나님께 희생합니다.
13-14 /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이 암소들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무사히 안전하게 벧세메스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법궤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굉장히 기뻐합니다. 그리고 크게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많은 고통과 희생과 수고를 하여, 법궤를 실은 수레를 메고 온 그 소들이 죽어서 번제물이 됩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로 죽게 됩니다. 이 소들은 희생 제물로 죽고, 마지막에는 법궤만 남습니다.
그런데 이 소의 입장을 보세요. 그렇게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이곳까지 왔는데, 상급은 주지 아니하고, 죽음으로 제물이 됩니다. 이 소들은 끝까지, 깨끗하게 충성했습니다. 이들의 헌신과 충성은 깨끗하게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요새말로 하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어쩌면 이 소는 공로상, 표창장, 감사패를 받아야 하는데 상은커녕 죽었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고, 수고하고 그리고 죽었습니다. 오직 법궤만 남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시험에 드는 이유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아니하는 섭섭함 때문입니다. 명목은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show off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참으로 성숙한 신앙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나가는 일입니다.
마 6장에서 우리 예수님께서 구제를 통하여 주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6:1-4 /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지금은 천국 가셨지만 시각 장애인으로서 백악관 보좌관까지 된 강영우 박사의 인생고백입니다. 이 분은 중학교 다닐 때에 사고로 그만 실명하였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 한국에서 연세대학을 졸업하고 도미해서, 피츠버그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여 1976년 Ph.D. 받아, 한국인 최초의 시각장애자 박사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유엔 세계위원회에서 부의장으로 지냈고, 나중에 루즈벨트 재단의 고문으로 지내면서, 일생 동안 7억명에 해당하는 그 많은 장애인 복지를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이 분의 고백에 의하면, “앞을 보지 못하지만 장애는 축복일 수 있다.”, “장애를 참고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를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이다.”, “단순히 장애를 참고 한 맺힌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장애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고저 하시는 뜻을 깨달아야 한다.” 강박사님 부인이 어릴때 부터 자기들의 아이들에게 꼭 자기 전에 성경을 읽어 주었다고 합니다. 늘 그랬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아이들 방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가 성경을 읽어주려고 하니, 아이가 눈을 번쩍 뜨더니, “아버지는 성경을 볼 수 없쟎아.” 아버지는 “걱정마라. 그리고 불을 껐습니다.” “아니 이 깜깜한 데서 어떻게?” 아버지는 점자 성경을 앞에다 놓고 손가락으로 훑어가면서 성경을 유창하게 읽었습니다. 아이가 깜짝 놀라서 “아버지는 전기불도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성경을 잘 보나?” 아버지가 말합니다. “사람은 밝은 데서 보는 것보다 어두운 데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단다.” “눈을 뜨고 보는 것 보다, 눈을 감고 보는 세계가 더 넓다.” 아이들이 이 말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때로가 형통한 날보다 어려운 날에 영적인 진리를 더욱 잘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어려움 속에 더욱 많이 기도하고, 고난 속에서 더욱 순수하게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끝까지 희생할 때에 진정한 충성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1) 항상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나가며; 2) 인간적인 모든 감정을 극복하고 섬겨야합니다; 3) 그리고 끝까지 희생하면서 깨끗하게 섬겨야합니다.
이렇게 진정으로 이러한 충성된 삶을 살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인생에, 가정에 우리 교회에 은혜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