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일본 도쿄 아다치구 기쿠야 세탁 공장에서 세탁된 셔츠들이 기계를 거쳐 비닐 포장된 상태로 나오고 있다. /기쿠야
일본 도쿄 미나토구에 사는 회사원 사와다씨는 지난 1일 일본 클리닝 업체 기쿠야(喜久屋)에서 택배 상자 2개를 배달받았다. 작년 9월 세탁을 맡겼던 여름옷 10여 벌과 신발이었다. 세탁 맡긴 지 7개월 만에 찾아간 셈이다. 사와다씨는 "집이 좁아 옷을 넣어둘 공간이 부족했는데 기쿠야에 세탁을 맡기면 장기간 보관해주는 덕분에 10년째 이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면서 "계절 옷을 보관하는 게 골치였는데 고민을 해결했다"고 말했다. 그는 "조만간 겨우내 입었던 점퍼와 코트를 기쿠야에 맡기고 올겨울에 되찾을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기쿠야는 독특한 클리닝 업체다. 세탁을 맡긴 뒤 6개월 이상 장기 보관해주는 '공간 창조 서비스'를 개발하면서 침체 일로를 걷던 이 시장에서 매년 5% 성장을 일구고 있다. 일본 클리닝 산업은 지난 1992년 8200억엔(약 8조1400억원) 규모에서 지난해 3700억엔(약 3조6700억원)까지 줄었다. 간단하게 집에서 빨래해도 무방한 유니클로 등 저가 패스트 패션이 인기를 끌면서 세탁소에 맡길 만한 옷이 갈수록 줄어들었기 때문. 이런 불리한 환경을 역발상으로 극복한 게 기쿠야였다. 전국 150여 점포를 보유한 기쿠야의 지난해 매출액은 12억5000만엔(약 124억원)이었다.
세탁물 6개월 보관 서비스
기쿠야에서 셔츠 한 장과 양복 한 벌을 세탁하려면 2800엔(약 2만7800원)을 내야 한다. 1200엔(약 1만2000원) 안팎인 경쟁 업체의 2배가 넘는다. 그러나 기쿠야를 찾는 고객들은 매년 늘고 있다. 무료 의류 보관 서비스인 '시티클로짓(City Closet)' 덕분이다.
기쿠야는 지난 2003년 자사의 대형 창고(1300㎥) 3곳을 고객들에게 개방했다. 고객들이 겪는 수납 공간 부족 고민을 해결해주기 위해서다. 전국 기쿠야 점포에서 고객이 맡긴 세탁물 170만여 점 중 약 40만점은 세탁 후 도쿄 인근 사이타마현에 있는 이 기쿠야 의류 보관 창고로 향한다. 영상 20도 이하, 습도 40~60%로 유지되는 전자 캐비닛은 햇빛 차단은 물론 방충까지 된다.
최근에는 이 서비스를 휴대전화로 이용할 수 있는 'e클로짓' 서비스도 나왔다. 인터넷으로 신청하면 점포 직원이 집으로 와 세탁물을 가져간 뒤 원하는 시기까지 보관해주는 것이다. 시티클로짓 서비스를 시작할 때만 해도 동종 업계 업체들은 "이런 게 되겠어?" 하고 비아냥거렸다. 직원들조차 "창고 비용을 만회할 만한 수익을 보장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지금 시티클로짓은 기쿠야의 대표 서비스로 꼽힌다.
업무량 일정해져 직원들 야근 사라져
보통 세탁 업체 성수기는 4월과 11월이다. 겨울과 여름에 오래 입은 옷을 보관하기 위해 이때 마지막 세탁을 맡기기 때문이다. 반면 1~3월, 7~8월 비성수기의 세탁 물량은 성수기 절반에 불과하다. 기쿠야 측은 "성수기에는 밤 12시까지 세탁 공장을 돌리는 반면, 비성수기에는 오후 3시만 돼도 일이 끝나버린다"고 했다. 그러나 기쿠야는 이런 의류 보관 서비스를 통해 '가동률 평준화'에 성공했다.
4월, 11월에 쏟아져 들어온 세탁물을 바로 세탁하지 않고 보관하다가 일감이 비는 비성수기로 넘겨 세탁하는 것이다. 공장 설비는 이미 성수기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매달 가동률 75%를 달성하고 늘어나는 물량도 감당할 수 있다는 게 기쿠야 측 설명이다. 업무량이 일정해진 덕분에 공장 직원들의 야근이 사라졌다. 기쿠야 직원 오구리씨는 "정해진 물량을 정해진 시간에 소화할 수 있게 돼서 야근 없이 일과 가정을 챙길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기쿠야 측은 "직원이 자기 생활을 챙길 수 있고, 회사는 세탁률을 높일 수 있어 서로에게 좋다"고 했다.
고객과 소통에서 아이디어 발굴
시티클로짓과 함께 기쿠야의 대표 서비스로 꼽히는 것이 2003년 시작한 '문라이트(moonlight)' 서비스다. 밤늦게 점포를 찾은 고객이 점포 주인에게 '늦게 와서 정말 미안합니다' 하는 모습을 본 직원이 낸 아이디어였다. 기쿠야 측은 "고객이 겪은 불편에 우리가 개발해야 할 서비스가 숨어 있다"고 밝혔다. 이후 기쿠야는 밤 11시까지 점포 문을 열어 밤늦게 퇴근한 직장인 고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시티클로짓 서비스를 시작하기 전에는 10차례에 걸쳐 고객 300명과 간담회를 가졌다. 기쿠야는 처음에는 이 서비스를 유료로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자 고객들이 "세탁료를 올려도 좋으니까 무료로 하는 게 이용을 더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반대하자 계획을 변경했다.
지금도 기쿠야는 수시로 이메일 등으로 서비스 만족도 조사를 해 업무를 개선한다. 고객의 의견을 듣기 위해 세탁물을 돌려줄 때 함께 주는 '프라이드 카드(후기 카드)'도 10년째 운영하고 있다.
창업주 2세 "세제 푸는 일부터 배워… 일본만 보면 망해, 태국·필리핀·뉴욕에 진출할 것"
“보관이 우선이고, 세탁은 덤이죠. 재밌지 않습니까?”
일본 클리닝 업체 기쿠야의 나카하타 신이치(中畠信一·55·사진) 사장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우린 원래 옷 세탁 전문이었지만, 지금은 이보다 더 중요한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면서 “바로 이런 ‘역발상’이 쪼그라드는 일본 클리닝 산업에서 성장을 이뤄내는 비결”이라고 강조했다.
나카하타 사장은 창업자 2세다. 아버지 나카하타 겐지(中畠憲治) 뒤를 이어 1998년부터 사장을 맡고 있다. 1984년 말단 사원으로 입사한 뒤 14년 만이었다. 그는 “세탁 공장에서 손으로 물에 세제를 푸는 일부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그가 회사 경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철학은 ‘산포요시(三方よし)’ 정신이다.
산포요시는 일본 에도 시대 시가(滋賀)현에서 활동하던 오우미 상인들의 경영 이념으로 “파는 사람도 좋고 사는 사람도 좋고 세상 사람에게도 좋아야 한다”는 뜻이다. 나카하타 사장은 “상거래란 그래야 한다”면서 “고객과 거래처와 가맹점주, 그리고 기쿠야 직원들에게까지 ‘기쿠야라서 좋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기쿠야가 착안한 ‘시티클로짓’이나 ‘문라이트’ 서비스는 일본 특유의 서비스 경쟁력이 녹아 있다. 이른바 ‘오모이야리(思いやり·배려)’ 정신으로, 고객이 뭘 원하는지 아주 작은 부분까지 읽어내서 반영하려 하는 적극성이다. 나카하타 사장은 “상대방이 불편하게 느끼는 게 뭔지 항상 고민하고 연구해서 이를 기발한 서비스로 해결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산포요시’와 ‘오모이야리’를 발판으로 일본 클리닝 시장에서 빛을 발한 기쿠야는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일본 시장만 바라보다간 ‘레드 오션’에서 좌초할 수 있다고 보고, 기쿠야 모델을 해외로 이식하려는 것. 지난 2013년 ‘시티클로짓’ 서비스를 들고 태국으로 건너갔다. 나카하타 사장은 “현재 방콕에만 점포 22곳과 의류 보관 공장 1곳을 두고 있다”며 “올해는 40점포로 확대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어 “의류 보관 서비스라는 콘텐츠가 개발도상국은 물론 선진국에서도 통할 수 있다”면서 “필리핀과 뉴욕에도 진출하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기쿠야(喜久屋)
설립 1956년 본사 도쿄도 아다치구 대표이사 나카하타 신이치 자본금 1000만엔 직원 220명(점포 제외) 사업 내용 세탁, 의류 보관 서비스 매출 12억5000만엔 (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