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2.12.14) 말씀 / 요한복음 13:1-15 섬김의 본이 되신 예수님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4-15) 요즘 우리가 스캇벡 박사의 ‘아직도 가야할 길’ 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여러 가지 많ㅇ느 생각을 하게 하는 책입니다. 그는 심리상담사이면서 정신과 치료의사 이기도 하였습니다. 정신 치료의 예를 드는 과정에서 어린 시절 알게 모르게 부모의 영향을 받는다는 말을 합니다. 부모의 일관성 없는 사랑과 방치가 아이들을 두렵게 하고 초조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여 삶의 영향까지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랑인란 단지 돈이나 물질적 투자나 말이 아니라는 함게 하는 시간이며 삶의 태도라고 합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사랑의 말이 아닌 본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했습니다. 왜 많은 자녀들이 부모를 거스리고 말을 듣지 않는지, 왜 한국 기독교가 규모적으로는 세계적으로는 성장하였지만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지 깊이 들여다보면 바람직한 삶의 본이 없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며면 한국처럼 다양하고 좋은 성경책이 많은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한국처럼 멋지게 몇 만명이 들어가는 대형교회가 많은 나라가 어디 있습니꺼? 그리고 좋은 방송매체, 설교집, 신앙서적 등... 없는게 없습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무엇일까요? 과거에 기독교가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환자들의 피고름을 빨아주고 원수를 아들도 삼아 사랑을 실천한 본이 있었습니다. 신사참배 반대를 하고 못판 길을 맨발로 걸으면서 참 신앙을 사수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에 기독교인 16명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아니라도 모든 이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감동시킬만한 본이 없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삶의 본이지 지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즘은 침묵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말과 삶이 다 본이 되어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불법이 일어나서 차별금지법을 철페하고 동성애자들에게도 자유를 달라고 외칩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코로나가 끝난 지금 교회 밖으로 나갔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아서 1/3. 1/2일로 불어든 교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저나 여러분들이나 오늘 다시금 예수님의 섬김의 본을 배우고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삶의 방향을 잡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아버지께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하였고,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분위기가 아주 어둡고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조금있으면 십자가에 죽으셔야 하는 부담감이 있는데 제자들은 자신을 배신 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녁 먹는 중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제자들과 차분하게 마지막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영문도 모르면서 발을 맡겼지만 시몬 베드로의 차례가 왔을 때 베드로가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하며 거부의 의사를 나타냈습니다. 선생님이 어떻게 제자인 자신의 발을 씻기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상식적인 관념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제자들이 선생님의 발을 씻겨드려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하시면서 계속 진행하시려 합니다. 베드로도 만만치 않습니다.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하고 거절 합니다. 예수은 이런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럴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시몬 베드로는 그렇다면 자신의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온 몸이 깨끗하니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하시며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자기를 팔자가 있음을 암시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2-15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 우리는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할 이야기 당부 말씀들도 많을 텐데 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어떤 말이 필요 없으신 것을 아신 것입니다. 말 없는 본만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남길 수 있는 강력한 메시지가 될 수 있음을 실제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상식을 깨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제자가 선생을 발 씻기는 본이 아니라 도리어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본입니다. 바로 이런 본이 세상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세상도 봉사, 섬김, 희생 등 상식적인 도리는 아주 잘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그 보다 더 해야 합니다. 상식을 깨는 사랑과 섬김! 세상을 이기려면 상식을 깨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0:26-28절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일본에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1888~1960)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20년대에 일본의 전쟁에 반대하다가 감옥에 갇혀 모진 고초를 겪었던 분 입니다. 또한 1940년에는 개인 자격으로 일본의 중국 침략을 중국에 사죄하였다가 또 다시 일본 정부로부터 모진 탄압과 고초를 겪었고, 우리나라의 자유당 정권시절,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와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죄를 자청하였던 사람입니다. 또한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일본 정부의 무서운 탄압 속에서도 인권 운동을 가열차게 전개하며, 여성 운동에도 최일선에서 앞장섰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 목사님을 이해하려면 먼저 나가노라는 목사님을 알아야 합니다. 20세기 초, 일본에서 갓 안수를 받은 "나가노"라는 젊은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일본은, 기독교인이 거의 없었으므로, 그는 어느 곳에 가서 교회를 개척할 것인가 일본 지도를 펴놓고 기도하면서 동서남북 100킬로미터 이내에 단 한명의 교인도 없는 곳을 찾고 보니 북쪽 '가나사와'라는 지역 있었습니다. 이 젊은 목사는 곧 그 지역으로 가서, 천막을 치고 개척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아내와 아이 둘을 놓고 설립예배를 드렸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6개월이 지나도교인이 오지 않아도 나가노 목사는 그 자리를 옮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곳에 보내 주신 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5년이 지난 어느 수요일 저녁에 천막의 커튼을 젖히고 첫 번째 교인이 들어왔습니다.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지난 5년 동안 했던 그 어떤 설교보다도 열정적으로 했고 예배가 끝난 뒤에 그 청년을 데리고 식탁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식사 도중에 이 청년이 "욱"하더니 피를 쏱았습니다. 그는 폐병환자 였습니다. 나가노 목사가 순간적으로 속에서 갈등이 일었습니다. 이 사람을 지금 당장 보내야 하나? 아니면 내가 이 핏덩이를 쓸어내고 계속 함께 밥을 먹어야 하나?'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처음 보내주신 사람인데............' 나가노 목사는 자기 손으로 핏덩이를 치웠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가져다가 청년과 다시 먹었습니다. 그 청년은 일본의 유명 정치인의 사생아였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출신이 그랬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괴로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복음을 접하게 되어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는 도중에 폐병환자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정학을 당했고 다니던 교회에서 파문을 당했습니다. 이 청년이 생각할 때 '성경은 거짓말이구나, 예수도 거짓말이다. 나는 누구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았고 나의 치료비를 요구하지 않았고 나의 폐병을 옮길 만큼 경솔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이라도 폐병 환자인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대해 주는 그리스도인을 만나고 싶다.' 그러나 없었습니다.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청년은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자살 전에 우연히 한 사람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북쪽 가나사와 지방에 가면 나가노라는 목사가 있는데, 거기를 한번 찾아가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나가노 목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날 저녁에 밥을 먹다가 피를 쏱았습니다. 나가노 목사가 피를 닦아 내고 다시 밥을 차려 왔습니다. 그 순간에 이 청년이 다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살아 계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청년의 폐병이 나았고 이 청년이 신학교를 졸업한 뒤에, 그 유명한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 입니다. 그리고 고베와 도쿄에서 수없이 많은 빈민을 위해 자신의 생을 섬김과 봉사의 삶으로 내어 놓았습니다. 빈민이 가장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변비라는데 항문에 변이 차돌같이 굳어 있어서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장갑을 끼고 손으로 후벼 냅니다.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가 그 빈민들의 항문을 손가락으로 후벼 주어도 되지 않으면 더러운 빈민의 항문에 자신의 입을 가져다 대고, 차돌같이 굳어 있는 변을 침으로 녹여서 빨아 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된 일본 기자가 도요히꼬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가?" 도요히꼬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배운대로 합니다. 제 선생님은 제가 각혈한 핏덩이를 닦아 주셨습니다. 그분이 하신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정말 본이 이렇게 중요 합니다. 나가노 목사의 본을 받은 것입니다. 그 후 그는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중국의 빈민들을 위해서도 똑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장개석 총통의 부인인 송미령 여사는 그리스도인인데 그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아서 그분을 모셔서 개인적으로 성경공부도 했습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했습니다. 일본군대와 함께 민간인들도 철수를 했습니다.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나라에서 일본 민간인들이 철수할 때 현지인들로부터 테러를 당하는 사건이 많았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그 땅을 착취한 사람들인데, 갈 때 어떻게 테러를 당하지 않겠습니까? 가장 지독하게 당한 곳이 사할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패망 당시에 중국 땅에 있던 일본인의 숫자는 200만 명에 달했으나 그 중에 단 한 사람도 테러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일본 왕의 항복 성명과 동시에 장개석 총통이 포고령 1호를 내려졌던 것입니다. 철수하는 일본 사람들에게 해를 가하는 자는 중형에 처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지게 된 배후에는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의 사역에 대한 감동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장개석 총통은 말했습니다. “나도 일본이 한 짓을 생각하면 밉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가가와 목사가 한 일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다.” 나가노 목사는 평생에 한 명의 그리스도인밖에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경제 논리로 본다면 실패한 목사 입니다. 그러나 그 한 사람이 역사에 위대한 신앙인물 가가와 목사님입니다. . 나가노 목사가 없었더라면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는 없습니다.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가 빈민들의 항문을 빨아줄 때, 그 심중에는 나가노 목사도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가 중국 빈민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칠 때 그 속에는 나가노 목사도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안에는 또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이 함께 계셨던 것입니다. 나가노 목사님 한 사람의 본이 가가와 목사님 한 사람을 키웠고, 그 가가와 목사님을 통해서 수많은 빈민들의 영혼이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의 삶을 통해서 철천지 원수관계였던 중국 장개석 총통까지 감동을 받게 하였고, 200만 자국민이 안전하게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분을 보면서 하나님의 역사는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게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세상을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이 되는 한 사람입니다. 그 ‘한 사람’이 우리 교회의 부흥 목표 기도제목입니다. 나든지 너든지 누구든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역사를 한번 보십시오. 오랜 구속 역사를 계획하시면서 하나님이 필요하신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하나님은 딱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렇게 중대한 역사를 시작하시고 이루시는데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 숭배하는 집안에 썩고 있는 75세의 늙은 아브라함 한 사람이면 충분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을 25년 동안 믿음의 조상으로 양육하시고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이삭 야곱으로 그리고 열두 아들을 통해서 구속의 역사를 이어 가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약속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해변의 무수한 보래와 같은 후손들을 허락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죽은 자와 방불한 딱 한 사람이었지만 나중에 하늘의 뭇별 해변의 모래같이 많은 후손을 양육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흉년에서 구원하시는데 딱 한사람 요셉을 부르셔서 사용하셨습니다. 애굽의 바로도 얼쩔수 없는 일곱 해 대 흉년에서 약속의 자녀들인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세상이 다 굶주려 죽게 되는 위기 상황에 대처할 사람은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옥중에 갇혀 있는 죄인 한 사람 요셉이면 충분했습니다. 요셉 한 사람으로 인해 야곱과 11형제들 그리고 애굽과 온 세상이 다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역사도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양 똥치며 세월을 보내고 있는 모세 한 사람을 불타지 않는 털기 나무에서 부르셔서 60만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은 아담 한사람으로 죄와 사망이 왕노릇하는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게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전 15: 22)
나와 너 온 인류가 저주 받아 죽게 된 것은 아담 한 사람의 죄,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말씀을 거긴 죄 때문 이었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죄에서 나올 수 없는데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게 하셨습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한 분으로 인해 모두가 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많은 수가 필요하지 않고 믿음의 딱 한 사람, 사랑의 딱 한 사람, 순종하는 딱 한 사람으로 충분했습니다. 결국 ... 아무리 큰 세상도 하나에서 시작되었고, 하나로 인해 망했고, 하나로 인해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세상이 다 죽게 되었고, 예수님 한 분으로 세상이 다 구원받게 되는 하나님의 역사는 한 사람의 역사입니다. 한 사람이 천이고, 한 사람이 만 이고, 한 사람이 열국이고, 한 사람이 우주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도 김재중 집사님 기업인의 본이 되어 10년이상 중국 학생들 장학금을 주며 말씀으로 키워 60명이상 세례를 줄 수 있었습니다. 변화는 s 한 사람으로 되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으로 가정이 달라지고, 나 한 사람으로 세상에 달라지고, 나 한 사람으로 세계가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이 마지막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상식을 깨는 본 만이 불의한 세상을 믿음으로 이길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베드로도 그의 편지에서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하였습니다(벧전 5:2-3). 제자는 지식을 배우는 자가 아니라 삶을 본 받는 자입니다. 좋은 본만이 세상을 감동 시킬 수 있고, 주님의 마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나가노 목사님이나 가가와 목사님처럼 항문을 입으로 빨지 못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 작은 일의 본이 될 수 있습니다. 섬김 받을 위치에서 섬김의 본, 양보와 희생의 본, 정직의 본, 부지런한 본을 믿음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본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세상에 작은 본이 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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