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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뤼순은 해안가에 접해있어서 그런지 여름에 접어들었음에도 꽤나 선선했다. 낮에는 더워서 땀을 흘릴 때도 있었지만 밤에는 돌아다니기 딱 좋은 온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낮이다. 돌아다니면 땀이 주르륵 등을 타리고 내려왔다. 걸어다니는 이들의 등에는 땀에 젖은 흔적이 보였다. 그런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뤼순 시내를 가로지르며 나아가는 리무진 한 대가 있었다.
메르세데스-벤츠 770 리무진의 뒷좌석에는 주인인 후지와라 타마히코가 오른손을 차창에 댄 채로 머리를 받치고 있었다, 그는 피곤한건지 아님 할게 없어서 그런지 눈을 감고 있었다. 내지(일본)에서 지내던 그는 2년 전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급히 이곳으로 돌아와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상속 받은 재산을 꼼꼼히 정리하고 관리하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타마히코는 아버지가 그동안 얼마나 힘든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이 힘든 일을 할 때마다 그는 자신이 도쿄대 경영학과에 재학한 것을 최고의 선택으로 여겼다.
“사장님. 도착했습니다.”
"음."
타마히코가 온갖 상념에 젖어 있을 때 리무진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것을 알리기 위해 앞자리에 있던 기사가 몸을 돌려 그가 앉아있는 뒷좌석을 향해 말했다. 기사의 말을 들은 타마히코는 눈을 떴다. 그리고 문을 열어 리무진에서 밖으로 나왔다. 문을 여니 쨍쨍한 햇살이 그를 반겼다.
타마히코의 눈 앞에는 붉은 벽돌로 건설된 3층 건물이 있었다. 내지의 도시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 양식이었다. 그가 왼손으로 눈을 돌려 시계를 보자 시침은 3시, 분침은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약속 시간인 오후 3시에서 45분 늦은 시각이었지만 타마히코는 그리 개의치 않았다. 처음 만남에서 정각에 나갔다가 다른 이들이 자신보다 최소 30분이나 늦게 와서 물먹었던 일이 있었기에 그 이후부턴 그도 이렇게 30분 이상 늦게 오곤 했다.
정문을 거처 복도를 지나 그 끝에 있는 회의실의 문 앞에 도착했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 문이 닫혀있음에도 대화들이 명확하게 들렸다. 그는 잠시 헛기침을 해서 목을 풀고 옷깃을 아래로 잡아당겨 자신이 입고 온 정장을 바로잡았다. 그리고 문을 열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후지와라 상. 어서오십시오.”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늘 그가 참석하기로 되어있는 [여순 에스페란토 학습회]의 호스트 호소카와 마사타케가 악수를 청하며 타마히코를 반겼다.
타마히코는 자신의 오른손을 건내 호소카와와 악수하고 회의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타마히코는 호소카와를 볼 때마다 이유를 모르는 거부감이 들었다. 그의 직감에 따르면 호소카와와 자신은 같은 성향의 사람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동질감은커녕 거부감이 들었다.
회의실 안에는 호소카와 말고도 여러 사람이 있었다. 호소카와나 자신을 이 자리에 초대한 사람처럼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학습회 일원들이 있는가 하면, 이전에 보지 못했던 뉴페이스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제일 놀라워 한 것은 관동군 작전참모 이시와라 간지, 만주영화협회 이사 아마카스 마사히코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 둘 외에도 기시 노부스케라는 젊은(?) 관료 한명이 자리했다는데. 일개 관료인 기시는 그의 입장에서 흥미 외의 인물이었다.
이시와라, 아마카스와 인사를 나누고 자기 자리에 앉은 타마히코에게 누군가 와서 말을 걸었다. 그 얼굴은 타마히코가 매우 잘 아는 사람의 것이었다.
“오랜만입니다 김 사장님. 지난번에 뵙고 오랜만이군요. 잘 지내셨습니까?”
주요 거래처 중 하나인 조민양행의 김필중 사장을 본 타마히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오른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김필중은 타마히코를 이 자리에 초대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저야 잘 지냈지요. 후지와라 상도 잘 지내셨습니까?”
“잘 못지낼 일이 있겠습니까. 잘 지냈습니다.”
타마히코와 김필중은 몇가지 안부인사와 덕담을 더 나눴다. 대화를 마친 김필중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자 타마히코 역시 제자리에 앉았다. 그가 김필중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 몇 사람이 더 들어왔다. 군복을 입은 젊은 여자와 만철 소속으로 보이는 두 명, 해군 장교복을 입은 군인, 독일어로 된 두꺼운 과학 서적을 품속에 품고 온 남자까지 총 5명이 더 들어왔다.
“자. 이제 모두 모이신 것 같으니 오늘의 학습회를 시작해볼까요?”
호스트인 호소카와가 손뼉을 짝 치며 모인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시작에 앞서, 오늘 아주 귀하신 분들이 참석해주셨습니다.”
호소카와는 이시와라 간지, 아마카스 마사히코, 기시 노부스케가 나란히 앉아있는 자리를 손으로 짚으며 말을 이어갔다.
“우선. 이시와라 중좌님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이시와라 중좌님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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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페란토 학습회의 모임을 마치고 자택으로 돌아온 타마히코는 고민이 많은 얼굴이었다. 돌아온 직후부터 쭉 그 모습이었다. 저녁을 먹을 때도, 목욕을 할 때도, 쉴때도 계속 고민이 많은 얼굴이었다.
“선배, 왜 그래요? 무슨 고민 있어요?”
그런 남편의 모습이 걱정되었는지 아내인 아나스타샤 리하초브나가 상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선 타마히코에게 물어봤다. 둘은 도쿄대에서 만나 CC(캠퍼스 커플)로 연애하다 작년(1931년)에 결혼한지라 연애 할 때처럼 아나스타샤가 타마히코 보고 선배라고 하는 일이 잦았다.
“별 거 아냐. 그냥 생각할 것이 많아서 그래.”
타마히코는 아내에게 걱정을 전염시키기 싫은 건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남편의 말이 거짓임을 금방 간파한 아나스타샤는 재차 물었다.
“난 다 알아요. 선배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목 뒤를 오른손으로 감싸는 버릇이 있다고요. 대체 뭐길래 그래요?
“진짜 별 거 아니야. 너도 걱정하길 바라지 않아서 그래.”
그렇게 말하곤 타마히코는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방금 전 에스페란토 학습회에서 있었던 일이 계속 머릿속에 감돌았다.
사실 이번 학습회에 참석한 특별 게스트는 이시와라, 아마카스, 기시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이시와라와 함께 온 관동군 소속의 나카타 중좌도 같이 있었다. 그가 있을 때는 대일본제국 만세,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기 바빴던 이들이 중좌가 나가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여기 계시는 이시와라 중좌, 그리고 본인 모두 동감하는 바가 있습니다. 공산주의 소련이 동아까지 집어삼키기 전에, 우리 역시 그들의 개발방식을 어느 정도는 차용하여 만주를 '올바르고' '효율적으로' 경영, 만주와 조선을 대동아공영의 중핵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도쿄의 머리 굳은 영감들이 의지가 없든, 아니면 능력이 없든... 우리는 그런 인물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기시의 말이었다. 이 순간부터 타마히코는 뭔가 쎄함을 느꼈다. 타마히코도 도쿄의 늙다리들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지만(그들이 높은 자리를 모두 차지해 자기 자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우리는 그런 인물들이 아니다’라는 부분에서 뭔가 어조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기시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방금 가네다 상, 그리고 부 상과 대화하고 다시 한번 결심했습니다. 도쿄에서 번듯한 정장을 입고 고위관료가 되어 대장상이나 외무상, 총리대신 자리에 올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달리 없겠더군요. 차라리 거친 외투와 셔츠를 입고 만주 벌판을 누비며 대동아의 진정한 공영을 위해 힘쓰는 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타마히코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여기 언어 배우는 동아리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하고 들어왔는데?
방금 전만 해도 대일본제국 만세를 외치던 사람이 ‘일본에서 벗어난 진정한 대동아공영’ 운운하는 것이 타마히코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언어 동아리면 언어나 배우지. 그리고 아시아는 대일본제국의 지배 하에서 살아가는게 당연하거늘, 무슨 진정한 대동아공영?
"감사합니다. 말해 주셨듯... 만주는 저 늙다리들이 제대로 굴릴수 있을 땅이 아닙니다. 능력있는 사람을 뽑고, 땅을 개간해 먹고 살 땅을 늘려서 더 인재를 모으고, 그걸 기반으로 나아가게 할 중심. 그곳이 만주 아니겠습니까?“
참석자 중 하나인 만철 인사 부숙경은 기시의 말에 동의한다는 어조의 말을 했다. 중심? 아시아의 중심은 자고로 대일본제국 아니겠는가? 듣자하니 부숙경은 만주족이라지. 부숙경은 자신의 조상들이 청나라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만하다 서구세계에게 된통 깨진 과거를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1895년 이후로 아시아의 질서는 대일본제국이 주도했거늘.
“그러니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잠깐.”
부숙경의 말을 끊은 자는 그의 만철 동료이자 타마히코와 같은 일본인인 가네다 마사이치였다. 타마히코는 이런 불경한 말을 들은 그가 저들에게 올바른 소리를 하려고 말을 끊은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타마히코의 희망은 뒤를 이은 말을 듣고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단도진입적으로, 지금 제국의 행태는 도를 넘고 있습니다. 관동군과 농림부 장관께서도 아실테지만, 만주 개척은 우리 테크노크라트와 만철, 그 외의 인재들이 합심해서 만든 결과물입니다. 이번 이시와라 씨의 만주 체제 성립 계획은 그 결실이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일본은 그에 대한 제대로된 대응을 하나도 못하고 있습니다. 늘 뒷북에 뒷북. 이래서야 현지의 우리들은 안중에도 없죠. 제대로된 체제를 구축합시다. 합리적인. 장관님 말씀처럼, 우리는 그만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타마히코는 어이가 없었다. 만철을 세운게 누군가? 테크노크라트들을 키운게 누군가? 바로 대일본제국 아닌가. 황국신민으로 태어나 황국의 은혜를 받았으면서 황국을 욕하다니. 가네다는 타마히코와 같은 대일본제국 신민이었지만 그와 달리 불령선인과 다를 바 없는 발언을 하였다.
타마히코의 머리가 ‘이게 대체 머선 129?‘하며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 기시가 가네다의 말에 동의했다.
"가네다 상의 말씀이 맞습니다. 내지의 '야마토 패권주의'는 우리의 앞길에 큰 장해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나의 '중화 패권주의' 역시 우리의 장해물이 될 것이지요. 중화질서가 끝난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패권주의를 내세우는지... 아무튼, 둘을 모두 이기고 우리 '만선 중추 범아주의'가 아주의 시대정신으로 자리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동지가 많아야 하지요. 몽강의 몽골인들, 대만 섬의 사람들... “
“동지를 모으기 위해선 우선 전초기지가 있어야 하는거 아니겠습니까?”
“가네다 상, 그게 바로 만주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관동군을 동원해 만주로 출병해야합니다.”
기시가 내밷은 ‘관동군의 만주 출병’에 잠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들 중 장쉐량을 우호적으로 보는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음... 더 큰 공공선을 위해서라면 저는 적극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무능한 군주 아래에서 고통받는 만주 사람들의 굴레를 끊기 위해 장쉐량을 몰아내야지 않겠습니까? 물론 무력을 사용하는건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할 것이니 우선 장에게 압박을 주어 피를 보지 않고 몰아내는게 좋겠습니다만... 만선일 체제 역시 동의합니다.“
기시의 만주 출병 제안에 부숙경은 찬성의 뜻을 표했다.
"장학량은 만주를 가질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몰아내는게 좋습니다. 방해요소의 여부를 떠나서 동료들을 내팽개치는 그런 인간이 여기 만주를 다스리면 만주의 혼란은 지속될테니...!“
다음으로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여자인 마적단 두목 김상덕도 기시의 제안에 동의했다. 만주에서 소작으로 삶을 이어가던 농민의 딸로 태어나 온갖 고생을 다 하다 마적단 두목까지 된 그녀는 자신과 같은 만주 주민들에게 보호막이 되지 못해주었던 장쉐량을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에.
부숙경과 김상덕이 만주 출병에 찬성하는 와중 게스트 중 한명인 이시와라 간지는 그동안 다른 이들의 말을 듣고만 있던 것을 멈추고 입을 열어 에스페란토로 다른 이들에게 말을 건냈다.
"흐흠. 만주로의 출병은 계획의 1단계일 뿐, 목표 그 자체가 되어선 안되오. 이곳 만주 인구의 9할 이상이 지나인인데, 고작 한줌뿐인 내지인, 조선인 등만 가지고 이곳을 대아혁명을 이끌 국민국가로 창조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지.“
그런 이시와라의 말에는 타마히코 역시 동의했다. 1905년 이후로 일본인 이민자들이 만주로 이사한 경우가 꽤 있었지만 만주 인구의 다수는 한족과 만주족 등 중화민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같은 제국신민인 조선인의 경우 만주 이주의 역사가 일본인들보다 훨씬 오래전에 시작되어 일본인보다 많았다. 하지만 일본인과 조선인을 모두 합쳐도 중화민족에 비해선 압도적 소수였다. 하지만 말은 끝까지 들어야 안다고. 이시와라의 말은 대일본제국을 위함이 아니었다.
“3천만의 만주, 그리고 2천만의 조선! 두 '독립국'을 연합으로 묶어 내지... 아니, '열도'를 '영입'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대들 생각은 어떻소?“
‘뭐... 뭣?!’
독립국? 조선과 만주가 독립국? 만주는 과거 일본이 대만에 수립한 타이완 민주국처럼 독립국의 탈을 쓴 괴뢰국으로 만든다면 모를까. 조선은 대일본제국의 정당한 영토거늘 대체 무슨 소리를 한단 말인가? 대일본제국을 수호하고 야마토다마시(大和魂, 일본 정신)를 품고 살아가는게 당연한 제국군 장교가 할 말이란 말인가?
"맞는 말씀이십니다! 아시아가 부흥하려면 민족간의 평등이 우선시되어야지요. 이를 위해 만주로 출병하는 것에 전 찬성합니다. 내지의 소작민과 하층민들도 만주의 성공을 보면 저희의 이상에 동참할 겁니다.“
이시와라의 제안에 호소카와는 적극적으로 찬동했다.
"만주를 오족협화의 왕도낙토로 만들고 만선일 체제를 구축하자는 것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만주와 조선의 충분한 산업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열도를 영입했을 때 지금과 다를 바에 없겠죠. 일단 만주와 조선 연합의 체급을 키우고 영입을 한다면 찬성입니다.“
조건부긴 하지만 김필중에.
"우선 만주로 출병해 장악하고 만주에 이시와라 상이 말씀하신 체제를 구축한다면 만주는 범아주의의 탄생지이자 요람이 될 것입니다. 어디가 기회의 땅인지는 그들이 잘 알게 되겠지요."
마지막으로 가네다까지. 모두가 만주로의 출병과 이시와라가 주장한 만주 체제 건설에 찬성했다. 자신도 만주 출병에 동의한다만. 대일본제국의 외지로 만든 것에 찬성하는 것이지. 이들의 주장에 찬성하는 것이 아니기에 타마히코는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열도가 지금처럼 잘못된 이들의 손아귀에 꽉 잡혀있고, 그들이 '협력자'들에 대한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문제가 생기겠지. 모두의 말이 맞소. 지금 상태에서 만주와 반도를 경영해봤자 그 과실을 열도가 빨아들이게 된다면, 그건 계획을 실행하지 않는 것만 못할 거요.“
아시아를 위해 노력하는 대일본제국의 노고에 다하는 감사로 모든걸 바쳐도 모자랄 판에? 그 뒤를 이은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허나 열도가 대륙과 반도의 일에 개입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면? 그렇다면 어떻겠소?”
내지가 대륙과 반도의 일에 개입하지 못한다? 그럴 방법은 단 셋 밖에 없었다. 내전 아님 대규모 반란, 또는 쿠데타.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그 셋 외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든 외부의 적을 만들어 눈길을 돌릴 수 있으니 말이다.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는 자국 내의 불안도 진정하지 못하면서 외부의 적을 만들어 국민단결을 이루려고 대외확장에 집중했고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황가 역시 자국 내부의 소수민족 소요로 골머리를 썩던 와중 대외확장이 국론통합을 이룰 방법이라 생각해 발칸으로 진출하려고 했다. 결국 둘 다 대전쟁에 끌려가 사이좋게 망했지만. 쿠데타면 몰라도 일본에 충성해야 할 장교가 내전이나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자는 말을 하자 타마히코는 어안이 벙벙했다.
암튼 이시와라는 준비한 말을 모두 마친건지 아님 다른 사람에게 바통을 넘긴건지 거기서 으문조로 말을 끊었다. 이시와라의 말을 이어받은 자는 호소카와였다.
“흠... 중좌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보니 내지가 대륙과 반도의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할 수단이라면 많습니다. 아주 많습니다. 청군파의 3월 사건에 이어지는 군부의 소동이라던지, 조선인 불령선인들의 활동이라던지... 아님... 두 번째 쌀 소동도 있을 것입니다. 일단 쇼와 2년(1927년)의 금융공황과 쇼와 4년(1929년)의 아메리카발 불황으로 인해 내지의 분위기 자체는 몹시 흉흉하니까요."
“그래! 바로 그거야! 쌀 소동! 그 쌀 소동은 왜 일어날까?! 열도는 어디에서 쌀을 조달하지?“
마지막의 ‘두 번째 쌀 소동‘이란 말을 들은 이시와라는 옳지, 옳지 하는 표정으로 손뼉을 치며 더욱 말해바보라고 부추겼다.
“내지가 곡물을 수급하는 곳은 조선이지요. 그것도 앞서 말하신 전라도 군산.”
호소카와가 말을 끝내자 부숙경은 ‘그럼 배를 침몰시키자는 겁니까?’라고 물었고, 김필중은 ‘그럼 군산에서 쌀을 빼돌려서 어딘가 숨겨두자.’라고, 가네다는 ‘조선 내부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을 부추기자.’라고 각자 의견을 내었다. 하지만 호소카와는 모두 고개를 저었다.
“그럼 대체 무슨 수단을 쓰자는 것입니까?”
김상덕이 대체 무슨 일을 하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물었다. 호소카와는 단 한마디만 했다.
“금적금왕(擒賊擒王).”
그 말에 이 회의장 안에 있는 모든 이가 호소카와의 말 뜻을 알아챘다. 사실상의 조선 부왕이 누군가? 총독 아닌가? 즉 총독을 선제압하면 내지는 조선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게 되어 제2차 쌀 소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었다. 고사성어나 한자를 모르는 김상덕은 “?”이란 반응이었지만.(단어를 해석해 주면 뭔뜻으로 쓴건지 알 수 있는데 한자를 모르니 속뜻을 모름)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갔다. 오늘의 회합에 참여한 자들은 모두 한가지 공통된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진정한 대동아공영을 이루기 위한 여러 가지 의견과 계획이 나왔다.
그 중에서 천황과 화족을 끝장내야 진정한 대동아공영이 이루어진다는 호소카와의 폭탄 선언과 인도에서 홋카이도까지 철도를 잇자는 가네다의 범아시아 종단철도 계획이 나왔지만 (타마히코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둘이 흥분해서 한번 뇌절 한 것이라 생각했기에. 뭐,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처럼 진실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자신과 뜻을 함께 하리란 것을 알고(사실 타마히코는 아니지만) 흥분한 이시와라는 식탁보를 확 끌어당겨서 빼내곤 자신이 소지하던 세필붓을 꺼내 무언가를 술술 써내려갔다.
[대동아 공영을 위한 맹세]
하나. 우리는 관동군의 무력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장학량 세력을 몰아내고 만주를 빠른 시일 내에 장악한다.
하나, 우리는 중앙 계획경제의 제도를 차용하여 공산 소련의 위협으로부터 만주, 더 나아가 전 아시아를 수호한다.
하나, 우리는 근시일 내 조선의 실권을 획득하여 조선이 동등한 형제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하나, 이 모든 조건이 맞추어진다면,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내지가 만선에 불간섭할 환경을 조성하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만선을 중추로 하는 진정한 만민협화의 대동아공영을 달성하기로 하며, 이를 위해 제국주의 열강에 맞설 수 있는 무력과 경제력을 확보한다.
(서명란)
준비된 것이 없어 이시와라가 급한데로 식탁보에 휘갈겨 쓴 어설픈 결의문에, 먹물도 없어 교자와 모찌를 찍어 먹던 간장으로 먹물을 대신했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모든 이들은 자신의 앞에 놓인 것이 식탁보건 간장이건 상관하지 않고 하나 둘씩 서명했다.
그때는 분위기에 휩싸여 타마히코도 얼떨결에 그 결의에 서명하고 말았다.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지만 모임이 끝나고 제정신이 돌아오자 타마히코는 자신이 대체 무슨 일을 한 것인지 경악해했다. 자랑스러운 조국 대일본제국에 대한 반역을 모의하다니. 그게 황국신민 된 자로서 할 일이란 말인가?
그런 일을 겪고 난 타마히코는 마음이 심란하기 그지 없었다. 만일 그들의 음모가 들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분명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를 것이 분명한데. 그의 마음 속에선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이렇게 된거 걍 달리는 말에 올라타자”자는 쪽과 “이거 들키면 ㅈ되니 빨리 손절하고 ㅌㅌ하자”는 쪽이 대립하고 있었다.
“후우.”
타마히코는 한숨을 푹 쉬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과연 어떤 선택이 제대로 된 선택일지. 자신의 미래에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고민하며 말이다. 그때 아주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자세한건 모르지만 남편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서인지, 아님 기운을 차리라고 하기 위해서인지 모르지만 아나스타샤는 소파에 몸을 기대곤 심란한 표정을 계속 짓고 있는 타마히코를 끌어안았다.
“나에게 말하기 싫다면 심각한 고민이겠죠. 뭔진 모르겠지만 기운 차려요. 선배가 그렇게 있으면 나도 기분이 좋지 않다고요.”
타마히코는 그런 아내의 행동에 놀란 것도 잠시, 언제 맡아도 향기롭고 환상적인 그녀의 체향이 그의 코를 간지렵힌지라 콧구멍으로 숨을 내쉬며 그 향기를 맡기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타마히코의 머리가 향한 곳이 그녀의 가슴이었던지라 풍만하면서도 탄력있는 유방이 그의 얼굴에 직통으로 느껴졌다. 타마히코는 자신의 아랫도리가 점점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혹에 이성이 꺾이고 본능이 그의 머리를 지배하게 되자 타마히코는 그대로 아나스타샤를 공주님 안기로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침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얼굴 곳곳에 키스하면서. 처음엔 가벼운 베이비 키스였지만 점차 서로 혀를 섞고 끈적하게 타액을 교환하는 농밀한 프랜치 키스로 변해갔다.
침실에 도착한 타마히코는 아나스타샤를 마치 깨지기 쉬운 도자기 다루듯 조심스럽게 침대에 내려놓고선 그녀가 입고 있는 네글리제를 성급히 벗기기 시작했다. 이미 그의 눈은 정욕으로 가득한지 오래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화답하듯 그녀도 자신의 위에 올라탄 타마히코의 몸에 걸쳐진 목욕 가운을 벗기기 시작했다.
타마히코는 머리 아픈 고민은 뒤로 재처두고 아내와 사랑을 나눌 지금 이 시간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시간은 아직 많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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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목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2022년 겨울~봄에 E.E.샤츠슈나이더님이 진행하시고 저를 포함해 여러 회원분들이 참여했던 RPG를 소설화한 글입니다.
그리고 본문을 보면 알겠지만 출연진에 변동이 있습니다. 제가 어디서 그렇게 외치던(...) "아나스타샤 대신 타마히코가 참여했으면 어땠을까?"를 바탕으로 한 IF 버전입니다. 원작 등장인물은 여기서 그냥 아내(...)로 나올 예정입니다. 이것 때문에 원작과는 상당히 많은 변곡점이 있을 예정입니다.
거기에 댓글 및 로그를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내용이 많이 달라진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아무래도 쓰는 사람이 저인지라 주인공과 주요 시점은 제 캐릭터인 타마히코가 되겠네요. 그렇다고 다른 캐릭터들이 소외된다는 말은 아니고 타마히코 외 시점도 꽤나 나올 예정입니다.
아 참고로 소확행 소설 및 연대기에서 다른 RPG 캐릭터들이 카메오로 나왔듯이 다른 RP 등장인물들이 여기서도 카메오 출연할 예정입니다.
대학 강의 듣고 과제하고 그러느라 바쁘지만 일주일에 2편은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쌍따옴표는 작중 인물의 대사, 따옴표는 속마음입니다. 기울림체는 과거 회상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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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시트:
- 이름: 후지와라 타마히코(藤原 珠彦)
- 플레어: 카라멜 마끼아또
- 성별: 남성
- 생년월일: 1905년 9월 5일
- 클래스: 대지주 겸 사업가
- 민족: 일본인(중국계 일본인)
- 모국어: 일본어
- 구사가능언어: 관화, 영어, 러시아어, 에스페란토
- 능력치:
통솔(12)/체력(7)/지능(9)/지혜(12)/매력(10)
- 기술:
사령()/지휘()/관리(2)/전투(2)/운신()/조사()/연구()/설득()/논쟁()/기만(1)/선동()/사교()/강압(1)
후지와라 타마히코는 나이에 맞지 않게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제 막 26살이 된 젊은 상속자라는 점도 있겠지만 그 자신이 바로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만주 드림의 성공적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집안은 만주로 이주한 일본계 이민자로 만주의 혹독한 기후와 개척 초기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정착에 성공하여 드넓은 만주 벌판 한가운데에 있는 비옥한 농지를 차지한 대지주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타마히코에겐 천문학적인 재산을 가진데다, 그에게 매달 막대한 수익을 안겨주는 농지와 공장도 있습니다. 여기에 여신과 같은 아내까지 있으니. 사람들이 부러워할 것은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아, 물론 국적은 일본이 맞지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아름다운 아내가 옆에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민족은 일본인이 아닙니다. 그의 본래 이름은 링루이(凌睿)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본 민족은 중국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모두 일본인으로 여깁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러기 위해선 그의 과거를 되짚어봐야 합니다. 만주의 대지주인 링팡렁(凌方冷)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매우 유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타마히코가 8살이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자식에게 보다 더 넓은 시야와 많은 지식을 안겨주기 위해선 일본으로 아이를 보내는게 좋을거라 생각해 도쿄로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때부터 링루이는 타마히코가 된 것입니다. 일본은 매우 강력하고 부강한 열강이기에. 일본의 모든 것에 흠뻑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일본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모두 나오고 도쿄대에 진학해 졸업한 그는 계속 일본에서 지냈습니다. 중국 같은 낙후된 곳에는 돌아가기 싫었죠. 그가 관동주에 저택을 마련한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거기는 일본의 조차지니까요. 그러던 1930년 아버지 링팡렁이 사망하자 모든 재산이 유일한 상속자인 그에게 들어왔습니다. 타마히코는 이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자 했습니다. 일본 생활때 쓰던 이름을 자신의 정식 이름으로 등록하고, 국적을 일본으로 바꾸는 것은 첫 발걸음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업은 대성공이었습니다. 돈 앞에서 안 되는 것은 없으니까요. 거기에 신해혁명 이후 잦은 내전과 군벌들의 난립으로 만신창이가 된 중국의 행정체계도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중국인 링루이는 세상에 없었던 사람이 되었고. 일본인 후지와라 타마히코가 새로이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습니다. 뭐 그 이후로는... 세상에 잘 알려진 것처럼 되었습니다.
새로운 체제가 기존의 체제를 위협하는 1930년대는 그에게 있어 많은 기회를 줄 것입니다. 지금 바로 그의 인생을 바꿀 커다란 기회가 도착했습니다. 받고 안 받고는 그의 선택이겠지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뿌리칠 사람이 있을까요?
첫댓글 그때 생각 나네요...
이해가 안되는 나머지 어쩌다보니 대형 사건 벌였었죠...ㅎㅎ...
근데 타마히코 배경 알았음 계속 경멸하는 눈으로 봤을듯.
아나스타샤는 여성이라는 점과 기타등으로 두고보자지만 타마히코는 얄짤없이 자신과 부하들이 자주 처단한 대지주니...
거기에 타마히코는 역센징(...)
@돈이 곧 진리 김상덕 배경상 애초에 혈통이네 민족 같은거에 신경쓸 상황은 아니라서 그건 예외사항입니다.
당장 조선인이지만 딱히 조선 독립등에 관심이 없었잖습니까.
RP 글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응원합니다! 물론 과제가 우선입니다!(..)
AI를 통해 만들어본 타마히코(좌)와 아나스타샤(우)
가네다.
이게 ai라고...?
김필중.
김상덕.
나쓰메.
부숙경.
후네스키.
마사타케.
@돈이 곧 진리 다른 사람들 외모설정은 기억 안나니 말은 못하는데.
김상덕은 미인 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한 미묘한 느낌이네요
@931117 근데 운 나쁘면 불쾌한 골짜기 느끼는 그림도 많이 나와요.
@돈이 곧 진리 전 ai 그림 사이트로 심심해서 하나 만들어볼까 했는데(공화혁명이 일어난 1810년대 런던) 검색해 나오는 사이트는 죄다 유료라 포기
@돈이 곧 진리 신기하네... 가네다는 거의 저런 이미지를 생각해서 만들었는데 그걸 그리네요. 저기에 살짝 더 살이 빠지고 얍삽한 느낌만 들면 딱인데 저정도도 엄청 훌륭한 구현입니다 ㄷ
@통장 ai 발전이 빠르긴 한듯...
@통장 저 사진을 만들기 위해 리트를 5번이나 했는데 맞다니 다행입니다 ㅎㅎ
@돈이 곧 진리 5번...
@931117 아나스타샤는 자꾸 얼굴이 이상하게 나와서 리트를 무려 17번이나 했으니 5번이면 적은거죠. ㅎㅎ...
@돈이 곧 진리 17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