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09 주일예배
본문: 여호수아 4:20-24
제목: 여호와의 손의 강하심
1. 가나안에 이를려면 두 강, 홍해와 요단을 건너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여정에서 나오는 세 이름이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받는 축복과 영광의 땅이다. 천국을 상징하기도 하다.
홍해와 요단은 하나님의 강하신 손의 능력으로 건널 수 있었다.
홍해는 출애굽을 위해서 건너야만 하는 장애물이다.
교회의 뜻도, 세상에서 불러낸 사람들의 모임이다.
교회 다니면서도 여전히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홍해를 건너지 못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7)
세상과 벗이 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사람이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4:4)
요단은 가나안의 축복을 위해서 건너야 하는 강이다.
광야에서의 연단으로 옛 사람을 벗고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만이 건널 수 있는 강이다.
홍해를 건너 광야에 와서도 애굽을 버리지 못한 것은 나의 옛 사람이 여전히 주인인 때문이었다.
광야의 고난과 훈련은 세상을 사랑하는 나의 옛 사람을 벗게 하는 연단인 것이다.
세상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으로 여전히 내가 왕 노릇하는 사람은 요단을 건널 수 없다.
세상 사랑과 자기 사랑의 주인인 옛 사람으로 세상 사람들은 산다.
이 옛 사람을 벗는 데, 요셉과 다윗은 10여년이 걸렸고,
아브라함은 25년, 모세는 40년이 걸렸다.
그리고 요단을 건너 가나안의 축복과 영광에 이르게 되었다.
율법쟁이들, 교리쟁이들은,
홍해로, 구원의 교리들을 만들고, 요단으로 축복과 천국의 교리들을 만들어 냈다.
그들의 교리처럼, 홍해를 건너면 구원이고, 요단을 건너면 축복이고 천국인가?
교회에 속하면 홍해를 건넌 것이고, 요단의 축복은 따논 당상인가? 과연 그런가?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의 다수는 광야에서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전10:5)
요단을 건넌 2세대와 그 이후 세대들은 결국 가나안에서 멸망하고 말았다.
사사시대와 왕정시대, 바벨론 포로와 귀환시대 후 가나안에서 멸망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교리쟁이들은 육신만 죽은 것이지, 영혼은 구원을 받았다고도 한다.
왜냐? 홍해를 건너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요, 구원은 잃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교회에 오는 것이 홍해를 건너는 것이요, 교회에 충성하면 요단을 건넌다고 한다.
유대교회와 로마교회, 개혁교화와 현대교회는 한결같이
교회는 구원의 방주요, 천국행 열차이다.
그들은 시대만 다를 뿐, 쌍둥이들이요, 역사의 반복인 것을, 알아야 한다.
요즘은 교회가 구원의 방주, 천국행 열차라고 아무리 전도를 해도, 세상은 미동도 않는다.
그들은 알고 있다. 종교란, 악세사리요 야편인 것을!
그 하나님은, 프로이드가 말한 대로 ‘아버지 상(father image)’인 것을!
다윈의 진화론 한 방에, 프로이드의 정신분석 한 방에, 리첼의 양식비평 한 방에
그 하나님과 그 성경은 죽고 말았다. 퇴물이 되고 말았다.
쉐퍼는 기독교국가 유럽과 미국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은 극히 소수라고 한다.
2. 두 강을 건넘은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심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24)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의 손의 역사이다.
땅의 모든 백성들은 그것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지고 하나님의 역사에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다.
하나님은 괴롭히던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주시고 원수들의 멸망을 듣고 보게 하실 것이다.
마지막 심판 날엔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을 절감할 것이고, 영원한 불못에 다시 놀랄 것이다.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51:1-3)
억울한 죄목으로 오랫동안 감옥살이하던 요셉을 하루 아침에 대애굽제국의 총리로 세우셨다.
적국에서 망명생활하며 시글락 환난을 당하던 다윗을 헤브론에 올려 왕이 되게 하셨다.
광야생활을 마친 85세의 갈렙에게 거인들의 성읍 기럇 아르바, 헤브론을 정복하게 하셨다.
40년 광야생활을 마친 모세에게 40년의 놀라운 출애굽의 대역사를 이루게 하셨다.
땅의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 주실 것이다.
괴롭게 하신 날수 대로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히실 것이다.
그 작은 자가 천명을 이루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속히 이루게 하실 것이다.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고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게 할 것이다.
이는 다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심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옛날과 같이 지금도 동일하게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홍해를 기적으로 건너게 하시고 요단을 동일하게 기적으로 건너게 하신다.
참 기독교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홍해를 건너고 요단을 건너는 종교이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으로 홍해를 건너고 광야생활의 연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기적으로 요단을 건너는 종교이다.
광야생활의 연단으로 기적적인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가 없다면 요단을 건널 수 없다.
옛 사람의 성품과 행위로는 요단을 건널 수 없다.
회심과 행함으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이 없다면 요단을 건널 수 없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종교행위일 뿐이다.
기적적인 회심으로 믿음과 성품과 삶에 변화의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
어떤 열매인가? 초대교회와 발도인교회가 맺은 열매이다.
‘너희는 하나님 나라를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는다’고 하셨다.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변화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하였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58:8-11)
주님은 이 변화를 더욱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다.
사람들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혀주고
병들었을 때에 돌봐주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아주는 변화와 열매이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너희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34,40)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입증해 주는 변화의 열매들이다.
초대교회와 발도인교회는 이러한 변화가 없다면 세례를 결코 주지 않았다.
당연히 성만찬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요단을 결코 건널 수 없는 자들이니까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요단을 가르신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마르게 하사 너희를 건너게 하신 것이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수4:23)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상을 주시는 분이시다.
오늘도 하나님은 놀라운 기적을 행하심으로,
오늘도 기적적인 방법으로 홍해를 건너고 요단을 건너게 하시는 분이시다.
오른 쪽에 속한 양들처럼 선한 일을 행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의 행위들을 하는 자들에게만 구원과 천국이 열린다.
믿음은 순종하고, 말씀은 청종함으로써, 사람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다.
요단을 건넌다는 것이, 다윗에게는, 헤브론에 오르는 것이었고,
갈렙에게는 ‘기럇 아르바’ 산지를 정복하게 하시는 것이었다.
지금 우리에게도 헤브론에 오르게 하시고 기럇 아르바를 주시는 것이다.
3. 두 강을 건넘은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기 위해서다.
기적적인 방법으로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헤브론에 오르게 하시는 것은, 더 중요한 목적은,
택한 백성들이 자기 하나님을 항상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헤브론에 오르게 하실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신8:12-20)
경외한다는 것은 아브라함을 보고 배워야 한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항상,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해서
홍해와 요단을 기적으로 건너게 하셨음을 명심해야 한다.
경외는 이삭까지도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순종하여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 수준이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요단 한 가운데서 열 두 돌을 취하여 이를 기념하게 하셨다.
이 돌들이 무슨 뜻이냐고 묻거든,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여러분도 요단을 마르게 하사 건너게 하시거든, 헤브론에 기적으로 오르게 하시거든,
주변에서 기념물을 취하고 기억상실증 치료약으로 사용하시기 바란다.
이제는 선한 행실로 가득차게 하고, 자기를 위해 보물을 땅에 쌓지 말아야 할 것이다.
주셨을 때, 이루어 주셨을 때, 더욱더 오직 우리 하나님만을 경외해야 할 것이다.
쌓지 않고, 주는 자에게, 하나님은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신다.
내 나라 내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할 때,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