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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JESUSONE 원문보기 글쓴이: 제이원
시편 32:1~11 무엇이 복인가? 2020. 12. 30
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2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6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2)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7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8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9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아니하리로다 10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11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표제어를 보면 ‘다윗의 시, 마스길’로 되어 있습니다. ‘마스길’의 각주를 보면 ‘교훈’입니다. 이 시편은 학자들이 회개의 시로 분류하지만, 다윗이 회개하여 용서받은 기쁨을 노래하기에 교훈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회개하였기에 허물이 사함을 받고 죄가 용서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회개한 것이 나의 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회개를 너무 강조하여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가 없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회개조차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허물은 반역의 뜻이 있고, 죄란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뜻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한 단어로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합니다. 우리 말에서 허물이란 흠을 말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의미는 뱀이나 매미가 허물을 벗는다고 합니다. 사람의 피부에서 나오는 각질이 벗겨지는 것도 허물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때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허물은 죄의 결과로 나오는 잘못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죄의 결과로 인한 허물이라면 우리가 죄인이기에 늘 허물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허물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다는 이 복이 어떠한 복인지 알려면 죄와 허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겁니다.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설교가 됩니다. 연말연시가 되면 사람들은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그 인사말 중에 가장 많은 내용이 무엇입니까? 복 받으라는 말인데 요즈음의 복은 주로 건강을 말합니다. 인사말도 시대 따라 달라집니다. 밥도 먹지 못할 때의 인사는 ‘진지 잡수셨습니까?’ 전쟁 중에는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그런데 이런 인사를 할 때 ‘허물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지는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이런 인사말을 한다면 사람들이 좋아할까요?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할 겁니다. 그런데 이런 복을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것은 자기 죄가 무언지 모르고 죄의 용서가 무언지 모르기에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죄가 무언지 알게 되고 그 죄를 토설하여 용서 받은 자는 이 복을 압니다.
2절입니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간사함이란 나쁜 꾀로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 간사함이 없다는 것은 자기의 속마음을 그대로 노출 시키는 겁니다. 그러나 죄인인 인간은 자기의 간사함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 스스로 속이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모습이 죄인의 특징입니다. 물론 아주 분명한 윤리 도덕적인 잘못들은 어느 정도 인정한다고 하여도 순순히 인정하지 않고 자기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미 아담의 타락때부터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누가 선악과를 따 먹었느냐고 할 때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하와가 먹으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하와는 뱀에게 핑계를 댑니다. 이런 모습이 간사함입니다.
그런데 이런 간사함이 없어지려면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완전하게 자기 죄가 드러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셔야 합니다. 다윗의 예를 들어보면 자신이 간음하고 살인하고도 자기 죄와 허물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예를 들어 책망하여도 남의 일로 듣고 있습니다. 그런 놈은 죽어 마땅하다고 합니다. 이런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가 그 악한 자가 바로 당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자신이 어머니의 모태로부터 죄 가운데 잉태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행한 모든 일이 죄뿐임을 알기에 자기 죄를 시인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이것이 간사함이 없는 겁니다.
3~4절을 다른 번역으로 봅니다. “3 내가 입을 다물고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 온종일 끊임없는 신음으로 내 몸은 탈진하고 말았습니다. 4 주님께서 밤낮 손으로 나를 짓누르셨기에, 나의 혀가 여름에 풀 마르듯 말라 버렸습니다. (셀라)” 주님께서 회개하도록 밤낮 손으로 짓누르셨기에 온몸이 탈진하고 여름이 풀 마르듯이 발라 버렸다고 합니다. 이것은 죄를 고백하도록 하나님께서 누르신 겁니다. 그런데도 죄를 고백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두 가지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앞에서 본 대로 죄를 짓고도 죄를 모르는 겁니다. 죄를 모르고 죄를 짓고 있는 것도 영혼이 메말라 죽는 일입니다. 또 하나는 죄를 지적하여도 회개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죄인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보아도 이런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책망하면 얼른 잘못했다고 비는 아이가 있고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아이도 있습니다. 물론 앞의 아이는 영악하여 매를 덜 맞으려고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아이는 자기의 시각으로 볼 때 매 맞을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버티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는 분이시기에 우리가 회개할 때까지 누르십니다. 그래서 죄를 토하여 내도록 만드시고야 마십니다.
4절 끝에 (셀라)가 나옵니다. 셀라는 찬송을 할 때 간주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잠시 멈춤으로 1~4절의 내용을 다시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우리도 다시 1~4절을 읽겠습니다. “봉독” 셀라가 붙어있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너무나 어마어마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허물과 죄를 깨닫고 회개함으로 사함을 받는 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시편 19:12절입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자기 허물을 깨달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죄와 허물이 드러나서 주께 간사함 없이 용서를 구하는 이 모습 자체가 이미 허물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졌기에 구하는 겁니다.
5절입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1~4절의 내용이 있기에 5절이 있습니다.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고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않게 되는 일은 주님께서 주야로 나를 누르시기에 나오는 일입니다. 주께서 나를 누르셔서 죄악을 토설하여 만드셨기에 주께 아뢰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주께서 내 죄를 사하셨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그러므로 여기 한 절에서 다시 셀라가 나옵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다가 간주를 하는 이유가 셀라 때문입니다.
6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이 접속사는 1~5절을 알아야 연결됩니다. 그러니 다시 1~5절을 봅니다. “봉독” 자신의 허물과 죄를 알아 회개하게 되는 자들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열심히 일하신 결과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용서를 받은 자들이 모든 경건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이란 자기 죄와 허물을 알고 용서받은 자들을 경건한 자라고 합니다. 특히 시편에서 경건한 자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말하는데 이들은 자기를 의지할 힘이 없어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경건한 자도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를 알게 하시고 그래서 회개하여 용서받은 자들이 경건한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리하면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노아의 홍수 때도 방준 안은 안전합니다.
그런데 ‘주를 만날 기회’ 앞에 각주 2)가 있습니다. 그 각주를 보면 ‘죄를 깨달을 때’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를 만날 기회가 언제입니까? 우리는 주님을 만나기를 힘쓰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일은 말씀 보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하면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잘 드리자고 하는 것은 주님과의 만남을 위한 겁니다. 그런데 예배조차 나의 공로가 되어 버린다면 오히려 주님을 만날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를 만날 기회란 죄를 깨달을 때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 죄를 깨닫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죄란 세상이 말하는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인데(요16:9) 이 죄를 누가 깨닫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는 다른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들이란 자기의 행위를 믿는 겁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깨닫게 되는 일은 오직 은혜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은혜가 먼저인지 죄가 먼저인지를 물었습니다. 은혜가 먼저입니다.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하여 죄를 개입시키는 겁니다. 그러므로 죄도 은혜를 알게 하는 하나의 도구입니다. 물론 이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죽음으로만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 곧 성도는 날마다 주를 만날 기회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날마다 죄를 깨닫기에 오늘도 주님께 기도합니다.
7절입니다.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하는 자는 홍수가 범람하여도 그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노아가 은혜를 입어 방주를 예비하였듯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죄를 깨닫게 되었다면 주님께 기도합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을 은신처라고 고백합니다.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셀라가 나옵니다. 이사야 61:10절은 구원의 옷을 입히신다고 합니다.
8~11절입니다. 다윗이 받은 그 은혜를 증거 함으로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한다고 합니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들의 특징을 무지한 말과 노새에 비유합니다. 그러므로 주를 만날 기회 곧 죄를 깨달을 때 주께 기도하고 돌아오라는 겁니다.
나는 죄가 너무 커서 교회 못 가겠다는 분들이 있는데,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는 많은 슬픔이 있지만,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 곧 죄를 깨닫고 주께 구하는 자는 그 인자하심으로 둘러 주십니다. 이러한 은혜를 입은 의인들은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치라고 합니다. 마음이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깨닫게 되어 주님께 솔직하게 고백한 자들입니다.
로마서 4:6~8절입니다.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7 ㄴ)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바울 사도가 시편 32편을 인용하면서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김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이 일한 것도 없이 은혜로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앞뒤로는 아브라함에 관한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 일한 것이 없이 오직 은혜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복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22:31~34절입니다.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4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내가 너를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전한 것은 일한 것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나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하였지만,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나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돌이켜 주셨다는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4:39절입니다.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동네로 돌아가서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한 분이라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이 말은 자신의 죄를 동네 사람들에게 다 드러내는 일입니다. 자신을 숨기려고 한낮에 물 길으러 온 여인이 예수님의 용서를 입었기에 자신의 과거의 죄가 드러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 용서의 위력을 맛본 겁니다.
로마서 11:32~36절입니다.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3)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않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기능이기도 합니다.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라고 하셨는데 그 율법 지킴을 자기의 의로 치환한 자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화를 퍼부었습니다.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두셨는데 스스로 순종한다고 나오는 자들이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마음이 간사한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그 마음에 간사함이 없다는 말은 내가 무엇을 꾸미고 나갈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자들은 오늘 본문이 참으로 복된 소식이 됩니다.
요한일서 1:8~10절입니다. “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2)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우리 안에 진리가 임하였다면 자신의 죄를 알고 자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죄인인 줄 아는 것이 진리가 임한 증거입니다. 이런 자들은 죄를 자백하고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는 중에 신천지에서 10년을 넘게 열심히 다닌 분이 딸과 함께 상담하겠다고 왔습니다. 약 한 시간 동안 오늘 설교 본문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였습니다. 일한 것도 없이 주시는 은혜를 왜곡하여 온갖 헌신과 충성을 하라고 하고서는 그 이익을 교주가 가져가는 것이 이단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일한 것도 없는 정도가 아니라 죄만 지은 자들에게 주님께서 회개하시도록 누르시고 죄를 고백하게 하셔서 용서하시는 이 놀라운 복이 충만한 나라입니다.
연말연시 인사를 오늘 본문 1~2절로 대신합니다. “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2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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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JESUSONE 원문보기 글쓴이: 제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