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자도가 튤립을 축제하다
2013. 4. 22. 금계
50년 전, 60년 전에 비하면 나는 여전히 지금도 달걀 값과 시계 값과 꿀 값에 유감이 많다. 옛날의 물가에 비교하며 턱없이 싸기 때문이다. 지금도 내 동생들은 5남2녀의 장남인 나한테 유감이 많다. 모처럼 명절 날 광주 어머님 댁에 모여 식사를 하다가 밥상에 달걀 요리가 올라오면 어김없이 나를 코너로 몬다.
“성님! 그 때 달걀 비빈 밥이 목구녁에 지대로 넘어갑디여?”
우리 집에서는 알 낳는 암탉을 스무 마리가량 키웠는데 그 닭들이 낳는 달걀은 꼬박꼬박 모았다가 장에 내다 팔아 가용에 보태 썼다. 아무도 그 달걀 맛을 볼 수 없었다. 다만 장남인 내가 밥맛이 없다고 하면 어머니는 날계란을 툭 깨뜨려서 내 밥을 비벼주었다. 노르께한 달걀 비빔밥이 내 목구멍에 넘어갈 때마다 동생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내 목구멍밖에 몰랐으니 수십 년이 지난 후까지 동생들의 원성을 들어도 대꾸할 말이 없다. 그냥 얼굴이 벌개져서 어색한 웃음을 흘릴 뿐이다.
지금은 달걀 한 개 값이 껌 하나 값과 비슷하니 어이가 없다.
시계는 또 어떤가. 나는 대학 다닐 때까지도 손목시계가 없어서 가게의 기둥시계를 기웃거리며 시간을 짐작하곤 했다. 볼펜 끄트머리에 디지털시계의 숫자가 깜박거릴 때 나는 억장이 무너졌다. 왜 시계 값이 똥값이 되었단 말인가.
꿀은 옛날에 영양식품을 초월하여 보약으로 손색이 없었다. 서민들은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비싼 가격이었다. 꿀을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가슴속이 아릿아릿 쓰라리기 마련이었는데 내 어릴 때 소원은 꿀 먹고 속이 쓰라려보는 것이었다.
달걀, 시계, 꿀 값은 다른 물가에 비하면 오히려 수십 년 전 우리 어렸을 적보다 상대적으로 아주 싼 셈이다. 이런 상품만 있다면 정부가 해마다 물가지수를 발표하는 데에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물가가 몇 십 년 동안 거의 오르지 않거나 됩데 떨어진 물건은 별로 많지 않고 자본주의 국가답게 대부분의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 중에서도 내 부아를 가장 건드리는 품목이 팬티나 옷값, 또는 운동화 값이다.
팬티라 하면 말맛이 달아난다. 그냥 빤쓰라고 해야 입맛에 맞다. 옛날에는 어머님께서 광목을 떠다가 재봉틀로 들들들 박아서 자식들 빤쓰를 만들어 입혔다. 돈이 거의 안 들었다. 빤쓰뿐인가. 바지, 심지어는 남방셔츠까지 재봉틀로 틀틀틀, 아무 허물이 없었다. 요즘 빤쓰 한 장에 만 원, 오만 원이라면 나는 저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지기 마련이다.
운동화? 이거 참 허무맹랑하다. 옛날에도 운동화는 귀했다. 검정고무신이 기본이었다. 흰 고무신도 고급이었고 운동화는 사치품이었다. 그래도 지금처럼 비싸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학생들 운동화가 한 켤레에 10만 원씩 한다고 하면 나는 거의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다.
꽃집이나 꽃값에 이르면 나는 놀람을 넘어 반감이나 적개심까지 치밀어 오른다. 옛날에는 꽃집도 없었고 돈을 주고 꽃을 산다는 개념이 없었다. 분꽃 씨는 옆집에서 얻어다 뿌리면 그만이었고, 채송화 모종은 이웃집에서 조금 캐다 심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꽃이 돈인 세상인 것을, 돈을 건네야 꽃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인 것을. 지자체에서 수월치 않은 돈을 들여 튤립 잔치를 열고, 그 잔치를 보려고 서울, 광주에서까지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버스를 전세 내어 여러 시간씩 걸려서 신안군 임자면 대광리 해수욕장으로 꾸역꾸역 몰려드는 세상인 것을.
우리 어렸을 적에 우리나라의 자랑거리는 단일민족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도 반론이 많았다. 외부의 침략도 많았는데 중국인, 몽고족, 만주족, 일본인의 피가 왜 안 섞였겠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단일민족이니 뭐니 하는 논쟁이 죄다 부질없는 말장난이 되고 말았다. 한 마디로 지구촌 세계화가 성큼 진행된 것이다. 이제는 미국만 다민족국가가 아니라 우리도 다민족국가로 변모한 것이다.
다문화가정이 늘어나는 판국에서 혈통의 순수성을 따지는 자체가 우스꽝스러울지 모르겠다. 사람도 그런데 하물며 꽃이랴. 내 생각에는 이제 토종식물이니 재래종 꽃이니 하는 자체가 별 의미 없는 구별법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지금도 네덜란드에 로열티를 지불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반도에서도 귀 빠진 신안군 임자도에서 튤립 축제를 연다는 사실이 전혀 생뚱맞거나 어색해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며칠 전부터 튤립 축제 가자고 아내한테 운을 떼었다. 아내는 별로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비싼 휘발유 값도 만만치 않고, 운전하려면 피곤하고, 하루를 망치면 집안 일이 그만큼 쌓이니 반가울 리 만무했다. 내가 아침에 또 채근하자 마지못해 동의하면서도 기어코 한 마디 침을 놓았다.
“하여튼 역마살이 끼어가지고.......”
아내의 차 아반떼를 아내가 한 시간 넘게
운전하여 점암 나루터의 주차장에 세워놓고 임자도 들어가는 배를 탔다. 임자도 나루터에 내려 또 한참 기다려 셔틀버스를 타고 대광리 해수욕장의 튤립 축제장에 도착했다.
목포를 출발했을 때는 툴툴거렸지만 축제장을 돌아보고 나서 아내는 만족해했다. 첫째,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광주 서울에서까지 몰려든 것을 보고 안 왔더라면 서운할 뻔했다는 느낌에서 만족스러웠고, 둘째, 꽃들이 너무 화려하고 아름다웠다는 점에서 만족했고, 셋째, 돌아와서 내가 찍은 사진을 보고 또 너무 화려하고 아름다워서 만족했다.
만약 당신이 국어교사라면 한 편의 시 ‘해마다 봄이 되면’을 가르치는 데에 국어만 쓰지는 않으시겠지? 필요하다면 한문도 쓰고 영어도 쓰시겠지? 필요하다면 수학도 더듬어보고 음악도 끌어다 쓰시겠지? 튤립 축제도 이와 같아서 튤립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무엇을 상징하는지, 튤립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모르더라도 엄청나게 휘날리는 깃발이 필요하다. 유채꽃도 필요하고 손님을 태우고 산책할 조랑말도 필요하다. 새우란 전시장도 있어야 하고, 음식점도 미리 마련해야 한다. 이처럼 튤립 말고도 구경꾼들의 눈과 귀와 혀와 손발을 기쁘게 해 줄 주전부리와 해찰거리가 다양하게 펼쳐져야 튤립 축제가 더욱 활기를 띄우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임자도의 튤립 축제는 상당히 풍부한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관광객들을 만족시키려고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래도 나한테는 꾸물거리는 셔틀버스라든지 만만치 않은 음식 값이라든지 좀 더 개선했으면 하는 구석이 눈에 보였다. 중국 계림은 도시 전체가 일 년 내내 관광객을 밤낮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충분해 보였다. 나는 계림의 기기묘묘한 산봉우리에서도 감명을 받았지만 유람선에서 호궁을 켜는 아가씨한테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 튤립뿐이 아니라 다른 꽃, 다른 볼거리, 먹거리, 놀거리 등을 풍성하게 개발하여 임자도를 사시사철 손님들이 꾸역꾸역 몰려오는 관광지로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시야를 덮쳐오는 튤립꽃밭의 화려함과 광대함을 어찌 본토인 네덜란드에 비길까마는 그것을 본뜬 임자도의 튤립꽃밭도 봄철의 화사함과 풍성함과 발랄하게 넘치는 발칙한 생기를 표현하기에는 별 부족함이 없어보였다.
꽃을 꽃이라고 부르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시인의 읊조림이 있었지만, 어찌 보면 튤립을 튤립이라고 부르기 전에도 튤립은 늘 튤립이었다.
하필이면 꽃밭뿐이랴. 우리가 꽃밭이라고 부르면 지구상의 모든 공간이 꽃밭이요, 우리가 천국이라고 부르면 지구상의 모든 공간이 천국이다. 우리가 축제라고 생각하면 지상의 모든 날이 축제일이요 잔칫날이 될 것이다.
튤립 축제장의 한쪽에는 커다란 온실에 새우란 전시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튤립은 멀리서 물 건너 온 꽃이지만 새우란은 우리 고장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는 친근한 꽃인지라 더욱 반가웠다. 튤립은 아직 가꾸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새우란은 얼마 전에 길러봤는데 번식력도 강하고 까탈스럽지 않은 꽃이라 비교적 기르기 쉬운 꽃이다. 화려하고 걸진 튤립만 보다가 색다른 청초함이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대는 몇 번의 봄을 맞이하여 꽃구경을 하였는가. 앞으로 몇 번이나 새 봄을 더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뒤풀이는 무안역 부근의 녹향 가든에서 짚불구이로. 오랜만에 맛보는 삼겹살이 기름이 자르르하고 고소했다. (끝)
첫댓글 임자도 이야기가 나오니까 얼른 눈이 번득입니다. 섬이라는 이름의 바다를 벗삼아서 말 그대로 바닷가에서 병어와 꽃게와 갑오징어 그리고 바닷가 해물이란 해물은 퍽이나 많이도 먹고 살았던 기억이 밀려오면서..조명준대부님의 글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5월이면 매년 한번씩은 찾겠노라며 임자중학교에서 3년을 근무하고 점암포구로 나오던 그 때 일이 엊그제 일만 같습니다. 지나놓고 보니 더더욱 "산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한 과정이었다" 하는 생각만 남습니다.
임자: 친한 사람 사이에 ‘자네’라는 뜻으로 조금 높여 가리키는 말. / '임자'가 참 좋아하는 섬이제? ...조명준선생님의 글을 읽노라면 쿰쿰한 주막에 앉은 기분으로 늘 취하게 되네. 카메라로 찍은 사진인데 대용량이라 늘 다 담아 옮기지 못하여 민망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