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1999년 3월 13일 오전 10시 51분.
수간호사와 간호사 두 명이 수술대 위에 나신으로 누워 있는
미주의 몸을 숙련된 몸짓으로 처치하고 있었다.
간호사들은 베타딘과 알코올이 묻은 두툼한 거즈로
미주의 가슴 부위에서부터 무릎 위까지 빠르고 정갈하게 닦아 냈다.
마주의 심장 박동 판독을 알려주는 심전도 그래프가 화며으로 떴다.
헉헉거리는 거친 숨결과 고통에 짓이겨진 신음소리와 함께 옅은 가래 같은 타액이
미주의 목구멍에서 끓자 간호사가 황급히 이물질을 뽑아 내는 석션을 해 주었다.
여의사는 어렵다고 판단했지만 그래도 정상 분만을 시도했었다.
하지만 역시 미주는 무시무시한 산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도 전혀 힘을 주지 못했다.
그녀의 체력은 이미 소진된 지 오래였다. 방법은 제왕절개 수술뿐이었다.
하지만........ 하는 망설임이 일순 여의사의 눈동자 속에서 동요를 일으켰다.
그러나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었다.
산모와 아이, 둘 다 잃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여의사는 미주의 눈빛에서 뭔가를 읽어 내고는 옆에 있던 수간호사에게
황급히 어딘가로 전화를 넣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저...........저..........정란...........아!
미주는 힘들게 친구의 이름를 불렀다.
정란은 수술용 장갑을 낀 손으로 미주의 손을 보듬어 쥐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주가 지금껏 견뎌 낸 초인적인 인내와 노력.
한 사람에 대한 사랑에 정란은 목에 메는지 계속해서 고개만 끄덕였다.
우......우리 아기!...... 그 사람, 스...........승우씨! 알아.
네 맘 잘 알아! 미주야 힘들더라도 잘 견더 내야 해.
이제 아주 좋은 일들만 남았어. 금방 끝날 거야.
그.....그렇겠지? 그럼!
그 사이 간호사들이 미주에게 전신 마취약 성분인 펜토탈이 들어간 혈관 주사를 놓았다.
후욱 후욱. 미주는 공기를 펌프질하듯이 간격을 두고 숨을 들이켰다.
미주의 몸 속에 마치 천국과 지옥이 있어 두 세력이 쉼 없이 영토 확장을 위해 싸우는 듯했다.
미주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히고 가느다란 목에도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정란은 간호사 대신 친구의 땀을 정성스레 꼭꼭 눌러 닦아 주었다.
마취가 빠르게 전신으로 퍼지는지 미주의 눈은 몽롱하게 초점이 흐려지고 있었다.
미주는 무엇인가를 천천히 그려 보는 듯 미소를 지었다.
이미 근육 이완제도 투여된 뒤였다. 오 간호사가 다시 미주의 입을 처치하기 시작했다.
석션을 하고 산소가 공급되는 튜브를 입 속에 밀어 넣었다.
그러는 동안 수술 집도복을 입은 의사 두 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왔다.
은테 안경을 쓴 40대 의사와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의사가 정란과 짧게 애기를 나눈 뒤
미주의 심장 박동 그래프와 혈압 수치 에어 공급을 확인했다.
언제 혈관 주사를 놓았나? 3분 지났습니다. 수간호사가 대답했다.
은테 안경은 시계를 한 번 본 뒤 턱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절벽 아래로 추락하듯이
마취 상태에 빠져 들고 있는 미주의 얼굴과 솟아 오른 만삭의 배를 본 다음 정란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착잡함이 실려 있었다.
그의 생각을 충분히 읽은 정란은 마스크 속에서 가벼운 한숨을 거푸 내쉬었다.
정란은 미주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래서 메스를 다루고 꿰매는 기술에는 따를 자가 없다고 알려진 두 명의 동료 전무가에게
간절히 부탁해서 시간을 맞추어 대기시킨 것이었다.
간호사 둘이 다시 날렵한 손길로 나신인 미주의 몸에 남은 소량의 알코올을 탈지면과 거즈로 닦아 내었다.
흐음. 어디 한번 해 보자구!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한 은테 안경이 환자 앞으로 다가서며
초조감을 감추지 못하는 정란을 다시 돌아보았다.
닥터 허! 수혈할 피는 충분히 확보해 뒀습니까?
네.......하지만.......압니다. 역시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태아 상태는 어때요?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의사가 정란에게 물었다. 염려되는 상황이에요.
자넨 환자 상태를 보고도 모르겠나?
1초라도 빨리 절개해서 꺼내지 않으면 태아에게 심각한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어.
이미 진행됐는지는 속을 열어봐야 아는 거고. 아이가 좀 자란 뒤까지도 두고 봐야 해.
은테 안경의 말에 산부인과 전문의인 정란도 할말이 없었다.
정란이 미주만큼 염려하는 부분도 테내 아기의 건강 상태였다.
현재로선 어떤 말이나 진단도 섣부른 언급이고 속단일 터였다.
환자의 얼굴을 잠시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던 은테 안경이 곁에 선 두 의사를 돌아보았다.
이런 상황을 가능하게 하다니 정말 대단한 여자야............
정란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테 안경은 시계를 한번 들여다본 뒤 두 팔을 들어 어깨를 가볍게 휘둘렀다.
수술을 집도하기 직전에 어깨 근육을 간단히 푼 그는 수간호사가 건네 준 메스를 받았다.
마취가 시작된 지 8분 정도가 경과했다. 한 손에 메스를 치켜든 은태 안경은
긴장한 눈빛으로 자신에게 바짝 붙어 서는 정란을 돌아보았다.
메스를 다루게에 불편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허 선생! 좀 떨어져요.
죄.....죄송합니다.
허 선생이 허둥거리는 건 처음 보는군. 참 마취는 몇 분짜립니까?
..........40분입니다.
뭐라구요?
허 선생 지금 정신이 있어요?
죄송합니다. 환자의 간절한 부탁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나 원 참!
은테 안경은 곤혹스런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보통의 임산부라면 은테 안경의 능숙한 실력으로
20분 안에 제왕절개 수술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극도로 상황이 나쁜 임산부라면 최소한 한 시간 마취는 해야 했다.
이중 절개한 부위를 꿰매는 처치가 완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환자가 마취에서 깨어나는 상황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은테 안경은 몹시 마땅찮은 표정이었지만 환자에 대한 애기를 들었던 탓에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몸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목숨이 위험하다고 해도
단 한 순간이라도 자신의 아기를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자신의 품에 안아 보려는 그 강인하고 놀라운 모성애를.
은테 안경은 미주의 솟아오른 배 부위의 돌출된 배꼽에서 옆과 아래로
손마디 세 개 거리의 지점에 날카롭게 빛나는 매스를 가져다 대었다.
그는 세로 절개를 택했다. 제왕절개를 받는 산부들은 흉터 자국을
되도록 덜 남기기 위해서 가로 절개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가로 절개는 용출되는 피가 많아 상대적으로 봉합이 어렵고 시간이 더 걸렸다.
세로 절개는 빠르고 무엇보다도 피의 소모량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자신의 의도가 전혀 먹혀들지 않을 거라는 짐작이 들긴 했지만
어쨌든 현재 상황으로선 그나마 유일한 선택이었다.
수술실 안에 있는 여섯 사람 모두의 시선이 미주의 커다란 배와 메스 날에 집중되어 있었다.
정란은 그 순간 눈을 감고 하늘을 우러러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
기적을 일으키는 분이 계시다면 도와 주십시오.
미주가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잘 알고 계시다면 도와 주셔야 합니다.
제발 그렇게 해 주십시오. 메스 날의 끝이 살갗을 파고 들었다.
아주 잠깐 흰 속살이 열리는 듯싶더니 이내 붉은 빛이 온도계 눈금처럼 메스 날을 뒤쫓았다.
수술실 밖 복도 승우는 희고 서늘한 이마를 벽에 대고 서 있었다.
닫혀진 수술실 문을 거듭 돌아보면서 그는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애써 무엇인가를 참아 냈다.
승우야........
아버지 목소리였다.
승우는 대기인을 위한 주황색 의자가 10여 개 놓여 있는 입구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뒤로는 서늘한 표정의 어머니가 말없이 서 계셨다.
어떻게 알고 오셨을 까. 아무에게도 알릴 여유가 없었는데.
어쩌면 허 선배가 연락을 취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온통 굳게 닫힌 수술실 안쪽에 가 있었다.
점잖은 회갈색 아르마니 양복과 프라다 투피스를 입은 승우의 부모는
그 동안 지독한 지옥의 터널을 통과해 온 외아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애기는...........?
아버지가 물었다. 승우는 순간적으로 혼란이 왔다.
산모인 아내를 묻는 것인지 아내 뱃속에 있는 아기를 묻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
수술중이에요.
어머니는 무슨 말인가를 꺼내려다가 고개를 모로 꺽었다.
물기가 빠지고 탈색된 귤 껍질같이 파삭해진 아들의 낯빛과 야윈 모습에
억장이 무너지는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승우는 어머니를 보지 않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미주와의 결혼을 완강히 반대하고 탐탁지 않게 여겼던 어머니였다.
식장에도 나타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미주를 며느리로 인정해 주지 않던 어머니였다.
자상하고 교양 있는 어머니의 얼굴 뒤에 그토록 완강한 분노가 자리잡고 있었다니.
외아들에 대한 기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부모와 자식 간의 의절하다시피 하고 살아야 할 이유는 찾기 힘들었다.
아버지는 고요한 눈빛으로 아들을 응시하고는 툭툭 어깨를 두드렸다.
희망을 가지고 기다려 보자.
아버지의 말에 승우는 하얗게 분말이 날리는 듯한 미소를 슬몃 머금었다.
그의 얼굴은 깊은 슬픔으로 금이 가 있었다.
희망요?
어떤 희망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미주와 제가 지난 반년을 어떻게 살았는지 아세요?
절망과 희망이란 말에 골백 번도 더 상처를 입었어요. 제발. 아무 말씀 마세요.
눈빛으로만 그렇게 외쳤을 뿐 승우는 마른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고개를 떨구고 있던 어머니는 마땅히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허허로운 눈길로 병원 천장이며 벽을 휘돌아 보았다.
그러더니 돌아서서 손수건으로 눈꼬리를 찍었다.
어머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실까? 매몰차게 미주를 대했던 일?
아들에게 다시는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했던 일?
아니면........수술실에 들어가 있는 며느리에게 가책을 느끼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녀석아 지금 처한 상황을 봐라. 네 꼴을 봐.
에미가 돼서 자식이 그것도 외아들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겠니?
다 그럴 만해서 반대했던 것 아니냐! 어느 부모가 아들보다도 세 살 위인 연상의 여자,
그것도 서른을 넘긴 며느리를 맞고 싶어하겠니?
결혼한 지 4년이 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더니 겨우 아이를 가져선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이냐.
내가 뭐랬니?
여자가 건강한 자식을 생산하려면 20대가 좋은 법이라고 하지 않던 그게 자연의 섭리야.
게다가 넌 외아들이 아니냐?
지금껏 너를 이만큼 키워 온 부모로서 그 정도 욕심을 부리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아무리 달라졌어도 본질적인 건 변하지 않는다.
가족의 본질은 바로 보수성이야.
그 보수성이 지금껏 가족과 이 사회를 지탱해 온 힘이라는 걸 너도 깨달아야 해.
어머니에게는 일찌감치 승우의 배필로 점찍어 놓은 며느릿감이 있었다.
승우의 아버지가 필리핀 영사로 근무할 당시 상관이었던 대사의 둘째 딸 영은이.
승우보다 한 살 아래인 영은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승우를 좋아해서
10년이 넘도록 해바라기처럼 승우의 주변을 맴돌았다.
영은은 발랄하고 건강한 데다 애교도 있었고 붙임성도 많았다.
얼굴도 귀여웠고 몸매도 예뻤다.
마닐라 대학에서 치의학을 전공한 영은은 1년에 두어 번씩 한국에 들어와
승우의 마음을 얻고 싶어했지만 승우는 그녀를 언제나 동생으로만 대할 뿐
끝끝내 연인으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승우가 결혼한 지 1년 뒤 영은은 필리핀에서 대학에 출강하는 교포 교수와 결혼했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잘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어머니로는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아버지는 중간자 입장이었다.
양쪽에서 팽팽하게 맞서 있는 아내와 다 커 버린 아들 사이에서 그 동안 정신적인 고통이 컸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 모두가 상처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삼각형의 정점에 미주가 있었다.
첫댓글 결혼은 본인 당사자가 가장 중요한건데...왜 부모들은 사랑하는 사람끼리하는 결혼을 그리도 반대하는걸까?
나도 부모지만 왜 그런 결혼을 원하는지 알수가없네!! 아이들이 행복해야지 부모가 무슨 상관인가? 부모는 그져 옆에서 지겨만 주면 돼는데..............
부모는 짧은 순간의 사랑 때문에 평생을 불행하게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사랑이라는 감정보다 이성적으로 현명하고 평탄하게 무리없이 살기를 바라는거지요~소설속의 사랑을 않해 보아서 그런지 사랑보다 이성적인 삶을 선호하는 편이랍니다....감사합니다
읽은 것 같기도 하고 긴가민가.... 승우가 혹 화가 아닌가요...??
잘~보구 갑니다~~~^^
감사히 읽습니다...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