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소염전에 소금꽃이 피었네! <멋있는인생> 천일염(天日鹽)을 지키는 염부 이정근씨
1907년 우리나라에 천일염전을 도입하기 전까지는 바닷물을 직접 가마솥에 끓여서 소금을 산출해내는 화(火)염제조법을 이용해왔다. 그러나 이 제조법은 생산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염전을 개발하기보다는 값싼 중국산 소금을 주로 수입하여 사용했는데 매년10만 톤의 소금이 부족함으로 정부에서는 1955년부터 관영염전을 확장하는 동시에 민영염전도 적극 장려하는 정책으로 자급자족을 하게 되었다. 1965년에는 오래 전부터 행해오던 화염제조법을 완전히 폐지하고 소금의 전량을 천일제염으로 생산했다. 염전은 주로 서해안에 집중 발달되어 있는데, 이는 일조시간과 증발(蒸發)량이 많고 넓은 간석지가 분포해 있을 뿐만 아니라 점토분 40%, 미사분 60%가 배합된 토양이 도처에 많고, 바다가 얕으며 조차(潮差)가 커서 만조 때에 바닷물을 염전으로 인수하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천일제염의 생산 시기는 3~10월이며, 장마가 시작되기 직전인 5~6월에 연간생산량의 약 60%를 생산한다.
곰소 염전은 서해안고속도로 줄포IC에서 변산 방향으로 빠져나와 곰소항 들어가는 길목 30번국도변의 남선염업이라는 간판을 내건 국내에 몇 개 안남은 천일염전중의 하나다. 세월이 묻어난 20여 채에 이르는 목재 소금창고와 바닷물이 증발하고 있는 15만여 평의 회갈색 염전(鹽田)에 소금 꽃이 장관이다.
염부 이정근(73)씨는 고향 영광에서 17살부터 소금과 인연을 맺어 평생을 집보다 염전에서 살았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염부4명과 함께 영광에서 이곳 남선염업으로 러브콜을 받은 것이다. 본래 남선염업이라는 회사가 이곳을 운영했었는데, 채산이 맞지 않아서 1인당 5정보 씩 염전을 빌려주고 그 임대료를 받는 형식이니까 어떻게 보면 개인사업자가 된 셈이다. 33살에 이곳으로 옮겨와서 6남매를 모두 출가시키는 동안 어렵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곰소소금이 짜지도 않으면서 뒷맛이 달작지근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단골손님 때문에 70이 넘도록 염전위에서 산다. 전국에 크고 작은 염전 총93.19㎢이 있지만 젓갈로도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곰소소금은 곰소만의 입지 조건상 바닷물에 미네랄이 많기 때문에 소금의 맛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특히, 소금 결정을 한 번 빼낸 바닷물인 간수를 재활용하지 않고 바로 버린다. 간수에는 염화마그네슘이 포함되어 있어 쓴 맛을 낸다. 곰소소금이 일 년간 일정한 맛을 유지하는 것도 간수를 재활용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언재까지 이일을 계속하겠느냐는 질문에 “글쎄 젊은 사람들이 배워야 늙은이가 그만둘 터인데 힘들다고 배우려 들질 않으니 건강이 허락할 때 까지 우리 것을 지켜나가야 하지 않?소”하며 버릇처럼 몇 번씩 파란 하늘을 쳐다본다. “국산과 수입산 구별법은 아~슈” “소금을 손으로 눌렀을 때 쉽게 으스러지면 국산이고 단단해서 잘 으스러지지 않으면 수입산 이지요. 가장 좋은 방법은 맛을 보는 것인데. 소금 한 톨을 입에 넣으면 수입소금은 쓴 맛이 나고, 이 소금은 끝 맛이 달아요”. “그래서 국산 중에서도 곰소소금을 찾지요...” “사양산업(斜陽産業)이라도 지키는 사람이 있기에 유지발전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살만해요. 연봉도 2천정도 되는데 70노인이 뭘 더 바램니까? ” 金 鎔 汶 記者 |
출처: 노복위 원문보기 글쓴이: 노복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