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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튼 DC 국립항공우주박물관에 보관을 하는 이 일본산 항공기는 자살폭탄을 위한 1회용 가미까제 폭격기이니 옆유리는 필요가 없는것 같으며 탈색이 될까봐 어두운곳에 보관을 하니 카메라 셔터스피드가 느려서 움직이는 여인이 흐리게 보인다.
제로센 전투기-2
전쟁이 문명의 발달을 가속화 하는데 1차 세계대전 때에는 거함 거포(巨艦巨砲)의 시대였지만 비행기가 전쟁에 사용된 후에는 양상이 바뀌어서 해전의 주연은 전함에서 항공모함으로 바뀌었고 제공권(制空權)을 장악하는 측에서 승리할 수가 있는데 그전에는 비행기가 폭탄을 목표물 상공에서 투하하지만 지금은 항공기에서도 추진력을 동반한 유도탄을 쏘는데 더 나아가서 자이로스코프를 장착을 하여 적국의 심장부를 때린다
1941년 12월7일 일본은(미국은 일요일)그동안 지속 되어오는 거짓말로 지속적인 평화를 희망 한다고 속인 것이 탄로가 난데 대해서 미국은 불평을 하지만 일급비밀 중에도 극비이어서 모든 암호 해독기를 파기하라는 것으로 봐서 전쟁이 임박 했다는 정도는 알았지만 실은 노무라 대사나 구루스 특파대사까지도 개전까지 확실한 정보는 모르고 있는 상태 이었던 것인데 개전 후에도 대통령은 신사답게 헐 국무장관에게 그들에게 정중히 대하라는 지시를 내렸단다.
하기야 주일 미국대사인 조셉 그루(Joseph Grew)도 전쟁을 모르는 상태 이었던 것이 미대통령이 그루 대사를 통해서 100년 전의 메시지를 상기하여 보낸 것만으로도 증명이 된다.
메시지 “일본국 천황폐하 약1세기 전 아메리카 대통령은 국민의 우정을 일본국민들에게 드리는 메시지를 천황께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메세지는 수락 됬고 그 후 우리 양국은 국민들의 미덕과......”
공습이 시작 된지 한 시간 후에도 기존의 외교 협상을 지속 시키는 일이 소용이 없을 것 같다는 언질은 있었지만 전쟁이나 공격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은 극비가 될수록 얻어지는 이익이 많은데 각본이 짜인 것을 증명하는것으로 실은 일본에서 하와이 까지 오려면 날짜가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하와이의 오하우 섬에 위치한 진주만은 1941년 12월 7일[일본은 8일, 세계에 알려진 날짜는 미국기준 7일 임]공격을 받았는데 날짜 변경선 때문에 일본에서는 8일 오후 3시가되며 해전 사상, 최대의 희생을 낸 전투였다.
펄 하보[Pearl harbor]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항구이다,
‘만’은 bay라는 단어가 따로 있으니 실은 ‘진주 항’ 이지만 지금도 '진주만'이라 부르는데 그 당시 한국인 번역사의 착오에서 온 것 같다[예; Chesapeake bay; 체사피크 만, gulf of Mexico; 멕시코 만, Tokyo bay; 동경 만]
그 해 11월말 일본해군은 본토로부터 3천 마일에 해당하는 대장정(大長程)이 있었으며 지휘관은 중장 나구모 다다이찌(南雲忠一)이며 그때에는 준장이 없기 때문에 별이 두개인 셈인데 쿠릴열도 남단에 위치한 에토로프 섬으로 군함들을 한대씩 어선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일본의 여러 기지에서 빼내어 집결시킨 후에 8척의 유조선을 동반하여 항공모함, 구축함 등 25척으로 미드웨이 900마일 부근에서 항로를 남동쪽으로 돌려서 하와이쪽으로 전열을 가다듬어 가면서 진격해 나갔다.
흔히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진주만 공격을 두고 일본이 승리를 했기에 그들은 ‘하와이 해전’ 이라 하지만 미국은 ‘그것은 전쟁이 아니었다.’고 하는데 이 말은 피해를 입은 미국은 전쟁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며, 미국은 ‘진주항 공격(Attack on Perl harbor)’ 이라고 부른다.
하기야 선전포고도 없이 태평성대국가를 새벽에 감행한 기습 한 작전이었으니 공격이라는 말이 더 의미가 깊다.
1940년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3개국동맹을 맺고, 1941년 소련과 중립 조약을 맺은 후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로의 침략을 꾀하였다.
다른 연합국들은 미온적이었으나 미국만이 강경일변도로 일본에 대한 석유 공급을 중단하고, 영국, 중국, 네덜란드와 더불어 경제 봉쇄로 맞서니 동맹3개국과 연합국은 2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하게 된다,
일본 측의 연합함대 사령관은 야마모도 이소로꾸(山本 五十六)이며 아버지가 56세에 태어났다고 하여 부쳐진 이름인데 사실은 백년 전 부터 고노가와 야마모도가[家]는 남자가 전쟁에서 죽고 없으면 남는 자식을 보내기로 약속이 되어있기 때문에 30년 전 고노가로부터 양자로 들어 온 것이다.
그는 20세에 황국해군사관학교 졸업 후 뤄시아(Russia)와의 해전에서 왼쪽 다리를 다쳤고 외손 손가락 2개가 잘리는데 나은 후 그래도 계속근무를 하게 된다.
국비로 미국으로 보내져 하버드해군 전투대학(1919-1921)에서 영어를 그리고 강자와 약자의 이념을 일본관리 중에서 아무도 온 일이 없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배우게 된다.
그리고 온건파인 그는 귀국 후 육군 항공술과 해군 항공술관계기관에 발탁된다.
다시 1924년 와싱턴으로 배속이 될 즈음에는 늙고 있었는데(40세)이곳 워싱턴시의 외교관 무관으로 3년간 근무했다.
그가 미국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골프에 비교 골프채가 약해도 공을 멀리 날리듯 미국해군이 약해도 세계적으로 막강하다는 것을 자인했다.
1930년 그는 해군제독이 되어 영국으로 회의 차 특사 자격으로 보내어 지는데 땅에서 나는 전투기 보다는 항공모함에서 나(飛)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배워 이 길만이 해군력을 증가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1933년 그는 다시 항모의 함장이 된 후 2년 만에 전격 진급하여 해군 부 장관에 발탁 된다.
이 노장은 항모를 만드는 길을 여러 번 건의 했지만 기존의 군함을 만드는 사람들이 중요한 자리에 있으니 그의 건의는 받아드려지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을 치르려면 전함은 총 가진 사람 앞의 사무라이 칼처럼 쓸모없는 것이 되지만 작은 전투기를 항모에서 발진하면 떼개미가 뱀의 등가죽 을 물어뜯어 죽이듯 항공모함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 했으니 그는 이미 군사력을 업그레이드하는 방법론을 숙지하고 있었다.
그가 강력히 주장을 하니 그를 나쁘다고 생각하는 전쟁 광 분자 들은 1939년 그를 살해하려 했지만 정부는 그를 다시 바다로 내보내어 죽임을 면하게 했다.
그런 후 그에게 총 함대 사령관직을 준 후 모든 해군 장관들을 경질시키니 그의 꿈은 드디어 아사히(朝日)처럼 부상 하게 되는데 그는 나중에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보직을 받게 된다.
미국을 직접 체험해 보아서 그가 아는 미국은 무섭고 거대한 산업능력, 공업력, 자원의 풍부성 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와 어른의 싸움 격이니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내지 조기종전을 생각했던 사람이었는데 태평양전쟁이 일어날 경우 처음에는 잘 나가겠지만 나중에는 자신이 없다는 것을 예측하는 군 계통에서는 가장 현명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폐하에게 암시를 준 것은 1년이나 1년 반 정도는 어떻게 싸워 해보겠지만 그이상은 자신이 없다고 했다는데 바둑을 잘 두니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이 선재공격을 했고 그는 친구에게 가족을 보살펴달라는 부탁까지 했으니 그는 이미 자기의 운명을 점치고 것으로 풀이 된단다.
고양이가 한반도의 토끼와 중원(中原:中國:오래전 중국인들은 세계 중심의 나라라고 이름지었다.)만 먹었으면 그만일 텐데 주제 파악에 조금 문제가 있었는지 남양군도(南洋群島)까지 먹으려고 잠자는 호랑이 미국의 한쪽 눈을 선제공격으로 찔렀으니 당분간은 어리둥절하겠지만 정신을 차린 후에는 일본은 패망을 자초하는 계기가 되는데 그 후 일본은 초강대국들을 세계의 전장(戰場)무대에 등장시키게 만든다.
야마모도의 생각에 일본이 동남아 쪽으로 세력을 뻗어나가면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미국의 태평양 함대가 밀고 나올 터이니 어차피 한번은 붙어야 되는데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자신이 없으므로 비정상적으로 기습작전 이외에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여 치명적인 선제공격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는데 속담에
“사랑과 전쟁은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All’s fair in love and war).”
고 되어있다.
그는 정부에 항공모함에 쉽게 렌딩(landing)을 할 수 있고 어뢰를 장착할 수 있는 제로센 전폭기를 청구 했다.
그 해 봄부터 야마모도의 계획은 세워지고 방파제가 필요 없는 진주만 비슷한 지형을 물색하던 중 진주만과 비슷한 규슈(九州)섬 남쪽에 자리 잡은 말발굽 형 만인 가고시마 만에서 5개월 동안 가상의 목표물을 향하여 숙지훈련을 쌓았다.
무전으로 날짜는 달이 있는 음력으로 19일 진주 항에는 금요일 날 배들이 들어왔다가 화요일에 나가니 일요일로 날짜가 잡히는데 암호는 ‘해 뜨는 시기는 산영’인데 산은 한문으로 팔자같이 생겼으니 실은 12월 8일을 의미했단다.
이 진주만 공격에 사용된 일본 비행기들은 미쓰오중좌가 이끄는 189대와 시마다끼소좌가 이끄는 171기 등인데 일본의 항공모함들은 230마일 전방에서 정박하고 있었으며 마지막 급유를 하고 유조선들을 본국 쪽으로 돌려보낸 후에 모든 함상기들이 매서운 찬바람을 박차고 기러기처럼 갑판을 줄지어 날아올라서 오하우 섬의 미국 최강 해군심장부를 향하여 비행을 했다.
피해를 본 미국의 함선 수는 7척 침몰, 9척이 파손9(수리 완료, 결국 2대만 손실)이고 추락 파손된 비행기는 188대, 손실은 사상자는 약 3,681명[2434명이 즉사]이었다고 하는데 함정으로부터 유출된 기름이 물위에 쫙 퍼져 있을 때 불이 붙으니 사망자들은 익사와 소사(燒死)한 군인도 더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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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 비행기만 봐도 무서워요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