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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5장9~15절/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포도나무 비유를 가르치시면서 가지에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하는 방법에 대해 두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가지치기입니다. 가지가 열매를 많이 맺게 하기 위해선 군살이나 거품 등을 제거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비전이나 믿음에도 거품 현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믿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거품 현상이나 착각은 실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과감하게 꺾어버리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지치기는 한 순간의 아픔과 고통을 안겨주지만, 나무 전체를 살리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가지치기에서 살아남은 가지들로 하여금 많은 열매를 맺도록 더욱 깨끗이 하고 보호하며 관리해 줍니다. 이것이 농부의 심정이요, 하나님의 당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봄이 다가옵니다. 농부들은 지금부터 쉼 없이 자신의 밭을 가꾸고 돌볼 것입니다. 추수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밭에 심겨진 나무들이 풍성한 열매를 기대하면서 땀을 흘릴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로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면 두 가지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나타내는 것이 됩니다. 나뭇가지가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원리는 ‘예수님께서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십니다.
9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예수님의 보호와 능력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 안에 거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해석하신 대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랑은 죄책감과 상처투성이인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치유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 사역하고 헌신하며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상한 영혼이 치유가 되고 회복 되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병에 걸린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환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직장이나 사역이나 비전이 아니라 속히 그 병을 낫게 하는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죄 용서함과 영혼의 치유 및 회복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서 방황하고 병들어가는 영혼의 회복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둘째는 예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알아봅시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한 것 같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은 사랑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에서, 주위 사람들이 믿어주고 사랑해 주고 있다는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지만 그런 말로써 우리의 삶에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신다는 믿음 때문에 우리는 위기나 고난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한 데서 출발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 사랑이 어느 정도 인가하면,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구원의 섭리를 완성하신 만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 동질의 그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이고 절대 깨어질 수 없으며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입고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만 확신한다면 십자가도 질 수 있고 무슨 일이든지 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헌신하지 못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는 주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확신하는 부인은 어떤 위기와 고난도 이겨냅니다. 아내의 사랑을 확신하는 남편은 절대로 방황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알아봅시다. 예수님께서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베풀어 주신 사랑은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계산으로 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 안에 거할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고 확실하며 영원합니다. 그 사랑은 치유와 회복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랑 안으로 들어와 살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았든, 어떤 죄를 지었든 상관없이 모든 것을 치유하고 회복시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지닌 특성은 조건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이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사랑입니다. 뿐만 아니라 변함이 없고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이므로 누구든지 그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사55;1)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마11;28)를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께서 부르시는 대상입니다.
또한 우리가 얻은 구원이 지닌 영원한 효력입니다. 예수와 연합한 자들, 그 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이러한 축복과 특권을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습니다. 주께서 이 관계를 끊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관계가 영원하듯이 예수님과 성도의 사랑의 관계 또한 영원합니다. 이 사람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세상의 사랑과 차이가 있습니다.
10절에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 말씀은 굉장히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사랑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르는 것이 사랑이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사랑이며, 주님의 말씀대로 생각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감정이나 의지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이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살아있으면 그분께서 살아 계시는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죽어있으면 그분께서 죽어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내 안에 거하라,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내 계명을 지키라’ 말씀하신 것은 모두 같은 뜻입니다. 이 말씀은 시대나 상황의 변화에 맞추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받아 철저히 지켜나갈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11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 안에, 예수님의 사랑 안에, 예수님의 계명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상급과 축복을 받습니다. 바로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없는 참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기쁨은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이며,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님들의 얼굴이 주님의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귀신이 주님의 기쁨으로 충만한 성도님들의 얼굴을 보고 들어오려다 말고 도망가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기쁨이 충만한 얼굴엔 귀신이나 불안이 들어올 수도 없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표정 관리가 잘 안됩니다. 넘쳐나는 기쁨을 감출 수 없는 언어, 표정, 눈동자, 얼굴을 가진 사람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외로움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거절하고 신경질을 내며 욕하고 소리 지르는데 곁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에게 참 기쁨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 넘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쁨이 있을 때 모든 세포가 되살아납니다. 기쁨으로 넘쳐나면 말도 부드러워지고 눈빛마저 다정해집니다. 기쁨은 어떤 죄도 용서하고 어떤 실수도 회복시켜 줍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 대해 절대로 용서하지 않고 엄격하게 대하는 율법적인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왜 자신을 못살게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고독이나 불안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12절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신·구약 성경 전체를 녹여서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곧 십자가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은 한마디로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일관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사랑을 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은 사랑 대신에 권력을 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정, 직장, 사회 등에서 권력을 가지려 합니다. 권력이란 자신의 영향력을 많이 발휘해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힘을 말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말 한마디로 모든 일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최고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그 사랑이 우리들에게 나타나야 합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또 부부 사이에도 주님의 사랑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실수나 허물에 대해서도 서로 사랑으로 극복한다면 모든 문제들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위대한 까닭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며 용서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순결하기에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13~14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예수님께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해 줍니다. 그것은 자기의 친구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희생의 실천이 뒤따르는 사랑입니다. 국가나 부모에 대한 사랑을 위해서는 목숨을 버리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애국지사들의 삶이 그러한 것이고 또 부모가 자녀를 위해, 혹은 자녀가 부모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버리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목숨이란 온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입니다(마16;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목숨을 친구를 위하여 내어준다면 이는 친구에 대한 사랑이 최고의 사랑임을 분명하게 입증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요즘 세상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기는커녕 친구를 상대로 사기나 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들게 합니다. 사기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가장 친한 친구를 상대로 사기 치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나 자식 사랑하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친구 사랑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것을 최고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버리신 진정한 친구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명령대로 행하면 나의 친구”라 말씀합니다. 결국 예수에 계명에 대한 순종이 제자됨과 사귐에 있어서 필수적임을 알게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계명을 소홀히 하거나 지키기 않는다면 그는 예수의 친구라 할 수 없으며 그분과 사귐이 없는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말이나 지식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바로 계명에 대한 순종입니다. 이러한 순종이 강제적이 아닌 자발적인 사랑의 행위인 것입니다.
15절에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하나님과 우리는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친구의 관계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인과 종은 상하관계이고 일방적인 관계이며, 자유가 없는 관계이고 의무만 있고 특권이 없는 관계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종이라 하지 않으시고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개념의 대혁명을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과 친구 관계를 이룰 수 있지만, 신과 친구 관계를 이룰 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친구가 돼 주셨습니다. 일면 경외하고 존경해야 할 대상이 아닌 하나님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신에 대한 개념을 친구의 개념으로 바꿔주시면서 인간과 가까이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개념은 친구 관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나의 벗’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하나님을 친구의 개념으로 대하게 됩니다. 친구 사이는 수직 관계가 아니라 수평 관계입니다.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쌍방적 관계입니다. 의지에 따른 선택이 있는 자유로운 관계입니다. 의무와 동시에 특권이 주어지는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친구라고 불러 주십니다. 일방적으로 섬기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사랑을 나누는 인격적인 관계라고 확정해 주십니다.
오늘 성도님들은 네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 예수님 안에,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둘, 하나님께서 참된 축복인 기쁨을 주십니다. 셋, 최고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넷, 예수님께서 우리의 친구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영원히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