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동서남북
입맛에 맞는 사장 뽑으려...이번엔 ‘알박기’ 방송법인가[동서남북]
조선일보
신동흔 기자
입력 2022.12.13 03:00
https://www.chosun.com/opinion/dongseonambuk/2022/12/13/RZAF4CGVUZEOTLUUU5T2QE6H6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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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임위 통과한 방송법 개정안
PD·기자 단체 등에 이사 추천권
겉으론 공영성 강화 내세워
지난 2일 더불어민주당 단독으로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를 통과한 방송 관련법 개정안은 현재 9~11명인 KBS와 MBC(방송문화진흥회), EBS 이사회 정원을 21명으로 늘리고, 여야의 이사 추천 권한을 국회·시청자·학계·방송 종사자 단체에 나눠주는 것이 골자다. 얼핏 보면 이사 정원과 추천 단체의 숫자가 늘어 다양성이 강화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특정 시민단체 그룹과 방송사 직원들이 경영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길을 터준 측면이 더 크다.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이 정청래 위원장의 방송법 개정안 관련 찬반 토론 종료에 항의하고 있다. 2022.12.2/뉴스1
4명의 이사 추천권이 주어진 시청자위원회는 그동안 “특정 성향 시민단체 인사들이 회전문처럼 드나들어 왔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지난 8월 KBS1노조와 시민단체 대안연대가 2018년 이후 세 차례 임명된 KBS 시청자위원을 분석한 결과, “언개련이나 광우병대책회의 등 민노총과 각종 대책위에서 공동 활동을 벌였던 단체 추천 인사들이 상당수 포함됐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대로라면 이들 단체와 가까운 성향 이사들 머릿수를 늘려주는 역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PD연합회’ ‘방송기자연합회’ ‘방송기술인연합회’는 아예 법 조문에 단체 이름을 박아 버렸다. 이는 비슷한 사례를 찾기도 힘들다. 방송 전문가들 사이에선 “임의 단체의 이름을 법에 명시한 것은 처음 본다” “법률에는 ‘방송 관련 직능 단체’ 정도로 규정하고 구체적인 사항은 시행령에 위임했어야 한다”는 견해가 많았다. 이 법안에 따르면, 이들 세 단체엔 2명씩 6명의 이사 추천권이 주어졌다. 공적(公的) 지배를 강화한다면서 직원 단체에 전체 정원의 3분의 1에 육박하는 이사 추천권을 준 것이다. 이들은 민노총 산하 언론노조와 함께 방송사 경영을 좌지우지해온 단체들이다. 문재인 정부 첫 KBS 사장인 양승동씨의 경우, 한국방송PD연합회장과 언론노조의 전신(前身)인 KBS사원행동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직능 단체 출신들이 대거 이사회에 들어갈 경우, 공영 방송 개혁에 필요한 구조조정이나 경영 혁신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 지상파 관계자는 “(법에 권한이 명시된다고 하니)앞으로 직능단체 활동 열심히 해야겠다는 사람들까지 있더라”고 전했다. KBS만 해도 아나운서협회 경영협회 등 사내 직능단체가 10여 개가 훌쩍 넘는데, 이 3단체만 이사 추천 권한을 법으로 보장받는 이유도 따져봐야 한다.
이사회의 주요 업무는 공영방송 사장을 선출하는 것이다. 이번 법안에 따를 경우, 이른바 사장후보국민추천위원회가 올린 후보에 대해 이사회의 3분의 2 이상 동의를 얻으면 확정된다. 이 때문에 사장 선출 정족수인 14명은 ‘매직 넘버’로 불린다. 숫자에 능하지 않더라도, 2명 내지 3명 확보가 가능한 국회 교섭 단체 몫 이사에 시청자위원회, 직원 단체, 학계에 4~6명씩 분산된 이사 추천 숫자를 잘 합치면, 친(親)민주당 진영이 손쉽게 14명을 차지할 수 있도록 설계된 ‘알박기’ 방송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혹시 다른 변수가 발생하지 않도록, 방송사 직능 단체 연합의 이름을 법률 조문에 못 박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의 방송법 개정안 중 방송사 직능단체인 PD연합회, 기자연합회, 방송기술인연합회의 공영방송 이사 추천권을 명시한 조항
현재 여야가 나눠서 갖는 공영방송 이사 추천 제도는 완벽하지 않다. 그래도 선거에 반영된 국민들의 민의(民意)가 간접적으로 대표되는 측면은 있다. 반면, 이번 법안은 아무리 들춰봐도 국민들 요구보다 방송 종사자들이나 특정 성향 시민단체의 이해관계가 더 많이 반영됐다는 인상을 준다. 지역·세대·업종·분야별로 다양한 우리 사회의 다원성을 대변하지도 않는다. 진정한 ‘국민의 방송’을 만들고 싶다면, 현재 집권 여당이 거부할 수 없는 법안을 만들어 제안했어야 한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법안을 던져 놓고 비판만 한다면, 정쟁(政爭)의 소재로 삼겠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5년 전 전임 박근혜 정권에서 임명한 KBS·MBC 경영진과 이사들을 내쫓기 위해 파업을 벌이고 이사들의 일터까지 쫓아가 망신 주기를 감행했던 민노총 산하의 방송사 언론노조와 민주당이 이번에도 한 건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