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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三韓)과 삼국(三國)의 땅이 달라?
삼한(三韓)과 삼국(三國)!
○ 삼한(三韓)은 삼국(三國)의 선대(先代)국가(國家)이자, 아버지(父) 또는 할아버지(祖父)의 나라(國)라고 말한다고 틀린 말이 아니다. <고구려(高句驪)·백제(百濟)·신라(新羅)>는 삼한(三韓)의 78개 나라 중의 각각(各各)의 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동방(東方)에 삼한(三韓)이 있고, 삼한(三韓)은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이라고 하며,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 최치원(崔致遠)의 말을 인용(引用)하여 :《마한(馬韓)은 곧 고구려(高句驪)요, 변한(弁韓)은 곧 백제(百濟)요, 진한(辰韓)은 곧 신라(新羅)다》라고 하였다.
무극(無亟)의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말하기를 : 최치원(崔致遠)이 《마한(馬韓)은 고구려(高句驪)요, 진한(辰韓)은 신라(新羅)요, 변한(弁韓)은 백제(百濟)다.》 하였으니, 동명왕(東明王)이 일어날 때, 벌써 마한(馬韓)을 병합(倂合)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高句麗)를 마한(馬韓)이라고 칭한 것이다. 지금 사람이 혹, 금마산(金馬山)이 있다고 해서, 마한(馬韓)을 백제(百濟)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고구려(高句麗)땅에, 원래 마읍산(馬邑山)이 있었기 때문에 마한(馬韓)이라 이름 한 것이다. 원래 백제(百濟) 땅에 변산(卞山)이 있었기 때문에, 변한(卞韓)이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마읍산(馬邑山) : 평양(平壤)에 있는 산(山)의 이름이다.
또 진한(辰韓)은 진한(秦韓)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진(秦)나라 사람들이 모여 살았기에 진한(秦韓)이라고 한 것이다. 삼한(三韓)의 78 개 나라(國)를 보자.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烏丸鮮卑東夷傳 第30 <한(韓)>을 보면 :
➊《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為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 :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南)쪽에 있는데, 동(東)쪽과 서(西)쪽은 바다에 한계하고, 남(南)쪽은 왜(倭)와 접해 있다. 사방(方)이 가히 4천리이다. 세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마한(馬韓)이고, 둘째는 진한(辰韓)이며, 셋째는 변한(弁韓)이다.》라고 하였다.
『방가(方可) 4천리(千里)』라면 도대체…이 구절(句節)을 가지고 반도(半島)인들은 별의별 이야기를 다하는데, 이 중에서 둘레(周) 또는 면적(面積)을 말한다고 하는 자(者)들도 있다. 둘레(周)와 면적(面積)과 방(方)은 전혀 별개(別個)다. 반도(半島) 땅에 <4천리(千里)>가 될 만한 곳이 없으니, 이런 해괴(駭怪)한 이야기들이 나오는 거다. 삼한(三韓) 땅이, 『方 可 四 千 里』라고 하였다면 :
• 4,000 리×0.416㎞=1,664㎞ : 거리(距離)이고,
• 1,664㎞×1,664㎞=2,768,896㎢ : 면적(面積)이다.【도량형(度量衡) : 경국대전(經國大典)이므로, 위(魏)나라 당시(當時)와는 조금 차이(差異)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이는 곧 한반도(韓半島)의 약 12.6 배(倍)나 된다.
• 이것은《산동성(山東省)·하남성(河南省)·산서성(山西省)일부(一部)·섬서성(陝西省)·감숙성(甘肅省)일부(一部)·영하성(寧夏省)·안휘성(安徽省)·강소성(江蘇省)·절강성(折江省)·강서성(江西省)·호북성(湖北省)·호남성(湖南省)일부(一部)·사천성(四川省)일부(一部)·귀주성(貴州省)일부(一部)·복건성(福建省)일부(一部)》까지를 아우르는 광대(廣大)한 곳을 말하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하(河) 이남(以南)으로부터, 강(江) 이북(以北) 땅』을 말하는 것이다.
➋ 지세(地勢)를 살펴보면 : 《동(東)쪽과 서(西)쪽은 바다이고, 남쪽은 왜(倭) 땅과 서로 연이어져 있다(接).》고 하였다. 남(南)쪽은, 땅(地 : 陸地)이었고, 그곳에 왜(倭)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래서 열도(列島) 아이들이 반도(半島) 남(南)쪽을 경영(經營)했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해괴(駭怪)망측(罔測)한 “설(說)”을 주장(主張)하는 거다.
이러한 이야기는 : 대륙(大陸) 땅에 삼한(三韓)의 78 개 나라가 있었으니, 남(南)쪽 지방(地方)의 한 모퉁이를 왜(倭)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고 명명(命名)하여, 경영(經營)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을 손바닥만 한 반도(半島) 땅에 갖다 붙이니, 이 모양이 되어 버린 것이다.
➌ 마한(馬韓) : 《爰 襄 國 、 牟 水 國 、 桑 外 國 、小 石 索 國 、 大 石 索 國 、 優 休 牟 涿 國 、 臣 濆 沽 國 、 伯 濟 國,、 速 盧 不 斯 國 、 日 華 國 、 古 誕 者 國 、 古 離 國 、 怒 藍 國 、月 支 國 、 咨 離 牟 盧 國 、 素 謂 乾 國 、 古 爰 國 、 莫 盧 國 、 卑 離 國 、 占 離 卑 國 、 臣 釁 國 、 支 侵 國 、 狗 盧 國 、 卑 彌 國 、監 奚 卑 離 國 、 古 蒲 國 、 致 利 鞠 國 、 冉 路 國 、 兒 林 國 、 駟 盧 國 、 內 卑 離 國 、 感 奚 國 、 萬 盧 國 、 辟 卑 離 國 、 臼 斯 烏 旦 國 、 一 離 國 、 不 彌 國 、 支 半 國 、 狗 素 國 、 捷 盧 國 、 牟 盧 卑 離 國 、 臣 蘇 塗 國 、 莫 盧 國 、 古 臘 國 、 臨 素 半 國 、 臣 雲 新 國 、 如 來 卑 離 國 、 楚 山 塗 卑 離 國 、 一 難 國 、 狗 奚 國、 不 雲 國 、 不 斯 濆 邪 國 、 爰 池 國 、 乾 馬 國 、 楚 離 國 , 凡 五 十 餘 國 . 辰 王 治 月 支 國.》등 54개국이며,
➍ 변진(弁辰) : 《已 柢 國 、 不 斯 國 、 弁 辰 彌 離 彌 凍 國 、 弁 辰 接 塗 國 、勤 耆 國 、 難 彌 離 彌 凍 國 、 弁 辰 古 資 彌 凍 國 、 弁 辰 古 淳 是 國 、 冉 奚 國 、 弁 辰 半 路 國 、 弁 〔(辰 ) 樂 奴 國 、 軍 彌 國 (弁 軍 彌 國 ) 、 弁 辰 彌 烏 邪 馬 國 、 如 湛 國 、 弁 辰 甘 路 國 、戶 路 國 、 州 鮮 國 ( 馬 延 國 ) 、 弁 辰 狗 邪 國 、 弁 辰 走 漕 馬 國 、 弁 辰 安 邪 國 ( 馬 延 國 ) 、 弁 辰 瀆 盧 國 、 斯 盧 國 、 優 由 國 .》등 24개국이다.
➎ 삼한(三韓)은 『78 개국』이란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반도(半島) 땅, 어디에서 이 나라들을 찾을 수 있으며, 이들은 모두 반도(半島) 땅, 어디에 자라잡고 있었을까? 누구 한 사람 아는 사람도 없고, 설명(說明)해 주는 사람도 없다. 옛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되어 있으니, 그저 그렇다고 할 뿐이다. 좁은 반도(半島) 땅에서 78개 나라가 오손도손 이웃사촌처럼 살았다고…그건 꿈(夢)이다.
➏ 마한(馬韓)의 왕(王)인 “진왕(辰王)”은, 이들 54개 나라들을 《“월지국(月支國)”에서 다스렸다》고 하였다. 《변한(弁韓)에도 12개 나라가 있었고, 진한(辰韓)은 6개 나라가 있었으나, 나누어져 12개 나라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곳 나라 안에서 철(鐵)이 생산(生産)되어, 한(韓)과 예(濊)와 왜(倭)가 채취(採取)하여 사용(使用)했다는 기록(記錄)에 따르면 : 일찍부터 철기시대(鐵器時代)를 열었다는 것은, 이들은 강력(强力)한 집단(集團)을 이뤘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증거(證據)나 고증(考證)문헌(文獻)은 어디에 있지? 말로만 떠든다고 조선사(朝鮮史)가 복원(復元)되는 게 아니다.
• 철기시대(鐵器時代)란 : 석기시대(石器時代)ㆍ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에 뒤이어 철기(鐵器)를 사용(使用)한 인류(人類) 문화(文化) 발전(發展)의 제3 단계(段階)를 말하는데, 광의(廣義)로 보면, 현대(現代)까지도 포함(包含)된다.
또 땅이 왜(倭)와 근접(近接)해 있어, 남자(男子)와 여자(女子)들이 문신(文身)을 많이 했다(男女近倭, 亦文身)고 한다. 이러한 증거(證據)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으며, 반도(半島) 땅, 어디가 왜(倭)와 가까이 있을 수 있을까? 반도(半島)와 열도(列島)는 바다(海)라는 장애물(障碍物)이 가로막혀 있는 지세(地勢)를 갖고 있다. 어디가 근접(近接)해 있지? 아는 자(者)가 없다.
➐ 변진(弁辰)의 독로국(瀆盧國)이 왜(倭)와 접경(接境)지대라고 하였다.(其瀆盧國與倭接界). 『접계(接界)는 접경(接境)이란 뜻으로 지경(地境)을 맞대고 있었다.』는 얘기다. 바다(海)와 바다(海)사이에 있는 땅을, 접계(接界)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기는 하다!
또 특징(特徵)이, 『변진(弁辰) 백성(百姓)들의 형상(人形)이 모두 컸다(其人形皆大)』는 이야기다. <변진(弁辰) 사람들이 컸다.>는 말은, 주변(周邊)의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들보다 작았다는 뜻이며, 종족(種族)이 달랐다는 의미(意味)이기도 하다. 주변(周邊)이란 왜국(倭國)과 그 외(外)을 말하는 것이다.
➑ <삼한(三韓)은 동방(東方)에 있다>고 했고, 동방(東方)은 곧 서방(西方)과 대칭(對稱)되는 말이다. 『<동방(東方)이 반도(半島)을 말한다.>는 말은 반도(半島)인들의 전매특허(專賣特許)일 뿐이다.』 고전(古典)에서 말하는 동방(東方)은, 그 기준(基準)이 되는 곳으로부터 동(東)쪽, 동역(東域)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을 진역(震域) 또는 진단(震旦)이라고도 한다. 총령(蔥嶺) 또는 곤륜산(崑崙山)이며, 불주산(不周山)이라고도 한다.
수경주(水經注)에서는 : 석씨(釋氏)의 서역기(西域記)를 인용(引用)하여 : 곤륜산(崑崙山)은, 아누달태산(阿耨達太山)이라 했고, 이곳에 황제궁(黃帝宮)을, 아누달궁(阿耨達宮)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해국도지(海國圖地)에서는 : 《무릇 중화(中華)는 총령(蔥嶺)의 동(東)쪽에 있다. : 夫 中 華 在 蔥 嶺 之 東》고 하였으니, 19 세기(世紀)까지도 이러한 이야기는, 일반(一般)에 두루 쓰였다(通用)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이곳의 동(東)쪽 지방이 동방(東方)이다. 또한 이곳의 서(西)쪽은 서방(西方)이라고 하였음은 당연(當然)한 것이다. 그렇다면 삼한(三韓)의 78 개 나라는 반도(半島)가 아닌 총령(蔥嶺)의 동(東)쪽 지방에 산재(散在)해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고,
왜(倭)는 대륙(大陸)의 남방(南方) 모퉁이 땅에, 변진(弁辰)의 독로국(瀆盧國)과 ‘접계(接界)=접경(接境)’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는 거다. 『대륙(大陸)의 남방(南方)이란 말은, 총령(蔥嶺)으로부터 그 동(東)쪽 지방(地方)의 남방(南方)』이란 뜻이다.
➒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했다고 아무리 떠들어 봐도, 증거(證據)는 내 놓아야 하고, 고증(考證)할 수 있는 문헌(文獻)을 찾아, 내 놓아야 하는 것이다.
지세(地勢)를 보라. 반도(半島) 남(南)쪽에 왜와 접(接)해 있을 땅(地)이 어디에 있는가? 또 이것을 이용(利用), 열도(列島) 왜(倭)가 반도(半島) 남부(南部)를 지배(支配)했다고 하고, 열도(列島)는 고대(古代)로부터 왜(倭)의 땅이라는 증거(證據)라고 떠들지 않는가? 반도인(半島人)들은 언제까지, 열도(列島) 아이들에게 이용(利用)만 당하고 살 건가? 친일파(親日派) 나라여서 그런가?
➓ 조선사(朝鮮史)에서 삼한(三韓)의 영역(領域)에 대한 정리(整理)가 되어있지 않은 탓에, 대충(代充) 얼버무리고 만다.《마한(馬韓)은 한수이북(漢水以北)이고, 고구려(高句驪)라고하기도 하고, 혹자(或者)들은 마한(馬韓)은, 충청(忠淸)과 전라(全羅)땅에 있었다.》고 하는데, 후자(後者)로 보면 마한(馬韓)은 고구려(高句驪)가 될 수 없다.
이러한 조선사(朝鮮史)해설(解說)은, 이해(理解)할 수도 없고, 이해(理解)될 수도 없는, 막장(礃)드라마와도 같은 수준(水準)의 이야기다.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된 조선사(朝鮮史)를 찾자는 말만 하지 말고, 하나하나 옳고 그름을 따져봐야 하는 것 아닌가! 가장 중요(重要)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바로 지형(地形)지세(地勢)다. 예나 지금이나 지세(地勢)는 큰 변화(變化)가 없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국지적(局地的)인 변화(變化)는 있을지언정, 전체적(全體的)인 구도(構圖)는 변함이 없었다는 뜻이다. 예나 지금이나!
● 반도(半島)인들의 해괴(駭怪)한 삼한(三韓)논리(論理)는 : 삼한(三韓)과 삼국(三國)의 땅이 서로 다르다? 그러면 그곳에 살고 있는 백성(百姓)들도 달랐다는 얘기네? 이러한 결론(結論)을 내려고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하는 것일까? 반도인(半島人)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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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漢水)는 무엇?
(1) 동사강목(東史綱目) 지리고 / 삼국(三國)이 처음 일어나다 :《삼국(三國)이 일어나기 전(前)에, 『한수(漢水)』 이남(以南)은, 삼한(三韓)의 78개국이 있었고, 북방(北方) 역시 낙랑군(樂浪郡)·부여(扶餘)·옥저(沃沮)·예맥(濊貊)·비류(沸流)·황룡(黃龍)·행인(荇人)·개마(蓋馬)·구다(句茶) 등의 나라가 있었다. 중략(中略)》
➊《삼한(三韓)의 78 개 나라는 한수(漢水) 이남(以南)에 있었다. 한수(漢水)이북(以北)에는, 낙랑군(樂浪郡)·부여(扶餘)·옥저(沃沮)·예맥(濊貊)·비류(沸流)·황룡(黃龍)·행인(荇人)·개마(蓋馬)·구다(句茶)등의 나라가 있었다.》고 한다면,
<마한(馬韓)이 고구려(高句驪)>라는 옛 선인(先人)들의 말씀은 무엇이며, <마한(馬韓)의 진왕(辰王)은 월지국(月支國)에서 54개 나라(國)를 다스렸다>고 하였는데, 월지국(月支國)은 어디에 있었던 나라였는가? 월지국(月支國)은 서역(西域)에 있었던 고대(古代)국가(國家)이다보니, 반도사관(半島史觀)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목지국(目支國)이라고 하고는, 『목지국(目支國)은 초기 철기시대 이래 충남과 전라도 지역에서 형성, 발전되어온 토착 정치 집단의 하나로, 백제국(伯濟國)이 마한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기 전까지 마한 소국 연맹체(小國聯盟體)의 중심세력이었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나머지 53개 나라(國)는 다 어디에 있었던 게냐?
• 마한(馬韓) 소국(小國) 연맹체(聯盟體) : 월지국(月支國)에서 속국(屬國) 54개 나를 통치(統治)하는 마한(馬韓)이 소국(小國)의 연맹체(聯盟體)라고…? 월지국(月支國)이라는 나라의 땅만 가져도 반도(半島)보다 더 크다는 것을 이들은 생각이나 할까?
➋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 월지국(月支國) : 《인천, 한강 유역의 위례성(慰禮城), 충청남도 직산(稷山), 예산(禮山), 아산만 일대 등지에 비정되기도 하고,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청동기 유물이 비교적 풍부하게 발견되는 전라북도 익산(益山), 금강 유역, 나주를 중심으로 한 영산강(榮山江) 유역 등지에 비정되기도 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도대체 어디를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답답한 얘기다.
• 그렇다면 <고구려(高句驪)가 마한(馬韓)>이라는 옛 선인(先人)들의 기록(記錄)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 위에서 말하는 한수(漢水)는? <반도(半島)의 한강(漢江)을 말한다.>는 증거(證據)는? 없다. 그저 그렇다고 입(口)으로만 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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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자강역고(箕子疆域考) :《오운(吳澐)이 ‘요하(遼河) 이동, 『한수(漢水)』 이북(以北)이 다 기자(箕子)의 땅이었다.’ 고 한 것이 옳다.》
➌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땅은 : <요하(遼河)의 동(東)쪽으로부터 한수(漢水)이북(以北)까지>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리(論理)대로라면 : 기자조선(箕子朝鮮)의 강역(疆域)은,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으로부터, 길림성(吉林省)과 흑룡강성(黑龍江省)과 반도 한수이북(漢水以北)으로 그 면적은 70만㎢ 정도>로 한반도(韓半島)의 3 배(倍)가 넘는다.
• 위에서 말하는 ‘한수(漢水)이북(以北)’이란 말에서 “한수(漢水)”가, <반도(半島) 한강(漢江)이라는 증거는 있는가?> 그저 그렇다고 이야기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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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삼한고 (三韓考) :《삼한(三韓) 땅은 지금의 『한수(漢水)』 이남(以南)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마한(馬韓)은 한수(漢水)이남(以南) 경기ㆍ충청ㆍ전라도 땅이며, 서쪽은 바다를 건너 청제양월【靑齊揚越 : 청주(靑州)·제주(齊州)·양주(揚州)·월주(越州)】과 통하고, 동남(東南)은 바다를 건너 왜국(倭國)과 통하고, 북(北)쪽은 한수(漢水)를 한계로 조선(朝鮮)과 접하고, 동(東)쪽은 진한(辰韓)ㆍ변한(弁韓)과 연하였는데, 뒤에 백제(百濟)가 그 땅을 차지하였다. 중략(中略)》
• 마한(馬韓) : 한수이남(漢水以南) : 경기(京畿)·충청(忠淸)·전라(全羅) 땅이다.
• 마한(馬韓)의 동(東)쪽은 : 진한(辰韓)·변한(弁韓)과 연(連)했다. 뒤에 백제(百濟)가 그 땅을 차지했다.
• 마한(馬韓)의 동(東)쪽에 있었던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의 땅을 백제(百濟)가 차지했다면 : 진한(辰韓)의 후국(後國) 신라(新羅)는, 동해(東海) 바다(海)속에 있었는가? 아니면 부산(釜山)과 대마도(對馬島) 사이에 있었는가?
➍ 위에서 말하는 “한수(漢水)이남(以南)”이란 구절(句節)에서, “한수(漢水)”는 <반도 한강(漢江)을 지칭(指稱)한다는 증거(證據)는?> 그저 그렇다고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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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요사(遼史) 남경도(南京道) / 한수(漢水) :《灤州,永安軍,中,刺史.本古黃洛城.灤河環繞,在盧龍山南.齊桓公伐山戎,見山神俞鬼,即此. : 란주(灤州),영안군,중,자사. 본시 옛 황낙성이다. 노룡산(盧龍山)의 남쪽에 있는데, 란하(灤河)가 띠를 두른듯하다. 제(齊) 환공이 산융(山戎)을 벌할 때, 산신(山神) 유귀(兪鬼)를 보았는데, 곧 이곳이다. 秦為右北平.漢為石城縣,後名海陽縣,漢水為公孫度所有. : 진(秦)나라의 우북평(右北平)으로, 한(漢)의 석성현(石城縣)인데, 뒤에 이름이 해양현(海陽縣)이며, 한수(漢水)는 공손도(公孫度)가 가졌다. 灤州負山帶河,為朔漢形勝之地.有扶蘇泉,甚甘美,秦太子扶蘇北築長城嘗駐此:臨榆山,峰巒崛起,高千餘仞,下臨渝河. : 란주(灤州)는 뒤에 산(山)이 있고, 하(河)가 띠를 두른듯하며, 한(漢)나라 북쪽의 형승(形勝)지지(之地)이다. 이곳에는 부소천(扶蘇泉)이 있는데, 물맛이 아주 감미롭다. 진(秦)나라의 태자 부소(扶蘇)가 북(北)쪽 장성(長城)을 쌓는데 이곳에서 머물렀다. : 림유산(臨楡山)의 산봉우리가 삐쭉삐쭉 불쑥 솟아있는데, 높이가 일천(一千)여인(餘仞)이며, 그 아래에 림유하(臨楡河)가 있다.》
➎『한수(漢水)』는 : 진(秦)나라의 태자(太子) 부소(扶蘇)는, 몽념(蒙恬)과 그 휘하(麾下) 40만 대군(大軍)이 장성(長城)을 쌓는데, 감독(監督)차 진(秦)나라의 북쪽 변경(邊境)지방에 상주(常駐)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곳에 “한수(漢水)”가 있었다는 이야기며, 후대(後代)에, 공손도(公孫度)가 이 『한수(漢水)』주변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이야기는 “한수(漢水)”유역을 차지하고, 이곳 연안(沿岸)에서 생산(生産)되는 많은 물품(物品)들을 무역(貿易)하는 바람에 번성(繁盛)해졌다는 이야기다.
• 또한 2,000m 높이(高)의 림유산(臨楡山)과 그 아래 계곡을 흐르는 림유하(臨楡河)가 있는 란주(灤州) 땅에 『한수(漢水)가 있었다.』는 얘기다. 더하여 이곳에는 옛 고죽국(孤竹國)이 있었으며, 황낙성(黃洛城)은 고죽국(孤竹國)의 왕도(王都)였다.
• 이러한 곳이 반도(半島) 한수(漢水)일까? 당연(當然)히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말이다. 『반도(半島)의 한수(漢水)는, 한수(韓水)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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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한(三韓)은 삼국(三國)의 아버지(父) 나라(國)다. 영토(領土)와 백성(百姓)들도 그대로이며, 78개 나라(國)로 서로 합종연횡(合從連衡)하여,『고구려(高句驪)·백제(百濟)·신라(新羅)』가 되었을 뿐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도 ‘마한(馬韓)’왕(王)이 미르기를 :『왕(王 : 온조)이 애초에 하(河)를 건너와 발붙일 곳이 없을 때, 나는 동북방(東北方)의 100 리 땅을 주어 살도록 하였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여기서 말하는 “하(河)”는 또 무엇이냐? “하(河)는 하(河)일 뿐이지, 하(河)가 강(江)이 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또 백제(百濟)의 신하(臣下)들이 왕(王)에게 말하기를 : 『나라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그들의 침공으로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國家東有樂浪,北有靺鞨.侵軼疆境)』라고 하지 않았는가?
• 충청(忠淸)·전라(全羅) 동쪽에 신라(新羅)가 아닌 낙랑(樂浪)이 있었는가?
• 백제(百濟) 북(北)쪽은 고구려(高句驪)가 아닌, 말갈(靺鞨)이 있었는가? 이건 아니잖은가!
○ 반도(半島)라는 특이(特異)지세(地勢)는, 수십만(數十萬)년 전(前),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以前)에 골격(骨格)이 형성(形成)되었을 것이다. 무식(無識)하다거나, 무지(無知)하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자. <지세(地勢)가 다르다>는 말을 이해(理解)하지 못한다는 말은, 무식(無識)과 무지(無知)와 관계(關係)없는, <오만(傲慢)과 독선(獨善)과 매국(賣國)을 위한 것이다.> 이런 매국(賣國)사학(史學)은, 이제 무덤(墓)으로 들어 가야한다. 도대체 언제까지 비웃음을 당하며, 손가락질을 당하며 살 건가?
2016년 09월 28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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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欒州" 는 오늘날 감숙성 黃河 주변에 있는 도시인것같은데 이곳 "河"를 "漢水"라 했었고 또한 "固竹國" 이 주위에 있었다면 이것은 아주 중요한 고증이라 생각하는데요, 왜냐하면 조작된 몇몇 지도에서는 "固竹國"을 山西省 황하주위에 地名이동 시킨걸로 되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黃河가 漢水였다는 놀라운사실입니다. 황하 또한 오늘날의 황하가아니라는 것이고 그러면 예전에 요수님이 찾아낸 거대한 강줄기가 있었던 그곳이 결국"黃河" 일 수밖에없다는겁니다. 핵실험때문에 天下의 大江하나가 사라진겁니다.이곳에있던 수 많은 지명을 동쪽으로 옮겨야 했기때문에 문헌상의 지명들이 실제 지리와 차이가 났던것이 아닐까요?
기존의 역사해설에서 란주(灤州)는 현재의 하북성 란하(灤河)주변에 있었다고 하며, 이곳이 요(遼)나라의 남경도러고 해설하고 있는데, 이같은 이야기는 조선인들을 무시하는 행위로써, 시황제의 만리장성이 하북성까지 이어졌다는 논리와 함께 대표적인 역사조작입니다. 요사지리지 남경도로 보면 그곳은 사막지대로써, 노룡사막은 험난하기로 유명했다고 연행기록은 전합니다. 대부여님께서 말씀하시는 곳도 의미심장한 곳이라고 봅니다. 관심과 성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