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大學)에 기록하기를 畜馬乘-말과 수레를 끌 정도의 넉넉한 집안에서는 不察於鷄豚-닭과 돼지 같은 사업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百乘之家-백대의 수레를 동원할 능력이 있는 집안에서는 不畜聚斂之臣-세금을 잘 걷는 신하를 두어서는 안 된다! 此謂國不以利爲利-이것은 국가가 이익만을 추구해서는 안 되고, 以義爲利也-의(義)를 중요시 생각하여야 한다! 대학(大學)
12대 300년 이어온 “경주(慶州) 최부자(崔富者)”의 부자 철학 !!
12대 300년의 긴 세월 “만석꾼”을 이어간 경주 최부잣집 이야기는 여러 번 들어도 가슴에 울림이 남는다. 부자(富者)가 지녀야 할 도덕과 철학을 제시한 집안이기 때문이다.
최부잣집의 “부자 철학”은 아래와 같다. 첫째-만석(萬石)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한다. 둘째-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한다. 셋째-흉년에 논밭(田畓)을 사지 않는다. 넷째-나그네(過客)에게 대접을 후하게 한다. 다섯-시장이 끝날 무렵인 파장(罷場)에 물건을 사지 않는다. 여섯-벼슬은 진사(進士) 이상 하지 않는다. 일곱-시집온 며느리는 3년 동안 비단옷을 입지 말고 무명옷만 입어야 한다.
만석(萬石)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한다는 원칙은 인간으로서 끝없는 물질에 대한 욕망의 포로가 되는 것을 막게 하는 철학이다. 욕심을 멈출 줄을 아는 “지지(知止)”의 지혜를 실천한 것이다.
최부잣집의 사회에 재산 환원(還元) 방식은 소작료를 낮추는 방법이었다. 다른 부자들은 대개 7할 정도의 소작료를 받는 것이 조선 후기의 관례였다.
그러나 “경주 최부자”는 4할 정도만 받았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전국에서 발생한 “소작 분쟁”의 원인이 7할이나 되는 과도한 소작료를 내려 달라는 항의가 이었음에 비추어 보면 “경주 최부자”의 4할 소작료는 시대를 앞선 혜안(慧眼)의 지혜와 결단이었다.
흉년(凶年)에 논밭을 사지 않는다는 철학도 대단하다.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상황이 되면 서민(庶民)들은 가지고 있던 몇 마지기 논이라도 헐값에 팔아서 목구멍에 풀칠을 해야 한다.
흉년에는 “흰죽 논”이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흰죽이 끓여져 있는 솥단지 하나와 논 한 마지기를 맞바꿔서 생긴 논이 바로 “흰죽 논”이었다. 그만큼 흉년의 배고픔은 견디기 어려웠다.
필자는 1950년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런 배고픔은 겼었다. 그 당시 산에는 소나무 제일 윗 순(사투리로 일명 송구)은 전부 껍질을 벗겨 먹었고 들에는 쑥. 돌미나리. 씀박이등 먹을 수 있는 풀들은 다 뜯어 먹었다.
그러니까 지금 세대와 기성세대(旣成世代)와의 가치관(價値觀) 차이가 있는 것이다.
다른 부자(富者)들은 “흰죽 논”을 대거 사들였지만 경주 최부잣집은 “흰죽 논”을 절대 사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자신의 재산 늘리는 기회로 삼는 것은 부자(富者)가 할 도리가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다.
흉년(凶年)에 “흰죽 논”을 사들여서 재산을 늘린 다른 부자들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운동”이 일어났을 때 집이 불타고 사람이 죽었다. “동학농민혁명운동” 난리(亂離)가 났을 때 평소에 쌓여 있던 개인감정을 앙가픔하는 법이다.
전남 구레 부자 운조루(雲鳥樓)의 타인능해(他人能解)가 그랬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준 선행(先行) 때문에 지리산 공비(共匪)들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했다.
세상의 인간사(人間事)는 원칙(原則)이라는 논리(論理)보다 인정(人情)과 도리(道理)가 더 중요한 작용을 할 수도 있다.
“최부잣집”의 부자(富者)의 도덕적 철학은 세계에 내놓을 만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 할 수 있다. (위의 내용은 2006.07.05 조선일보 기사를 편집 정리한 것이다.)
농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