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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면 매일 볼 수 있는 석양이 지고나면 내일 다시 태양이 떠오를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
얼마 전
해군사관학교 연병장을 따라 운동을 하다가 석양이 너무 예뻐서 스마트 폰으로 찍었는데, 신기하게도
11시
방향에 불그스레한 반원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가 <모자
쓴 옥포만 석양>으로
이름을 붙여 보았습니다. 옥포만이란
이름의 유래는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첫 해전이 옥포해전이었기 때문에 이 충무공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이를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해군사관학교 연병장 전면에 펼쳐진 만 이름을 옥포만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위의 해가 지고나면
내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동쪽으로부터 아침 해가 떠오를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국을 일본에 빼앗기고
36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삶을 이어왔던 우리 선조들의 모습으로 돌아가 본다면, 해는 단순한 해가 아니라
‘희망
그 자체(hope itself)’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은 오늘 아침 다시 바다 위로 이글거리며 떠오르는 해를 보며 언젠가 나라를
되찾을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생도 3학년
때인 1984년
7월에
美7함대실습
기간 동안 美해군
제7함대
소속 세인트 루이스함(USS St. Louis, LKA-116)에
승조하여 괌, 오키나와, 필리핀
수빅 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에 실습을 떠나기 전에 실습을 준비하면서 실습을 함께
할 동기생과 도서관에서 방문 도시가 지니고 있는 역사·전략적인 가치에 대해
부지런히 자료를 찾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실습을
시작하던 날, YP정을
타고 부산 외항에 투묘하고 있던 세인트 루이스 함 현측에 도착하여 사다리로 오르면서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생도 신분으로 美해군
장병들과 한 달간의 실습을 잘 할 수 있을까?”하는
염려도 되었지만 사관실에서 함장님께 신고한 후 안내 장교의 안내를 따라 침실을 배정 받고 저녁을 함께 하면서 처음에 염려했던 점들은 기우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함
장병들의 도움으로 한 달 동안 마치 가족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예정된 실습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함장님께서
저희 두 생도에게 당부했던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실습
기간 동안 장교의 시각이 아니라, 생도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대하면서 많은 것을 경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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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에 취역한 세인트 루이스함은 찰스톤급 상륙수송함으로서 베트남전과 한미연합상륙훈련에도 참가하는 등
한국과 많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세인트 루이스함은 50명의 장교를 포함하여 592명의 승조원으로 편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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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습기간
동안 방문했던 오늘날 오키나와와 주위 140여 개의 도서들은 오래 전에 류큐왕국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100여 년간 삼국으로 분할되어 있던
도서들을 1429년에
중산국(中山國)이 통일하여 류큐왕국을
건국하였습니다. 류큐왕국은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 주변국과의 중계 무역으로
번성하였습니다. 류큐왕국은 면적이나 인구 면에서는 작은
나라였지만. 우리나라 조선왕조와
여러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조선왕조는
1392년, 류큐왕국은 1429년에
건국되어 두 왕조의 건국 시기가 비슷합니다. 두
왕조 모두 독립 국가였지만 호혜 실리의 차원에서 당시 아시아에서
최강대국이었던 중국에 조공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조선왕조는 482년, 류큐왕국은 450년 지속되어 두 왕조의 연수도
비슷합니다. 두 왕조 모두 일본에 의해
망했습니다. 일본에 의해 망한 시기도
비슷합니다. 류큐왕국은 1879년에 일본에 무력
병합되어
일본의 오키나와 현이 되었고, 조선은
1910년에
일본에 강제 병합되었습니다.
류큐왕국과
조선왕조 사이에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조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대한민국으로
독립을 회복한 반면, 류큐왕국은 독립하지 못한 채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당시 오키나와에서
며칠 동안 머물면서 유서깊은 유적들을 대하면서 “왜
류큐왕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하지 못하고 영영 일본의 부속도서가 되어버리고 말았는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 질문은 그때 이후 저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경희대학교
강효백 교수의 글을 통해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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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의상은 류큐 왕국 시대에 왕족과 사족만 입을 수 있었던 전통 의상이다. 요즘에는 현대식으로 개량된
옷이나 드레스도 있다./오키나와 관광청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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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본섬 북부 온나손에 있는 만좌모(萬座毛)는 18세기 말 류큐 왕 쇼케이가 “만 명이 앉아도
족하다”고 칭한 것이 이름의 유래로 전해지고 있다. 초원이 펼쳐진 끝부분은 동중국해의 수평선을 바라다볼 수 있는 절경이며 옆에서 보면 코끼리
모양을 하고 있다. |
강효백 교수는
「루즈벨트와 장제스」라는 제목의 글 속에서 최근에 공개된
카이로회담의 회의록과 미국 스탠포드대 후버연구소가 보관하고 있는 장제스 총통의 일기장을 토대로 중요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3년
11월 22일부터 27일까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그리고 중화민국의 장제스 총통이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만나 서로 회담을 통해 종전 후 세계질서 유지를 위한 카이로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선언문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면서
일본이 강탈 또는 무력으로 점령한 영토를 반환해야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카이로 선언문이 우리 민족에게 특별히 의미
있는 것은 대한민국의 독립이 이 선언문 속에 최초로 명문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과 중화민국 장제스 총통 사이에 개인 회담은 1차
회담이 11월 23일에 열렸고, 2차 회담은 이틀
뒤인 11월 25일에
열렸습니다. 두
회담에서 모두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이 무력으로 병합한 류큐 열도를 만약 중국이 원한다면 옛날 류큐왕국이 조공을
바쳤던 중국에게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장제스 총통은 미국과 중국이 공동으로
류큐 열도를 신탁통치하자는 식으로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만약 장 총통이 당시에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였더라면 오늘날 오키나와와 인근 140여
개의 섬들은 중국령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왜
그때 장제스 총통이 류큐 열도를 넘겨주겠다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당시 장제스 총통은 타이완이나 만주처럼 일본이 무력으로 점령하고 있던 중국의 영토에만 관심이
있었다든지, 대륙 출신인 장제스 총통은 해양의
가치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든지, 당시
장제스 총통은 모택동의 공산군을 섬멸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류큐 열도
같은 곳에는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든지, 류큐
열도를 제안하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진의를 장 총통이 의심하고 있었다든지 하는 것과 같은
설들입니다.
이러한 설들 가운데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장제스 총통은 류큐
열도를 가지라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안은 거절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왜 장제스 총통이 루즈벨트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조그마한 한국의 독립은 주장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강효백 교수는 분명하고
자신있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류큐왕국에는 독립을 원하는 독립투사들이
없었지만, 우리나라에는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독립을
원하는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장제스
총통은 청년 윤봉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당시 24세였던 청년 윤봉길이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뇌부를 괴멸시킨 것을 본 후, 장제스 총통은 자기 휘하 100만 중국군이 수행할 수 없는 일을 한국
청년 한 명이 해내었다고 극찬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부터 장제스 총통은 당시까지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상해 임시정부의 가장 든든하고 확실한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카이로회담이 열리기 직전인 1943년
7월 26일 장제스
총통은 상해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 선생을 불러 접견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완전 독립과 국제 공동 관리에
의한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는 상해 임시정부의 요구 조건을 그대로 흔쾌히 수락하였습니다.
그래서 카이로회담이 열린
첫
날이던 1943년 11월
22일 장제스 총통은 카이로에서 자신의 일기장에 종전 후 한국의 완전한 독립과 자유를 제안할 것이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카이로회담 석상에서 실제로
한국을 신탁통치하자는 처칠 수상의 제안을 일축하고 한국의 독립을 카이로선언문에 명문화시켰습니다.
장제스 총통과 개인적인 친분을 가졌던
우리나라 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장제스 총통이 한국 독립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있었다고 말한 것으로
강효백 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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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에서 진수식을 가진 대한민국해군 214급 잠수함 5번함인 윤봉길함(ROKS SS-077)의
위용/해군본부 정훈공보실 |
올해 8월15일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광복절입니다. 70년 전에 우리에게 잃어버린 빛을 회복할
수 있는 광복의 능력이 있었습니까? 우리에게
일본 군대를 물리칠 수 있는 군대가 있었습니까?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강대국에 의해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 것 뿐입니다.
그러나
그 강대국들이 조선 왕조와 여러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던 류큐왕국까지 책임져 주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강대국들이 우리가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은 윤봉길 의사처럼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투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자기 희생과 죽음의
속박을 감수했기 때문에 강대국들의 도움으로 인해 우리 민족이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끔씩
우리 주위에는 우리나라의 독립은 우리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처리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우리와 비슷한 조건과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류큐왕국의 패망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나라를 빼앗긴 날부터 독립을
되찾는 날까지 36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우리나라와
중국을 비롯한 세계 도처에서 독립운동을 벌여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독립을 되찾겠다는
‘굳은 의지와 실천’이 있었기 때문에 독립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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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자 속에 갇혀서 숨을 쉬지 못하고 있는 태극기. 파랑색과 빨강색의 농노는 만드는 회사마다 조금씩
다르다. 위의 태극기는 규정으로 정한 색과는 거리가 먼 것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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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태극기에 대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태극기는 흰 바탕의 기 위에 빨강색과
파랑색의 태극 문양을 가운데 두고 검은색의 건·곤·감·리 4괘가 네 귀에 둘러싸고
있습니다. 태극기의 최초 도안자는
고종이었습니다. 태극기는 1882년
고종의
명을 받아 조선의 왕을 상징하는 어기(御旗)인 ‘태극 팔괘도’를 일부 변형하여
만들었고,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과 9월 박영효 등
일본 수신사 일행에 의해 사용되었습니다. 태극기는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공식 국기로 사용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계속
정식 국기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태극기에
대해서 두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색농도에 대한 것입니다. 선진국의 기준이 여러 가지 있지만 저는
그중에 하나가 규격화와 표준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태극기는 분명하게 색상으로
빨강색(#C60C30), 파랑색(#003478), 검정색(#000000), 흰색(#FFFFFF)을 지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국기인 태극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검은색과 흰색은 말할 필요가 없는데 파랑색과 빨강색의 농도는 만든 회사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태극기를 언제 어디에서 제작하든지 크기와
색상은 같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하루빨리 전국 어느 곳에서든지
같은 색농도의 태극기를 만날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봅니다.
둘째, 전세계에서 국기를 액자에 넣어서 전시하는
‘유이(唯二)한’ 국가는 우리나라와 일본 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가까운 이웃나라이면서도
정서적으로는 지구상에서 가장 먼 거리에 있는 나라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 36년 동안의 일제강점기를 경험하면서 우리가
일본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해하기 힘든 점은 그렇게 일본을
싫어하면서도 독도문제와 위안부 문제로 한일관계가 근래에 들어 최악의 상황이었던 2008년 8월 한 달 동안 일본차 수입증가율은 어느
때보다 높았던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리고 남묘호랑교를 비롯하여
40여 종의 일본
토착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사실 또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아가 광복
70주년을 맞이했는데
아직도 우리는 일제시대의 문화를 아무 생각없이 따라하면서 국기인 태극기를 액자 안에 넣어서 사무실 벽에 게시해 왔습니다.
유리 액자 속에
태극기를 게시하는 것은 민족말살정책을 추진하였던 일제시대의 일장기 게시방법이었는데, 해방된 지 44년이 지난 1989년에 와서야
비로소 정부는 위와 같은 유리 액자 속의 태극기 게시 방식을 폐기하고 지난 2002년 좌우보필형, 족자형 등 새로운 국기의 틀을
발표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 지역의 학교와 관공서에서는
일제의 잔재인 유리액자 태극기가 버젓이 교실과 관공서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태극기가 액자 속에서 숨을 쉬지 못해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오늘부터라도 태극기를 액자에서
꺼내 숨을 마음껏 쉴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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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고시(행정자치부 고시 제2002-16호)로 지정된 좌우보필형 국기 게양 방식은 왕의 교지나 왕에게
올린 상소문에 사용되었던 족자 형태로 가로 574mm, 세로 350mm, 밑판에 두께 18mm로 제작해 유리를 없애고 실내조명이 반사되지 않도록
무광 처리하였다. 4괘 색상과 마찬가지로 족자 색상도 정확하게 규정해야 할 것이다. |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올해 광복절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 왜 서 있는지를 생각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미국 Washington D.C.에 있는 알링턴국립묘지(Arlington
National Cemetery) 내 한국전쟁기념관에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고 새겨 놓았습니다.
저는 여기에 단어
하나를 더하고 싶습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라
선물이다.(FREEDOM IS NOT FREE BUT PRESENT)”라고.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는 공짜가 아니라 선조들의 희생을 댓가로 물려받은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짜로 받은 것은 누가 준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갚아야 할 의무가 없지만, 선물은 누가 주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갚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후손들에게
지금보다 더 밝고 살기좋은, 반 만년의 긴 역사를 자랑하기보다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진 정신이 건강한 나라를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모습 이대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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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알링턴국립묘지 내 한국전쟁기념관에 새겨 놓은 문구. 전쟁의 의미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
첫댓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글이네요. 선조의 선물을 잘 지켜 후손에게 온전하게 물려주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