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성(27·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 일본을 다시 찾는다.
갓 맨유 유니폼을 입고 아시아 투어에 참가했던 2005년 7월 이후 3년 5개월만이다.그는 14일 토트넘 원정을 마친 후 곧바로 일본행 비행기에 올라 23명의 맨유 정예멤버들과 함께 국제축구연맹(FIFA) 클럽월드컵에 출전한다.
@ 미우라는 박지성에게 프로의식을 심어준 선수로 기억된다. |
알렉스 퍼거슨 감독과 웨인 루니 등 맨유 선수단은 반드시 우승을 거두겠다고 벼르고 있다. 맨유는 8년 전인 2000년 브라질에서 열린 제1회 세계클럽월드컵에서 베컴의 퇴장, 네빌의 실수 등 악재가 겹치며 바스코 다가마(브라질)에게 1-3으로 패하며 조3위(1승1무1패)로 예선 탈락한 바 있다. FA컵 불출전이라는 강수를 두며 준비했던 것에 비해 초라한 성적표였다. 15일 일본에 도착할 맨유는 18일 오후 7시30분 요코하마 국제 경기장에서 감바오사카(일본)-애들레이드 유나이티드(호주)전 승자와 준결승전에서 맞붙는다. 일본은 박지성에게 남다른 곳이다. 2000년 6월부터 2003년 1월1일까지 교토 퍼플상가 소속으로 첫 프로 생활을 보낸 곳이기 때문이다.
박지성은 최근 니혼TV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에서 2년 반 정도 뛰었다. 교토는 내가 프로에 데뷔한 팀이기때문에 일본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특별한 기분이다"며 "일본은 내가 최초로 경험한 외국이었고 문화의 차이, 생활 방식 등 많이 달랐던 만큼 배웠다. 그런 것들이 경험이 됐고 좋은 선수가 될 수 있었다. 한국과 일본에서 뛰었던 것이 유럽에서의 활약으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교토에는 19살 박지성에게 잊을 수 없는 3명의 은인이 있었다.
▲가능성을 인정해준 기무라 분지(교토 퍼플상가 강화부장)
2000년 4월 기무라 강화부장은 한국을 찾았다. 허정무 한국 대표팀 감독과 김희태 명지대 감독으로부터 추천받은 박지성을 보기 위해서였다. A매치에 뛰기로 돼있던 박지성은 발목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다. 기무라 강화부장은 그냥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유망주를 발굴하는데 정평나있던 그에게는 무언가 남다른 느낌이 있었던 모양이다. 예정에도 없이 명지대 축구단을 찾아와 팀에 복귀해 상무와 연습경기에 출전한 박지성을 직접 살폈다. 그리고 교토 입단 계약서를 내밀었다.
A급 계약이었다. 일본 유망주들도 첫 프로 입단 때는 B, C급 계약이 대부분이었던 터라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사실 당시 박지성은 시미즈S펄스에게도 영입제안을 받았지만 C급 계약(연봉 4800만원 이하)이라 망설이고 있던 터였다. 이제 막 대표팀에 부름을 받던 풋내기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제시한 기무라 강화부장은 명지대 이사장실에서 "박지성 군은 가능성이 충분한 선수다. 두뇌 회전이 빠르고 운동량도 많다. 그리고 미드필드 어느 곳에서든 뛸 수 있다. 교토에서도 잘해주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6개월 후 교토는 2부로 떨어졌다. 박지성이 합류하던 때 교토는 2승1무12패(승점7)에 불과했던 최약체였다. 후기리그 들어 박지성이 합류하면서 6승1무8패(승점19)로 분위기를 전환했지만 끝내 강등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2부로 강등된 후 박지성은 K-리그행을 고민했지만 기무라 강화부장의 설득에 잔류를 결심했다. 2002년 들어 박지성의 연봉을 인상시켜준 이도 기무라다. 또한 PSV 아인트호벤으로부터 이적제안을 받은 후 잔류를 요구하다 박지성의 의지를 확인한 후 흔쾌히 이적에 동의해준 사람도 기무라였다.
박지성은 고마움을 일왕배 우승으로 갚았다. 2002년 12월 31일까지 계약돼있던 박지성은 2003년 1월 1일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가시마 앤틀러스와의 결승전에 뛸 의무가 없었다. 하지만 의리를 위해 경기에 나선 그는 0-1로 밀리고 있던 순간, 동점골을 뽑아냈고 동료 쿠로베의 역전골을 어시스트하며 교토에게 창단 후 첫 우승을 안겼다. 기무라 강화부장 역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한 달 후 박지성의 통장에는 교토에서 보내온 한달 치 월급이 송금돼있었다. 기무라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최전방에 찔러주는 공간패스, 악착같이 달라붙어 공을 빼앗는 적극적인 플레이, 상대의 강한 압박을 헤집고 돌파하는 드리블 능력과 볼 키핑력 등 박지성은 그야말로 미드필더의 '교과서' 였다"
▲선수 생명을 지켜준 게르트 엥겔스 감독
올시즌 우라와 레즈를 맡았던 독일 출신의 게르트 엥겔스(51) 감독은 교토 시절 박지성의 스승이었다. 선수들의 몸 상태를 체크해가며 충분한 휴식을 제공하고, 눈앞의 성과보다는 1~2년 후를 생각하는 엥겔스 감독의 철학은 박지성을 롱런할 수 있던 자양분이었다. 2부리그에 머물던 2001년 박지성은 부상이 없었음에도 전체 경기 수의 80%에 밑도는 38게임만 소화했다. 엥겔스 감독이 어린 그를 혹사시키지 않았던 탓이다.
요즘도 엥겔스 감독은 가끔씩 박지성과 이메일을 주고 받는다. 지난 5월 박지성이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뛰지 못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무척 아쉬웠다. 2주 전 이메일을 통해 격려했는데 피곤한 모양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오는 12월 클럽월드컵에서 다시 만나면 좋겠다"고 덕담했다. 하지만 엥겔스 감독은 올시즌을 채우지 못하고 우라와 감독직에서 경질되고 말았다.
2000년 가모슈 감독의 경질로 교토 지휘봉을 이어받은 엥겔스 감독은 박지성의 영입으로 숨통을 텄고 그에게 무한 신뢰를 줬다. 하지만 엥겔스 감독도 박지성의 최적 포지션을 두고 1년 넘게 고심해야했다. 사실 이 때문에 박지성도 적쟎이 고민했다. 매 경기마다 포지션이 달라지는 탓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엥겔스 감독은 박지성의 역할을 두고 기무라 강화부장과 의견 차이가 컸다.
결국 이들이 찾아낸 최고의 자리는 왼쪽 수비형 미드필더였고, 빠른 공수전환이 가능할 수 있도록 전체적인 밸런스를 맞추는 역할이 주어졌다. 엥겔스 감독이 그를 여러 포지션에서 시험가동한 것은 거스 히딩크 당시 한국대표팀 감독에게는 큰 도움이 됐다. 일본 통인 핌 베어벡 코치를 통해 박지성의 매 경기를 체크하게 하면서 최적의 자리를 찾은 것이다.
결국 히딩크 감독은 수비에만 머물던 박지성의 공격본능을 끄집어내며 2002한일월드컵 성공을 일궜다. 이후 엥겔스 감독도 박지성을 공격 옵션에 포함시켰는데, 교토 시절 그의 득점 대부분은 한일월드컵 이후에 터져나온 것들이다. 당시 엥겔스 감독은 이렇게 인터뷰했다. "교토의 공수(攻守) 흐름은 박지성의 발끝에서 시작된다. 나는 그만큼 박지성을 신뢰한다"
▲프로 의식을 알려준 미우라 가즈요시
평균 22∼23세의 어린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던 당시 교토에는 최고 연봉(약 9억원)을 받던 팀의 간판이자 리더였던 미우라 가즈요시(41·요코하마 FC)가 있었다.
한국인으로 바라본 미우라에 대한 선입견은 그다지 좋을 리 없었다. 하지만 막상 겪어본 미우라는 신사였고, 따뜻한 선배였다. 숙소 1층에 머물며 사감 역할까지 도맡으며 팀에 헌신한 미우라였다. 2000년 7월 일본에서 만난 박지성은 "한국음식점으로 데려가 밥을 사주고 항상 편하게 대해줘 초창기에 겪는 경계심을 없앨 수 있었다. 역시 한 국가를 대표할 만한 훌륭한 선수다"고 말했다. 지난 4월 박지성은 "어떻게 생활하는 지 유심히 지켜봤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훈련에 더 집중하고 열정적이었다. 또 동료들을 독려하는 모습도 자주 봤다"면서 "프로 의식을 심어준 선수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2000년 6월 24일 제프 유나이티드와의 홈경기. 박지성이 J리그에 데뷔한 날이다. 전날 박지성은 미디어 컨퍼런스에 나섰다. 당시 일본 기자들은 막 입단한 한국의 새내기에 관심이 많았다. 그와 함께 인터뷰에 나선 이는 다름아닌 미우라였다. 당시 미우라에게 던져진 첫 질문은 '옆에 서있는 한국의 무명 선수 플레이를 일주일 정도 지켜본 소감'이었다. 미우라는 박지성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내일 경기(제프전)에서 두 선수의 약속된 플레이가 있느냐'는 질문은 "여기서 알려주면 들통난다"는 농담으로 피해갔다. 제프전 경기 당일. 오른쪽 수비형 미드필더를 맡은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미우라에게 볼을 공급한 후 그 뒤를 바짝 붙어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이날 교토는 3-2로 승리했다. 경기를 마친 후 미우라가 박지성을 찾아와 "아까 네가 준 패스를 살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대선배의 격의없는 말 한 마디는 대표팀 주장 박지성의 리더십의 한 줄기다.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worldfootball&ctg=news&mod=read&office_id=241&article_id=0001966622&date=20081213&page=1
첫댓글 설마... 박지성이 퍼플상가를 키워줬니.. 어이없네 일본이 돈주고 좋은선수 잘본거지 등등 이런댓글 안달리길...ㅎ...//외국인최초 일본클럽 주장..홍명보생각나넴..
원창이 형님의 저 환한 웃음 하하하하
아 그 유명하신 최원창씨ㅋㅋ
잘읽고 있었는데 맨마지막에 갑자기 신뢰도가 떨어지네
하하 저 유명하신분은 설마..?
올만에 괜찮은 기사 하나썼네...;; 근데 마지막은 역시나;;ㅋㅋㅋㅋ
좋은글이네요 ㅋㅋㅋㅋ
비의 명언이 생각나는군. 역시 될놈은 되ㅜㅜ 일본에선 골좀넣자ㅜㅜ
원창이횽이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헐 귀신같은남자
예언자 최원창.
이제 모두가 아는 원창이횽ㅋㅋㅋㅋ저 훈훈한 미소ㅋㅋㅋㅋㅋㅋㅋ
아놔 원창아....
박지성에대해 많은걸 알게되어서좋았음...
개념기사 ㅋㅋ
최원창이 박지성에 대한 기사는 괜찮죠.. 개인적인 친분이 있으니...
그래도 최원창 인맥 ㅎㄷㄷ 하던데 웬만한 축구선수들 다 최원창과 친분있다죠 ..
[최원창의 마법... ]1단계 : 한선수를 동시에 여러구단으로 이적시켜버리는 기술로 소설계의 유망주로 떠오름 2단계 : 그 후에 이어지는 헛소리로 소설가로서의 대못을 박아버림 3단계 : 기사를 읽고난후 댓글을 보려고 하는순간 해맑은 미소로 모두에게 좌절감을 줌 4단계 : 네티즌들이 기사를 읽기전에 제목을 꼭 확인하려고 마음먹음 5단계 : 마음만먹으면 한동안 없어졌다가 까먹을때쯤 나와서 해맑은 미소로 모두에게 좌절감을 줌 6단계 : 아무리 기사를 잘썼다고하더라도 '최원창'이라는 세글자를 보는순간 찌라시로 보임
님들 바스코 다가마 그 무슨 항로 개척한 사람 아님?
인도항로 개척
기사 재밌게 잘읽다가 마지막 저 미소를 보면 'ㅋㅋ 니들 또 나한테 낚인거야'는 느낌같아..ㅋㅋ
ㄳ
ㄳ
축구팬중 최원창모르면 간첩
원창이형의 신작 소설 언제나오나요??
정말좋은글이라서 10점 기자가 창이 형님이라서 -100점
개념 기사 써도 짜증이 나는 정말 유일한 기자분... ㅋㅋ 해외연예기사 쓰시는 분 중에도 그런 분 한 분 계셨는데 ㅋㅋ
최원창씨 그래도 박지성이랑 친해서 우리가 모르는 부분들 기사로 자주 써주는데..ㅋㅋ 박지성이 예전에 PSV시절 처음에 부진했을떄 한국 기자들 나중에 다 취재하러 잘 안올떄 유일하게 남아서 계속 기사 써주고 응원해준 기자가 있어서 개인적으로 형,동생 처럼 허물없이 친하게 지낸다 했는데 그게 아마 원창씨가 맞을 듯
최원창씨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뭐 사실을 말해도 그렇지 ....ㅋㅋㅋ 이적 부분에 대해선 최원창 기사 믿을게 없다는거 동의하지만 박지성 관련된 부분은 믿을만하죠
최원창씨 기사는 무조건 말머리달려있네요 ㅋㅋㅋㅋ 언젠간 글씨제목 지정색도 생길듯..ㅋㅋㅋㅋㅋ
원창 ㅋㅋ
최원창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에서 그냥
미우라 정말 멋진 선수네요. 제일 고참일때도 훈련 제일 열심히 하는 선수 였다고 하던데..예전에 한일전에서 골 넣고 춤추던 모습만 기억에 있었는데 이렇게 멋진 선수일줄 몰랐어요.
by h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