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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한국 빵의 역사
조선인이 처음 접한 ‘서양떡’
오늘날의 한국어 ‘빵’은 일본에서 전해진 것이다. 18세기 일본인들은 포르투갈어 ‘팡데로(Pao-de-lo)’를 ‘팡’이라 불렀고, 이것이 식민지시기 이후 한국에서 빵이 되었다. 그렇다고 식민지시기 이후에야 한반도 사람들이 빵을 처음 알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19세기에 선교를 위해 한반도를 찾았던 유럽 출신 가톨릭 신부의 가방에도 빵이 들어 있었다.
비록 한반도에서는 아니지만, 그 보다 앞서 빵을 맛본 조선인이 있었다. 1720년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이 연행사로 베이징에 갈 때 함께 갔던 그의 아들 일암(一菴) 이기지(李器之, 1690~1722)가 바로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베이징의 천주당(天主堂, 가톨릭성당)에서 ‘서양떡(西洋餠)’을 먹어본 경험을 자신의 연행록인 《일암연기(一庵燕記)》에 기록해두었다.1)
서양인들이 나를 다른 방으로 맞아들여 앉도록 했다. …… 식사를 대접하기에 이미 먹었다고 사양하니, 서양떡 서른 개를 내왔다. 그 모양이 우리나라의 박계(薄桂, 밀가루에 참기름과 꿀을 넣고 반죽해 직사각형으로 큼직하게 썰어 기름에 지진 조선의 과자로 한자로는 ‘중박계(中朴桂)’라고 쓴다)와 비슷했는데, 부드럽고 달았으며 입에 들어가자마자 녹았으니 참으로 기이한 맛이었다. 만드는 방법을 묻자, 사탕과 계란, 밀가루로 만든다고 했다. 선왕(숙종)께서 말년에 음식에 물려 색다른 맛을 찾자, 어의(御醫) 이시필이 말하길 “연경에 갔을 때 심양장군(瀋陽將軍) 송주(松珠)의 병을 치료해주고 계란떡(雞卵餅)을 받아먹었는데, 그 맛이 매우 부드럽고 뛰어났습니다. 저들 또한 매우 진귀한 음식으로 여겼습니다”라고 했다. 이시필이 그 제조법에 따라 만들기를 청하여 내국(內局)에서 만들었지만 끝내 좋은 맛을 낼 수가 없었는데, 바로 이 음식이었던 것이다. 내가 한 조각을 먹자 그들이 곧 차를 내왔는데, 대개 이것을 먹은 후에 차를 마시면 소화가 잘되어 체하지 않기 때문이다. 뱃속이 매우 편안했으며, 배가 부르지 않았지만 시장기를 잊을 수 있었다.2)
이기지가 맛본 ‘서양떡’에 사탕, 계란, 밀가루가 들어갔다고 하니, 아마도 그 떡은 카스텔라(castella)일지 모른다. 카스텔라는 계란 노른자와 설탕․물엿․꿀을 섞어 충분히 젓고, 계란 흰자는 따로 거품을 내어두었다가 나중에 함께 섞은 뒤 여기에 밀가루를 넣어 가볍게 저은 다음 팬(pan)에 부어 구워서 만든다. 이것을 다시 팬에 넣고 철판으로 눌러 180℃ 정도에서 한 시간가량 구워낸다.
동아시아에 소개된 카스텔라는 포르투갈의 무역선을 타고 들어왔다. 16세기 초반 이미 타이완을 점령했던 포르투갈의 무역선에는 아시아 선교에 열중하던 가톨릭의 예수회 신부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 남단에 도착해 성당을 세우고 포교활동을 했다. 그중 베이징에 도착한 프랑스와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신부들은 오븐을 구할 수 없자 그 대용으로 벽돌로 만든 난로에다 카스텔라를 구워 자신들도 먹고 현지인에게도 나누어주었다. 이기지가 베이징에서 카스텔라를 맛볼 수 있었던 것도 예수회 신부 덕택이었다.
그 맛에 반한 사람 가운데는 이기지의 글에 나오는 이시필(李時弼, 1657~1724)이란 의관도 있다. 그는 이 카스텔라를 조선에서 다시 만들어보려고 애를 썼던 듯한데, 그의 저서 《소문사설(謏聞事說)》3)에 카스텔라 만드는 법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던 모양이다. 빵의 주재료는 밀가루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밀은 주로 겨울에 파종해서 한여름인 음력 6월에야 추수를 하는 겨울밀이다. 그것도 황해도를 비롯해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생산되었다. 또한 겨울밀은 봄밀에 비해 글루텐 성분이 적어서 빵을 만들려고 해도 반죽이 쉽게 되지 않았다. 빵을 만들기 좋은 봄밀도 이스트도 사탕도 없는 조선의 한양에서 빵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탕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카스텔라도 만들기 어려웠다.
하지만 일본 나가사키에서는 이 카스텔라를 일본인들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특히나 아래에서 불을 피우고 뚜껑에도 불을 붙인 탄을 올려두는 솥이 개발되어 18세기 이후 카스텔라는 급속하게 일본 음식으로 진화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쫓겨났던 일본인이 1883년 다시 서울에 대거 거주하면서 일본식 빵이 비로소 ‘서양떡’이란 말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한반도 빵의 역사는 일본에서 개량된 일본식 빵의 도입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1920년대 후반에 한반도의 도시에서 빵의 시대가 열렸다. 빵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는 밀가루다. 이미 1919년 5월에 지금의 북한 진남포에 일본인이 제분공장을 설립해 성업 중이었다. 1921년 11월 서울 용산에도 일본인이 풍국제분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왜 이렇게 한반도에 일본 제분회사가 많이 생겼을까?
1934년에 출간된 가다 나오지(賀田直治)(1877~?)가 쓴 《조선공업조사기본개요(朝鮮工業調査基本槪要)》에서는 당시 조선의 “밀가루의 수요는 연간 8,000만 근, 200만 포대 정도가 되지만, 조선에서 생산하는 양이 반도 되지 않기 때문에 매년 일본에서 6,000만 근을 들여온다”4)라고 했다. 19세기 말부터 조선미(朝鮮米)가 일본으로 대량 유출되는 바람에 조선인들은 끼니를 해결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밀가루 소비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비록 밀가루를 주재료로 한 소비음식이 중국음식과 우동 따위였지만, 빵의 수요도 무시할 수 없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만주를 장악한 제국일본은 만주산 밀도 함께 손에 넣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초 일본인 위주로 이루어지던 빵 제조업에 조선인의 참여가 늘어났다. 1942년의 자료에 따르면 빵과 과자업에 종사한 일본인 업자 수는 155명인 데 비해 조선인의 수는 두 배가 넘는 323명이었다.5)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는 군대의 쌀밥 급식으로 인한 각기병을 해결하기 위해 밀가루로 만든 빵을 군인들에게 공급하도록 했다. 이 정책은 식민지 시기에도 지속되었는데, 군납을 위한 빵 제조에 조선인들도 뛰어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빵 제조업자 비율의 반등은 해방 이후 일본인이 떠난 뒤에도 한국 사회에서 일본식 빵집이 지속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일본 빵의 시조 에가와 히데타쓰
일반적으로 일본식 빵의 시조는 에가와 히데타쓰(江川英龍, 1801~1855)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군용 식량인 ‘효료(兵糧)빵’을 개발했다. 효료빵은 전투 때 쌀밥을 짓는 것보다 미리 만들어놓은 빵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판단에서 개발된 것이다. 한편, 1868년 사쓰마(薩摩)(오늘날의 가고시마鹿児島 현)의 메이지유신 주동자들은 당시 에도(江戸)(오늘날의 도쿄東京)에 있었던 후게쓰도(風月堂)라는 과자점에 군용 빵을 만들라고 요구했다. 서양식 군대를 만들고 싶었던 메이지유신 전후의 일부 사무라이도 전투용 식량으로 빵이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러일전쟁 중이던 1905년 밀가루와 쌀가루에 계란 등을 배합해 맥주 이스트로 발효시킨 ‘갑면포(甲麵麭)’라는 빵이 개발되었다.6) 이 갑면포는 ‘간팡(カンパン, 乾パン)’이라고도 불렸다. 간팡은 보존과 휴대가 편리하도록 비스킷 모양으로 만든 빵이다. 구울 때 일반 빵처럼 공기구멍 없이 성형해서 가마에 넣으면 터져버리기 쉽다. 그래서 간팡에는 구멍이 두 개 나 있다. 굽는 방식은 비스킷과 같지만, 그 발상은 빵에서 나온 것이라 마른 빵이란 의미에서 ‘건(乾)’ 자를 붙여 간팡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한국 군대에서 지급되는 건빵이 바로 이 간팡에서 유래한 것이다.
간팡 외에도 맥주 이스트를 많이 쓰지 않은 일본식 빵이 여러 가지 개발되었다. 그중에서 한반도에 큰 영향을 끼친 빵이 ‘안팡(あんパン, 餡パン)’이다. 한국어로는 단팥빵이라고 부른다. 소를 넣은 만두를 연상시키는 이 빵은 다른 서양빵보다 훨씬 급속하게 일본인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안팡의 인기는 식민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팥의 단맛이 익숙지 않은 빵맛을 친숙하게 만들었다. 안팡이 큰 인기를 끌자 이익을 좀 더 남기려고 팥 대신 싼 곡식 가루에 석탄타르에서 뽑아낸 착색료를 묻혀 안팡을 만드는 업자도 나타났다.7)
운동회에서 빵 먹기 경기에 주로 사용된 작은 다마고(卵)빵이란 것도 있었다. 밀가루에 설탕․계란․탄산수소나트륨을 넣고 가볍게 섞어서 계란 모양 틀에 넣어 구운 건조빵인데, 단맛이 강했다. 이스트를 구하기 어려워 이스트 대신 탄산수소나트륨을 넣어 부풀린 이 다마고빵이 조선인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다마고빵은 계란빵이라고도 불렸다. 1921년 4월 21일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연희전문학교 운동회의 빵 먹기 대회 장면이 실렸는데, 거기 나오는 빵이 바로 다마고빵이다. 이런 장면은 운동회가 열리는 곳이면 어디서든 볼 수 있을 정도로 다마고빵의 인기는 대단했다.
현미로 만든 빵도 인기를 모았다. 일본어로 ‘겐마이팡(げんまいパン)’은 밀가루 대신 현미가루를 넣고 청주 만들 때 쓰는 누룩으로 부풀린 빵이다. 이 빵을 큰 나무 상자에 넣고 다니면서 판매하는 아이들의 사진이 1923년 2월 4일자 《동아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겐마이팡은 청소년들에게는 인기만큼 비애도 담긴 음식이었다. 1927년에 부산상고 2학년에 다니던 김규직은 《조선일보》 11월 30일자 〈학생문예〉에 ‘빵’이란 제목의 글을 실었다. “빵빵 겐마이빵, 깊은 밤에 외로이 들리는 저 소리, 고학생이 부르는 생명의 빵 소리, 불평한 사회를 호소하는 듯, 줄기차게 줄기차게 외우친다, 그 소리 위대한 힘 가진 그 소리, 나는 절하고 싶네.” 고학생이 교복을 입고 밤늦게 도시의 골목길을 돌아다니면서 겐마이빵을 파는 소리를 들은 김규직은 이 시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일보 담당 기자는 이 글을 “폐부를 찌르는 정의감이 약여(躍如, 생생하고 뚜렷)하다”라고 평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빵은 빈부의 극단을 넘나드는 음식이었다.
식민지 시기 빵 행상은 큰 자본 없이도 생계를 이을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필자가 쓴 《식탁 위의 한국사》에서도 소개했듯이, 1932년 1월 1일자 《별건곤》 제47호에는 김원진이란 필자가 쓴 〈나는 왜 이럿케 됏나, 나는 왜 빵 행상을 하나〉라는 글이 실렸다.8) 학교 교사도 했던 김원진은 돈이 없어서 빵 행상을 한다며 “먹어야 살고 입어야 사는 인간이니 돈 없는 우리는 품팔이도 하고 자유 행상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일본인 제과점에는 식빵도 있었다. 프랑스어로는 ‘팽 드 미(pain de mie)’, 영어로는 ‘로프 오프 브레드(loaf of bread)’라고 부르는 식빵은 1880년대 일본에서는 ‘쇼쿠팡(しょくパン,食パン)(식빵)’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일본에서는 ‘쇼쿠팡’을 주로 아침 식사 대용으로 먹었는데, 식민지 조선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모던보이와 모던걸은 아침 식사로 먹기 위해 일본인이 운영하는 제과점에서 ‘쇼쿠팡’을 구입했다.
해방과 함께 미군의 남한 주둔은 빵을 다시 부각시킨 계기가 되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상류층 중에는 빵에 익숙한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그들은 해방 후 미군이 제공해주는 밀가루와 설탕으로 만든 빵을 무척 반겼다. 이 점에 주목해 제과업에 뛰어든 사람 중에 허창성(許昌成, 1914~2003)이라는 인물이 있다. 황해도 옹진 출신의 허창성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14세 때부터 옹진의 제과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1945년 10월 말 소규모 제분업을 했던 형의 도움과 미군에서 쏟아져 나오는 설탕·버터·캔디 등을 이용해 빵과 과자를 만드는 상미당(賞美堂)이란 상호의 제과점을 고향 옹진에 열었다.1)
일본인과 조선인 제빵업자들이 기존에 만들어둔 빵 유통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허창성은 고향에서 제과업으로 성공하였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허창성은 장인의 권유를 받아들여 1948년 5월 서울 을지로로 상미당을 옮겼다. 그러나 주변에 제과점이 너무 많아서 상미당의 영업은 부진을 면치 못했다. 어떻게 하면 빵을 싸게 팔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허창성은 중국인이 운영하던 호떡집에서 무연탄 가루로 불을 때는 가마를 보았다. 그는 이것을 응용해 기존의 벽돌 가마를 ‘제빵용 무연탄 가마’로 바꾸어 빵 굽는 데 들어가는 연료비를 90%까지 아낄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그의 사업은 유지되지 못했다. 허창성은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서울에서 상미당을 운영하다가 1959년 용산에 빵과 함께 비스킷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삼립산업제과주식회사’다. 1961년 10월부터 빵과 비스킷을 대량생산했는데, 특히 1968년 5월 주한 미군에 빵을 군납2)하기 시작하면서 삼립산업제과주식회사는 당시 국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양산업체로 자리를 잡았다.
상미당보다 조금 늦은 1947년 5월, 서울역 뒤편의 중림동에 ‘영일당제과’가 문을 열었다. 이 제과점의 주인 윤태현(尹台鉉)(1910~1999)은 전라남도 해남 출신으로 식민지 시기 경성의 미쓰코시(三越) 백화점에서 양복기술자로 일했다. 그러다 해방 이후 미군이 한국 사회에 풀어놓은 밀가루에 주목해 딱 5년만 제과점을 차려 돈을 모을 생각을 했다.3) 그런데 한국전쟁 이후에도 과자와 빵 사업이 계속해서 호황을 누리자 제과점을 접지 않고 계속 이어갔다. 특히 1956년에 일본식 과자를 응용하여 만든 ‘산도’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산도’에 얽힌 이야기는 1999년 한 방송국에서 주인공을 여성으로 바꾼 〈국희〉라는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상미당은 삼립산업제과주식회사로, 다시 삼립식품과 샤니로 변화를 거치면서 사업을 확장했다. 특히 허창성의 차남이 맡은 샤니는 1980년대 이후 찐빵 판매와 함께 파리바게뜨와 파리크라상 같은 프랜차이즈 빵집을 열어 사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2014년 11월 현재 파리바게뜨의 국내 매장은 무려 3,200여 개에 이른다. 파리바게뜨와 경쟁하는 CJ(씨제이)의 뚜레쥬르는 1,200여 개 매장을 개설하고 있다. 영일당제과는 ‘산도’의 포장지에 그려놓은 ‘크라운’ 마크를 응용해 1956년에 회사 이름을 크라운제과로 바꾸었다. 2005년 해태제과를 인수하면서 빵은 물론이고 과자류에서도 국내 대기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와 같이 1960년대 이후 한국의 빵은 이른바 ‘양산업체’라고 부르는 공장에서 대량생산되었다. 이들 양산업체가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군대라는 대량 소비처가 있었다. 일본에서 빵이 확산된 배경에 전투 식량이었던 효료빵이 있었듯이, 한국의 빵 양산업체도 군대 납품을 통해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이름난 회사뿐 아니라, 강원도 원주 같은 군사 도시에는 군대에 빵을 납품하는 소규모 공장이 여럿 있었다. 이곳 사장들은 대부분 군부대의 납품 담당 장교나 하사관과 혈연, 지연 혹은 학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은 미국에서 싼값으로 밀을 들여와 제분한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큰돈을 벌었다. 아울러 1953년 미국의 원조식량에 의지해 실시된 초등학교 급식빵 제도도 양산업체가 성장하는 데 힘을 보탰다. 여기에 박정희 정권의 혼분식장려정책은 양산업체를 본격적으로 키운 토양이 되었다.
그렇다고 1960~1970년대 한국인이 먹었던 빵이 모두 양산업체에서 생산된 것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미 필자의 책 《식탁 위의 한국사》에서 소개했듯이 당시 서울을 비롯한 도시의 중심가에는 반드시 유명한 빵집이 여럿 있었다. 특히 1960년대 정부가 나서서 혼식을 장려하면서 급속하게 개인이 운영하는 빵집이 늘어났다.4)당시 빵집의 간판은 ‘○○당’이나 ‘○○사’ 같은 일본식 빵집 이름이 대부분이었다. 식민지 시기 재조일본인이 운영했던 빵집의 영향이 1960년대까지 지속된 결과였다. 가령 최근에 전국에 이름이 난 군산의 ‘이성당(李姓堂)’은 1920년 일본인 히로세 야스타로(広瀬安太郎)(1869~?)가 일본식 과자와 빵 기술을 가지고 와서 세운 ‘이즈모야(出雲屋)’라는 제과점이었다. 해방 이후 이즈모야 옆에서 ‘하코방(판잣집)’ 같은 제과점을 하던 ‘이씨’가 적산가옥으로 나온 이즈모야를 구입해 ‘이성당’이란 상호로 다시 개업한 제과점이다.5)
하지만 1950년대 중반 이후 생긴 빵집은 독일빵집, 뉴욕빵집, 뉴시카고 같은 서양식 이름을 붙였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의 영향력이 빵에 개입된 결과였다. ‘독일’ 혹은 ‘뉴욕’과 같은 빵집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양에서도 번성한 지역의 이름일수록 효과가 컸다.6) 아마도 1960~70년대에 청소년 시기를 보낸 독자라면 아버지가 퇴근길에 빵집에서 사온 달콤한 빵맛을 추억으로 가진 사람이 많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뉴욕제과․고려당․태극당 등에서 빵을 사왔다고 하면 형제자매가 서로 먹겠다고 다투기까지 했다. 심지어 고급 호텔에서 운영하는 제과점, 아니 베이커리에서 만든 빵을 맛보는 경험은 특별한 계층이 아니면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1980년대 이후의 큰 변화는 소규모의 지역 빵집 가운데 몇몇 빵집이 기업형 대형화의 길을 걸었다는 점이다. 그중 고려당․뉴욕제과․신라명과 등의 제과점이 빵을 공장에서 생산하는 프랜차이즈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빵 양산업체의 판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유명 지역 빵집의 약진으로 인해서 1960~70년대에 성업했던 양산업체들이 문을 닫았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파리바게뜨와 뚜레쥬르라는 프랜차이즈 업체의 등장으로 양산업체는 물론이고 동네 빵집까지 시장에서 내몰리게 되었다. 이 프랜차이즈 업체를 단순히 빵집이라고 부르기에는 온당치 않다. 그들은 대형 공장에서 각종 빵을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 업체를 비롯하여 재벌가에서 운영하는 빵집을 두고 ‘재벌 빵집’이라고 부른다.
21세기 초입 한국 사회에서 빵은 여전히 부식의 자리에 머물면서 공장에서 찍어낸 틀에 박힌 맛으로
사람들의 입맛을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새로운 변신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모습이 펼쳐지고 있다. 1990년대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지면서 일본식과 미국식 빵맛에 길들여져 있던 많은 한국인이 유럽의 오래된 빵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에는 빵 만드는 일이 자연친화적인
직업임을 깨닫고 제빵 관련 일을 하려는 사람도 많아졌다. 유럽인들은 빵을 신이 인류에게 내린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에서 저절로 생겨나 자라는
발효의 매개물인 이스트 때문이다. 동네 빵집의 제빵사가 직접 이스트를 체집해 자신의 부엌에서 만들어낸 빵이야말로 생태적이면서 인간적인 음식이다.
2000년대 이후 한국에도 자연친화적 수제 빵집이 등장해 공장제 빵맛에 길들여진 한국인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고 있다. 한국 빵의 변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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