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환 金世煥(미상 ~ 1923)】 "서로군정서 西路軍政署 소대장으로 활동"
1923년 군정서(軍政署,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추정) 소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대 전반 독립군 간부로 활동한 것으로 보아, 1919년 3·1운동 전후 서간도(西間島) 지역에서 독립군단(獨立軍團)이 성립되던 초기부터 독립군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서로군정서는 1919년 11월 성립된 재만(在滿) 독립군단이었다. 1919년 1월 서간도 이주한인사회를 이끌었던 자치기관인 부민단(扶民團)에 이어 성립된 한족회(韓族會)는 석달 후인 4월에 독립운동을 전담할 군정부(軍政府)를 산하에 편성하였다. 전 민족적인 3·1 독립 운동이 일어나 독립에 대한 열망이 확고해지자 그를 실천할 전담 기구를 만든 것이었다. 이 군정부는 그해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의해 서로군정서로 개칭하고, 임시정부 산하 독립군단이 되었다. 서로군정서 초기 간부진은 독판(督辦) 이상룡(李相龍), 부독판 여준(呂準), 정무청장 이탁(李沰), 참모부장 김동삼(金東三), 사령관 지청천(池靑天, 이명 이청천(李靑天)) 등이었다. 서로군정서는 물론 같은 시기 서간도 여러 지역에 성립된 독립군단 소속 독립군들은 성립과 동시에 활발한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일제는 서북간도(西北間島) 한인 사회와 독립군 기지를 초토화하려고 경신참변(庚申慘變, 또는 간도참변(間島慘變))을 일으켰다.
1920년 10월 일본군 대병력이 서북간도로 침입해오자 서로군정서 일부 주력 부대는 사령관 지청천의 인솔하에 북만주(北滿洲)를 거쳐 소련의 자유시(自由市, 알렉세예브스크, 현 스보보드니)로 이동하였다. 이와 달리 자유시로 가지 않고 잔류한 서로군정서 병력은 1921년 초, 신광재(辛光在)·채찬(蔡燦, 이명 백광운(白狂雲))·차천리(車千里) 등의 주도하에 조직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압록강변 린장(臨江)·지안현(輯安縣) 등에 독립군 병력을 배치하고 또 다시 본격적인 유격전을 수행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1922년 8월 남만주(南滿洲)의 통합 독립운동 단체로 탄생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담하였다. 하지만 일부는 통의부에 가담하지 않고 계속 서로군정서 소속원으로 남았다.
이때 통의부에 가담하지 않고 서로군정서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국내 진입 유격 활동을 지휘하였다. 서로군정서 소속 유격대의 주요 국내 진입 활동지는 압록강과 접한 평안남북도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 설치된 군파견대·헌병대·주재소·면사무소 등 침략기관이나 이들 기관을 움직이는 일제 군경(軍警) 및 친일 무리들이 파괴와 처단 대상이었다.
1923년 2월 10여 명의 부하대원들을 이끌고 평북 중강진(中江津)으로 진입하였다. 침략 기관을 습격하고 군자금도 모집할 목적이었다. 그러나 같은 달 18일 중강진경찰대와 만나 전면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성능 좋은 최신식 소총으로 공격해오는 일제 경찰대에 의해 전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