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장은 그다지 깊게 관심을 가지지 못 하다가 울산부 선생안에서 3번의 도호부사겸경상좌도병마사를 역임한 기록이 보여서
관심을 깊게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영해에 있는 무안 박씨 종택이 박의장의 아들이 세운 것이라는 기록이 보여 다시 한번 눈길이 간 것이다.
무안박씨 종택은 울산에서 강원도로 가는 7번국도에서 보이는 곳이라 우연히 들린 곳인데 처음에는 박의장과의 관계를 몰랐다.
그리고 박의장의 자료를 조사하다가 종택이 박의장 아들이 세운 것을 알았으니 無知의 답사였다.
박의장은 경주에서도 기록이 남아 있는데 경주 황성공원에는 동도 수복비가 있다. 경주판관으로 있을 당시에 왜란으로 경주가
함락되고 어려울 시기에 군민이 서로 도와서 경주를 수복한 기념하기 위해 세원 비석인데 박의장과 관계되는 비가 유일한 것이다.
울산지역을 다스리는 벼슬을 3번이나 역임한 부사이면 기록도 많을 터이고 선정비 라던가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기록도 보일 것인데 조선왕조실록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박의장이 울산에 부사를 한 기록은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에 대부분 부임 한 것으로 나타난다.
울산부 선생안에 보면 그 기록은 아래와 같다.
가의대부 병마절도사겸 울산도호부사
경자년(1600년) 3월우방어사로 도임하였다고 되어 있다.
위에 글에서 보면 제목은 병마 절도사인데 내용은 우방어사로 되어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는 경상좌도병영 우후로 되어 있다.
두번째 기록은
겸부사 가의대부 병마절도사 박의장
만력36년(1608년) 9월15일에 도임하여 1610년 2월에 본댁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다.
세번 째 기록은
겸부사 가의대부 병마절도사 박의장
인동부사(구미 인근)였다가 승진되어 1612년에 10월6일 도임하고
1613년 4월2일에 체직되었다.
위의 기록중에서 첫 번째 기록에는 병마절도사로 오지 않았는데 제목을 병마절도사로 기록 한 것은
아마 울산선생부안을 기록 할때에는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난 뒤에 선생부안을 적었기에 그러한 기록을
남긴 것으로 생각되지만 1600년 2월29일에 겸울산도호부사로 임명하는 교지가 있어
정확하게 세번의 도호부사겸병마절도사를 역임 한 것을 알 수있다.
영해 창수면에는 박의장 모시는 사당과 신도비 그리고 묘가 있다 하여서 갔다 왔다.
울산에서 7번국도를 따라서 가면 거의 3시간 거리이고 좁은 국도를 따라 길고 긴 도로 가다가 얼핏 보니
2km 앞 갈림 길에 박의장 묘를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거기서 10여 분 가면 사당인 덕후루가 보이고 그 옆으로 신도비각이 있다.
박의장 묘는 산길을 따라 20여 분 오르면 볼 수 있는데 높지도 않아서 평안한 길이다.
박의장을 모시는 사당이다 조선후기의 느낌이 많이 목조 건축물로 형광등이 보여서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네모형의 건물이다.
비각 내부에 잘 모셔져 있는 박의장의 신도비 이다
받침은 연화문으로 장식으로 되어 있고 상부는 반원형이다. 오래 된 세월에 비하여 글이 잘보인다.
비각을 만들었기에 보존이 잘되고 있다.
덕후루 맞은편 낮은 산위에 있는 박의장의 묘이다, 정면으로 멀리는 산이 아득할 정도 이고
산세는 좋으며 문인석과 동자석, 망주석과 향로석 등의 남아 있다.
울산에 파견되어 벼슬을 한 이는 많지만 교지나 무덤 등이 남아 있는 것을 찾을려고 하면
그다지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지만 박의장은 교지나 사당, 묘가 잘 남아 있으며
울산 부 선생안 등도 기록이 있고 경주에는 그의 행적이 남아 있는 비석도 있어서
박의장 행적을 찾고 글을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렇듯 기록은 중요하다.
많은 인간이 살고 죽고 하지만 행적을 남긴 기록이
많이 없어 아쉬움이 남는데 박의장 처럼 기록이 많이 남아 있기를 기대하여 본다.
이로써 울산에 파견되어 벼슬한 사람의 기록을 찾아 적어 본다.
다른 부사나 절도사의 기록을 찾으러 길을 떠나야 한다
옥산 이희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