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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통일의 길
함석헌
자주성 없는 따라지 정치
닉슨이라는 사람이 한 번 말 한마디를 내밸자 우리나라 정치계는 갑자기 마치 다 먹고 난 뼈다귀를 내던진 때의 뜰 아래 강아지 무리의 사회 같이 요란스러워졌다. 서로들 먹을 통이 났다고, 서로들 제가 먼저 봤다고, 제 거라고, 서로들 제가 바로 물었노라고, 으르렁 댄다. 그것을 내려다보며 입가에 기름이 번지르해 앉은 곰은 무슨 생각을 할까? 또 마음은 서로 다 오월(吳越)이면서도 같이 먹는 잔치에 참여한 처지라, 체면을 뵈려 하고 맞장구를 쳐 추려 하는 승냥이 산돼지 여우하는 것들은 또 어떤 표정을 할까? 그러나 그보다도 더 잊을 수 없는 것은 문간의 저 늙은 어멈 이다. 그 강아지들과 그것들의 어미와 그 어미의 어미까지를 다 길러낸 그가 그 꼴을 보고, 더구나 슬프게 어질어진 지혜로 당 위에 앉은 그것들의 뼛속을 다 뚫어보는 그 눈치에, 그 마음이 과연 어떠할까? 아마도 속으로 흐르는 눈물에 목 구멍이 멜거다.
우국충정이 언제부터 그들에게 그렇게 사무쳤을까? 선견지명이 어느 날부터 그렇게 뛰어났을까? 천하경륜을 어디서 그렇게 고명하게 배웠을까? 어쩌면 역사를 마루재는 거물(巨物)이 말똥에 버섯 돋듯, 하룻밤 새에 그렇게 됐을까?
들어봐라, 남북협상을 그렇게 큰마음 먹고 할진대 왜 일찍이 김구 선생을 못 따라갔던가? 왜 그를 용공주의라 몰아치며 욕했고 왜 죽여 버렸나?
가족 찾기 운동을 그렇게 인도주의 정신으로 벌려야 할줄 알았을진대 왜 학생들이 남북의 젊은이가 만나 아리랑이라도 서로 같이 불러보자 했을 때 좌익이라 무자비하게 몰아치고 못 하게 했던가?
평화통일이 그렇게 대세에 합한 옳은 일인줄 알았을진대 왜 이때껏은 한 마디도 없었으며, 평화 소리만 해도 이북 공산당 편이라고 비난해 입도 못열게 했던가?
왜 중립론을 전에 하고 남이 하면 잘못이고 이제 내가 하면 옳은 일인가? 옳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처음 생각해 낸 독창인 것처럼 전매특허를 하려나?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는 것은 무식한 소리라고 먼저 말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 때는 들은 척도 않고 묵살하더니 요새 와서는 국시를 변경했는가? 국시도 넥타이처럼 남 봐가며 바꿔 매는 것인가? 국시라고 고정불변 할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고치려면 그 이유를 아울러 국민 앞에 밝히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모든 보도, 명령, 계획, 방침을 한 때 중지하고라도 그것부터 분명히 널리 빠짐없이 알려야할 것이다. 근시였으면 근시였다고 천견(淺見)이었으면 천견이었다고 솔직히 고백을 하면 도리어 위신이 서지만 그렇지 못하면 국민이 믿지 않는다. 작은 면자 구하려다가 큰 면자(面子)를 상치 말라.
인격의 기초를 닦는 초등 중등의 교육을 반공일색으로 해서는 병신 인간을 만들어 내게 되고 나라의 백년대계를 그릇치는 죄악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감옥 갈 각오를 하면적 외쳤으니 못들었다고는 못할 것이다. 못들었다면 그것은 국민에게 너무 외면했던 것을 말하는 것이요, 언론을 탄압해서 멍청이를 만든 것을 증거하는 말이다. 천고청비(天高聽卑)라 높을수록 낮추 듣도록 힘써야 한다. 지혜가 학자에게 있지 않고 낮은 씨알에 있다. 사실이 지혜이기 때문이다. 교육을 그렇게 어떤 눈앞의 목적 때문에 치우치게 하는 것은 큰 죄악이라고 하던 우리말을 이제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교육 방침을 어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없다. 고치려거든 일식 월식 같이 천하 사람이 다 알게 내놓고 고쳐야 한다. 우물쭈물 하는 것은 국민을 대접하는 도리가 아니요, 자기 대접하는 도리도 아니다.
이런 비판들을 하면 혹 때가 있기 때문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때는 때가 지금과 달랐고 지금은 대세가 변했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때가 무슨 때냐? 먹고 남은 찌꺼기를 던져 주기를 기다리는 강아지의 때? 그리고 오면 서로 경쟁하는 때? 때는 오기 전에 아는 때지, 온 후에 따르노라 서두는 것 아니다, 때는 자주하는 의지만이 가진다.
이제 와서 각별 서두는 것이 속알머리 없는 증거다. 자식을 위해 자나 깨나 마음쓰지 않는 때 없는 어머니는 말이 적은 법이요, 큰 정성이나 있는 듯 걱정을 해주는 것은 남이다. 그 것은 아첨이나 제 생색을 내려는 심리에서 오는 일이 많다. 정말 나라 생각을 했다면 벌써부터 통일 생각 했어야 하고 모든 정책에 그것이 반영 되었어야 한다. 생각 없이 남의 세력 에 노는 따라지 정치였기 때문에 남의 말 한 마디에 부산을 떨게 되는 것이다. 생각이 없을 뿐 아니라 이날껏 국민더러는 통일 문제에 대해 말을 못하게 하지 않았나? 그리고는 이제 와서 갑자기 대세를 혼자 안 것처럼, 획기적인 국책을 독창적으로 세우기나 하는 것처럼 떠들어 댄다. 그것은 이날까지의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고 갑자기 들이닥친 난국을 뚫고 나가기위해 국민의 협력을 비는 성의와 겸손이 있는 태도가 아니요, 아직도 속이고 꿰매려는 비겁한 심산에서 나오는 일이다. 그러기에 대세에 몰려서 말을 끄집어내기는 하고도 국민이 정작 활발히 토론하려는 기색이 보이면 조심해라, 흥분은 금물이라, 경각심을 일으켜라, 갖은 수단으로 그것을 억제하려 든다. 이 무슨 모순인가? 새삼 설명 아니해도 그 주의쯤 아니 할 국민이 누군가? 그리고 보면 그 억제하려는 속의 뜻은 국민이 직접 나서서 하나의 국민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해서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왜 그럴까? 국민운동이 일어나 국민의 힘으로 통일이 되면 자기네의 특권구조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국민을 못 믿거든 아예 말을 하지 말지. 국민을 믿지 않음은 국민을 업신여김이다. 국민을 모두 어린애처럼 아는, 모두 공산당의 선전에 넘어갈 어리석은 것으로만 아는 바로 거기가 그들의 어리석음 악함이 있는 곳이다. 그들로는 통일 못 이룬다.
국민 부재의 정치
그러기 때문에 이 정치의 또 하나 큰 잘못은 국민을 내놓고, 내놓을 뿐 아니라 억누르고, 억누르다 모자라면 달래고, 달래서 아니 되면 속여서라도 혼자서만 하려는, 케케묵은 소위 지도자의식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그들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국민의 지지없는 줄 알기 때문에 폭력으로 억눌렀고, 폭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국민보다 외국 세력을 더 친했고, 그 결과로 대국에 대해 강아지처럼 꼬리를 치며 쳐다봐야 하는 따라지 정치가 됐다.
해방 후 정치에 나서는 사람들이 되지 못하게 정권 잡기에만 급급하지 말고 정말 민족의 앞날을 위하는 마음이 있더라면 제각기 작은 소견에 집착하기를 버리고 노도(怒濤)처럼 일어나는 국민의 감격을 잡아 탈 수 있었을 것이요, 그리하여 그 속에서 하늘을 향해 허우적이는 손길같은 창조와 봉사의 의욕을 한데 묶어 잘 이끌어 갔다면 아무리 미소의 대립이 있었다 하더라도 능히 그것을 이기고 통일 정부를 세울 수가 있었을 것이요, 그랬다면 사반 세기를 이렇게 참혹하게 딩굴지는 않았을 것이다.
6.25 때에 남한만이라도 진심으로 국민에게 호소하는 태도였다면 오늘같이 이렇게 남 북이 꽉 막혀 버리는 이런 결과로만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국을 휩쓴 것은 전쟁 중에도 전쟁 후에도 일본제국주의 시대의 군인의 버릇이었다. 새 역사의 나가는 방향은 여기서부터 크게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민중에게는 마치 일제시대에 되돌아간 느낌이 있었다.
한일 회담 때에만 하더라도 일어나는 국민운동을 그렇게 무참히 짓밟지만 않았더라면 일이 오늘같이 이렇게 더럽게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일본이 이렇게 빨리 될 줄을 자기네도 몰랐다고 빈정대리 만큼 쉽게 상전의 자리에 다시 앉은 것을 보고 그래도 한국의 종자로서 그들도 무슨 소감이 있는가 없는가?
월남 전쟁을 해달라고 흥정이 왔을 때에도 통일이 우리의 근본적인 첫째 조건인 것을 잊지 않고 국민의 뒷받침을 얻어 뱃짱을 부렸다면 오늘처럼 이렇게 빛스럽지 못하게 끝을 맺고, 이렇게 업신여김을 받아 쩔쩔매지는 않을 것이다.
빚을 져도 국민에게 의론이라도 하고 졌더라면.
근대화를 해도 국민 그 자체가 우선 근대화 하도록 했더라면.
하나에서 열까지 국민 부재의 정치였다. 국민은 없이 몇 사람의 사의사견(私意私見)으로 했으니 부정부패가 전면적으로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당연한 귀결이었다.
우리 판단이 잘못일까? 만일 그렇다고 생각이 되거든 국민에게 한 번 물어보는 것이 좋다. 자유를 보장한 후 모든 국민에게 6.25 때, 한일 회담 때, 월남 전쟁 때, 모든 선거 때, 모 든 사업에 대해 진정한 소감을 아무 꺼림없이 한번 말하라 해보라. 그러면 어떤 대답이 나오나? 틀림없이 사회가 전면적으로 발끈 뒤집힐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알기 때문에 신문 이나 라디오가 진정한 보도를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먼저 할 일은 국민의 전체적인 동원이다. 전 국민이 정말 생명을 내놓고 할 결심만 한다면 통일은 이미 거기 있다.
국민적 결심
생각해 보라 생명의 근본원리가 스스로함 아닌가? 어느 것 치고 스스로 하지 않은 것이 있나? 몸의 상처가 나기는 밖에서 오는 힘으로 나도 아물기는 제 속의 사는 힘으로만 된다. 그 힘이 없다면 약을 아무리 써도 소용이 없지 않은가? 모든 낳음은 스스로 낳음이다. 나라도 민족도 한 생명체요 한 인격이다. 그러므로 분렬이 오기는 아무리 외래의 힘으로 왔어도 다시 통일이 되는 것은 백년 가다가라도 제힘에 의해서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라는 나라에만 있다. 민족은 민족 전체에만 있다. 어느 일부 사람이 대신할 수 없다. 비록 좋은 뜻에서 했다 해도 그것은 죄악이다. 아니다, 좋은 뜻이 뭐냐? 전체를 아는 것이 곧 좋은 뜻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제 마음이 없고 백성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민중 더러는 의견을 말 못하게 하면서 통일이 무슨 통일인가?
새더러 노래할 줄 모른다. 날지 못한다. 책망하지 말고 네 새장을 부숴라. 그 놈이 단번에 구만장천(九萬長天)에 날아 땅 끝까지를 음악으로 채울 것이다. 민중을 민중끼리 만나게 하라. 어느 강대국을 가지고도 막아낼 수 없는 지혜와 힘이 거기서 나올 것이다.
그들은 왜 민중을 믿지 못할까? 그렇게도 잘났을까? 그렇게도 강할까 세계보다 더 큰집을 짓겠다 하리만큼 그 소견은 그렇게도 빽빽 멘 것일까? 아니다. 욕심은 숨통을 막는 법이다.
통일 문제가 나올 때마다 답답한 것은 방안부터 묻는 일이다. 명상을 할 때는 눈을 감지만 깨달음이 오는 순간엔 눈이 크게 열리는 법이다. 방안 묻는 것은 결심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유지자 사경성(有志者 事竟成)이라, 뜻 있으면 일은 되고야 만다. 그것을 옛말이라 하는 가? 요새 문명의 막다른 벽을 뚫으려는 미래학자들이 뭐라 말하는지 아나? 인간의 상상에 떠오른 것은 그대로 되고야 만다고 한다. 결심이 전부다.
결심이 무섭다. 결은 열어제친다는 뜻이다. 갇힌 물의 어느 한 목을 열어 제쳐서 그리로만 흐르게 하면 약결강하(若決江河)라, 막아낼 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의 한 길을 열어 혼몸의 힘을 그리로 뻗게하는 것이 결심이다. 이리저리 헤지면 약하다. 가만 두면 썩는다 하나로 모아 쏟으면 산 활동이 나온다. 그러므로 그것은 집중이요, 요약이다. 中해서 中해서 새파란 칼날보다 더 가는 선, 선 아닌 선에, 約 해서 約해서 기하학적인 점 보다 더 뵈지 않는 점 아닌 점에 이른 것이 결심이다. “양두구절단 일검의천한(兩頭俱截斷 一劒依天寒-楚俊禪師)” 생사의 두 끝을 양손에 갈라 쥐고 재고 있는 한은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고, 생각이 많으면 길은 무한한 길이 있다. 그러한 한 아무것도 못한다. 생사의 두 대가리를 다 잘라 버리고 곧추 하늘가에 일어설 때 파르르 떠는 시설이 눈 앞에 나타난다.
그것은 뜰미지한 생각이 아니다. 차다 선듯, 들어가는 줄 모르게 우주 복판을 쪼개버리는 칼날이다. 그러므로 못 자를 것이 없다. 살까 죽을까 하는 것은 참 삶이 아니요, 제 뜻으로 궤도를 삼는 전진만이 생명의 길이다.
참 삶은 선택을 허락지 않는 지경에 있다. 거기 이른 것이 결심이다. 개인의 경우도 그렇지만 한 민족의 일은 더구나 그렇다. 결심에 이르지 못한 백성 방안에 헤매일 수밖에 없다.
그러기 때문에 결심은 곧 죽을 결심이다. 살았거니 하는 눈에는 어디를 봐도 죽음 밖에 뵈는 것이 없고, 죽었다 하는 마음에는 나갈 길이 직감적으로 환히 열려 있다. 나라의 허리를 잘리고도 아직도 우리가 살았거니, 돈도 모을 수 있고 세력도 잡을 수 있고 행복을 누릴 수 있거니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망상이요. 그 망상 때문에 참으로 나갈 길을 못 찾았고, 참 길을 못 보기 때문에 방안을 찾고 있다. 방안은 한가한 사람의 소리다. 죽음에 직면한 사람이 언제 길을 더듬고 있겠나? 방안의 연구로 절대 통일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라도 이 민 족으로 하여금 성패를 묻지 않는 결심에 이르게 하라.
오늘 우리 민족은 분명 겁에 질린 민족이다. 그것은 삶 아닌 것을 삶으로 보고 죽음 아닌 것을 죽음으로 생각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생의 개념이 썩었다. 생의 평가 절하를 한 민족이다. 그러므로 일마다 구구한 것뿐이요, 말마다 구차한 소리뿐이다. 자주성, 자존, 자중 하는 정신을 잃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 모면할까 하는 생각뿐이지.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가려는, 보람에 살려는 결심이 없다. 어쩌면 이렇게도 타락이 됐을까? 어느 외국사람이 그랬다 하지 않나? “한국 사람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한국 사람 목숨 내대고 하는 일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라고. 아멘!
지배자란 것이 사실은 허깨비다. 그들이 어마어마하게 무장을 한 것은 속알머리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마 몇 사람은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없이 사람을 죽이 지는 못할 것이다. 썩어진 냄새는 언제까지도 맡을 수가 있을지 몰라도 피 비린 냄새는 그렇게 못한다. 아무리 피를 좋아하는 살인귀라도 좀 맡으면 오장육부가 뒤집혀 나가 넘어지고 만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부정부패가 계속되는 것은 아직 대접을 못 받았기 때문이다. 국내 국외를 말할 것 없이 피를 원하는 자에게는 맡겨 주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내 한 목숨을 바칠 각오 아니하고, 산다는 보장 밑에 하는 천 가지 방안, 만 가지 약책, 다 빈 소리다. 그것은 결국 누구더러 죽어 달라는 말이다. 죽음은 남에게 요구하면 악이요, 내게 지우면 선이라. 정치가의 말 하나도 믿지 못할 잔인한 소리다.
생명의 대주재시여, 죽음으로 사는 당신의 얼로 우리 속을 알들여 줍소서 !
불속의 밤알
오늘 아침 신문에 외무장관의 통일 방침을 보도한 것이 있다. 세 단계로 되어 있는데, 첫단계는 인도적으로, 둘째 단계는 비정치적으로, 그리고 나중에 가서 정치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 말이 만일 통일문제가 정치문제만이 아니란 것을 알아서 하는 말이라면 옳다. 그러나 그렇다면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정말 정부는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국민이 인도적으로 비정치직으로 활동하는 것을 완전히 자유로 하도록 믿고 내맡겨 둘터인가? 이점에서 많이 의심쩍다. 거리에 떠도는 말이 벌써 가족 찾기 운동이 첨부터 적십자의 자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란 말이 있고, 심지어는 겉에 나타난 것으로 보면 서로 아무 관련이 없는 따로 떨어진 사건들인 것같은 광주단지 사건과, 가족 찾기 운동의 불쑥 일어난 것과, 실미도의 공비 침 입이 됐다가 특수범의 난동으로 밝혀진 사건과의 사이에는 뵈지 않는 줄이 통한다는 말까지 있다. 긴지 아닌지 거리에 떠도는 말을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다. 그것은 뒷골목에 지향없이 드나드는 바람같은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지향이 없어도 그 날 하루의 일기, 그 철 전체의 천후와 상관없을 수 있을까? 작게 볼 때 없는 소리일 수 있지만 크게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볼 때 불 아니땐 굴뚝의 연기란 절대 없다. 이날까지 민간 사회 활동에 “자의”란 터 럭 만큼도 허락 아니 했던 그들이 이것만을, 가장 크고 중대한, 모든 정치활동 정치단체의 존재 이유와 운명을 결정할 이것만을 민중에게 맡긴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말 그렇다면 그들과 이날까지 아무 관련이 없고 이 후에도 없을 나라도 북악을 향해 아 홉 번 손을 쳐들 것이다. 하지만 어려울 것이다. 제 지은 죄의 값을 어떻게 아니 받겠는가?업인 것을 어떻게 하겠나? 역사의 타성을 어떻게 막겠는가? 나는 이 말을 감정풀이로 하는 것 아니라 그들이 진정으로, 개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다.
“불속의 밤알을 집어내게 한다”는 말이 있다. 꾀 있는 놈이 군밤은 먹고 싶지만 손을 데기는 싫으니까 순진한 놈에게 그것을 하게하고는 밤알이 불 밖에 나와 떨어지자 마자 주어낸 놈은 덴 손끝을 불어 식힐 겨를도 없이 가로챈다는 말이다. 정치가를 두고 한 말이다. 대국 소국 문명 야만을 말할 것 없이 정치란 본래 그런 것이다. 순진한 씨알을 시켜 목숨을 바치며 농사, 장사, 공업 전쟁을 하게하고는 그 결과를 가로채어 고루거각(高樓巨閣)에서 잘 살아 보자는 것이 정치가의 심산이다. 다른 데는 몰라도 적어도 해방 후 이날까지의 우리나라의 정치가는 그렇다. 아닌 사람이 하나라도 있거든 국민 앞에 나서 증언해 주시기를 바란다.
통일 운동을 첨에는 인도적인 것으로 하다가 나중에 정치적으로 한단 말은 이러한 불 속의 밤알 철학에서 나온 말이나 아닐까? 남의 말을 너무 악의로 해석하는 것 같지만 우리 씨알들을 위해 만일이라도 걱정하는 마음에서 하는 소리다. 순진한 것은 좋지만 어리석은 것은 덕이 아니다. 우리는 정치에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를 감독하고 가르쳐야 한다. 정치가야말로 민중을 위해 불 속의 밤알을 집어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날까지 그렇게 한 일이 있나? 있다면, 한 톨이라도 던져 준 것이 있다면, 저 양같은 백성들이 왜 농촌의 집은 텅텅 비워 내던지고 도시로만 오느냐? 도시의 공기 일광이 좋아서 오느냐? 거기 찌꺼기가 많으니 그것이라도 주어 먹으려 오는 것 아닌가? 찌꺼기가 왜 거기만 많으냐? 거기 양반들이 살기 때문이지 양반이 누구냐? 남의 것 잘 뺏아 먹는 놈들이지. 그래서 나는 이것을 불 속의 밤알 철학에서 나온 것으로 단정하고 싶다.
정부는, 만일 내 추측이 억측이라면, 성의 있는 사실로 증명하면 된다. 나는 다만 순진한 씨 알이 속지 않기만 바란다. 마지막에 엉뚱한 놈이 먹을 눈치가 되거든 절대로 해서는 아니된다. 밤알 같으면 나는 비록 속아 손만 데고 먹지 못해도, 누구라도 먹는 사람이 있으면 좋지만, 나라는 그래서는 아니된다. 어느 놈이 먹어 치워서는 아니된다. 내가 멍청이가 돼서 목숨을 버려가며 통일 운동을 하다가 야심적인 정치가의 목적만 이루어 준다면, (그런 일이 성립 될 수도 없지만 만일 된다면) 그 결과는 일한 내가 남한 북한의 민중을 야심가의 입에 고소한 밤알로 넣어준 셈이 된다. 그러니 그 일을 어찌 할 수 있겠나? 죽어도 해서는 아니된다.
정치 문제 아니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통일은 결코 남북이 한 정권 밑에 들어가는 일이 아니다. 민족이 살림과 문화의 모든 부문을 통해 하나 되는 일이다. 알기 쉽게, 우리의 자주하는 정권을 못가 진 일본제국의 압박 밑에서도 우리는 하나일 수 있었다. 그것은 일본 정부가 만들어 준 것이 아니었다. 나라를 사랑하는 민중이 제 자리에서 각각 도둑해 들어온 정권과 싸워가는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지독한 불행 중에서도 보람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었다.
오늘날은 그와 정반대다. 독립은 얻었다는데 나라는 더 어지럽다. 그 근본 원인이 원가? 남북으로 된 분열이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 사람이 그 상처가 낫기까지는 일을 할 수도 학문을 할 수도 사회활동을 할 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분열의 책임이 뉘게 있나? 정치가에 있다. 엄정하게 말해서 국내 국외의 정치가의 합작이지만 외국 정치와 정치가는 우 리 힘의 테두리 밖에 속하니 말할 필요가 없고 우리가 상대할 것은 국내의 정치가들이다. 그들이 잘했더라면 분열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럼 그들의 근본 잘못이 무엇인가? 나라를 잊고 정권 얻기에만 급급했던 일이다. 그들은 정치만 치우쳐 중히 여기는 그릇된 생각에 민족의 통일을 희생하면서까지 정부 세우기를 서둘렀다. 그리고 보면 전체를 무시한 정부가 참 정부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하나의 사사 권력 단체다. 남북이 마찬가지다. 그들은 마치 솔로몬의 재판의 가짜 어미와 같다. 솔로몬의 경우는 가짜 어미가 하나였기 때문에 아기는 살 수 있었지만 우리게서는 두 놈이 다 가짜였으니 절반이라도 갈라 달라는 틈에서 아이는 두 조각으로 나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 일은 이 두 조각 난 아이를 다시 살려내는 데 있다. 그러려면 먼저 필요한 것이 솔로몬이다. 누가 이 지혜의 임금이 될 수 있을까? 이 민족 자체 밖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명 판결이 결코 재주에서 나온것 아니라. 그 어버이 마음이다. 아기를 살리자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순간 그 직감을 얻었다. 그럼 누가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 살려내잔 생 각을 할까? 남과 북에 악독한 정치 밑에 흩어져 있기는 해도 그 속 바탈에서 다름이 없는 이 씨알들만이 그 마음을 발동시킬 수 있다. 그러면 직감적으로 계시를 받아 이 두 가짜 어미 속에서 아기를 구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통일문제는 결코 정치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그렇다. 소경이 아닌 이상 이것이 정치 문제인 것을 왜 모르겠나? 그러나 정책 정략으로 다루어서는 해결을 못한다.
첫째, 일어날 때는 정치 관계로 일이 났으나 이제는 이미 전반적인 민족의 생리문제로 됐다. 상처날 때는 피부에 났지만 독균이 전신에 퍼진 다음에는 피부과에서는 못고친다. 정부는 썩 잘해야 피부과 밖에 못된다. 꿰매다가 실패했으면 너는 물러서라! 독소를 스스로 제거하는 생명의 속 힘이 이제 발동해야 한다. 국민적인 결심을 먼저 말함은 이 때문이다.
둘째, 남북의 두정권이 다 믿을 수 없다. 통일은 결코 터졌던 것을 꿰매는 일이 아니다. 두 정권이 다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통일의 첫 단계다.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이미 있는 정권이 어느 시간까지 계속 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의 정신은 고쳐야 한다. 미.소 두세력의 싸움으로 인해 생긴 이 비극이라면 우리는 통일이 돼도 그 중 어느 하나 따위 식의 정부를 원할 수는 없다. 부활은 죽었던 것이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생명으로 남이다. 우리는 우리 몸을 둘로 가르던 날 도둑놈을 배울 수가 없다. 두려움 없이 하는 말로, 오늘 우리의 두 정권은 다 그들의 제자다. 그러므로 그것을 잘라내야 할 죽은 살이다. 그것이 있는 한 합창(合瘡)은 아니된다. 수술의 첫 조건이 소독이다. 새 한국을 위한 역사적 합창수술에서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독소는 국가 지상주의다. 그 자본주의 형이 있고. 공산주의 형이 있으나 민중을 썩히는 독에서는 마찬가지다. 오늘보다 보다 높은 형의 정부를 세우지 못하겠거든 차라리 통일 소리 말라.
셋째, 혁명은 민중 전체가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혁명이다. 전에 없던 혁명이다. 이렇게 해서만 우리 부끄럼을 씻고 우리 눈물을 닦을 수 있다. 모든 것을 다 두고 갈라졌던 물이 합하듯 살짝 합했으면, 그렇게 바라는 것이 잘못이다. 생각해 보라, 통일이 되는 날, 이 정부 관리들을 어떻게 할터인가? 이 국회의원, 이 군대, 이 사업가들을 어떻게 할 터인가? 이남 것들 밑에 이북 것을 두겠나? 이북 것들 밑에 이남 것들을 두겠나? 정치인 관리 직업군인은 폭력 권력의 숭배자들인데 주먹과 주먹, 칼과 칼이 만나서 가만있는 법이 어디 있던가? 통일이라 할 때 거기는 일체의 권력 폭력 금력 학력의 기성 구조를 다 백지에 돌리고 사회를 고쳐 편성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그렇지 않고는 정복이지 통일이 아니다. 그럼 그럴 때에 그 모든 안배 제정을 누가하나? 참 의미의 혁명밖에 길이 없다. 혁명을 하면 새 정치 체제가 나오겠지만 그 혁명은 민중 전체가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하면 아무래도 기성 불순한 세력이 침입한다.
일이 이렇게 어렵다. 어렵지만 민중 전체가 동원되기만 하면 될 수 있다. 그리고 전체의 동원은 하나의 시(詩)다. 시보다도 믿음이다. 한 순간에 될 수 있다. 그것은 이론을 초월한 영감이다. 정치의 연극으로 이 영감을 막지 마라!
이데올로기의 극복
정치문제 아니라면 그럼 무슨 문제인가? 이미 위에서 한 말에서 암시되어 있는 것이지만 우리 이해를 서로 깊게 하기 위하여 좀 더 분명히 꼬집을 필요가 있다. 문제는 언제나 복잡한 구조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중심을 꼬집지 않으면, 알면서도 모를 듯 모르면서도 알듯, 헛수고를 하는 일이 많다.
그것을 시대의 의미라는 말로 표시 할 수 있다. 역사는 하나의 의미를 가지는 진행이면서도 또 많은 시대의 마디로 되어 있어 그 마디마디가 다 저대로 완결된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전체의 미완성적인 의미를 생각지 않고 각 시대를 이해할 수 없고, 또 각 시대의 완결된 의미를 이해함이 없이 그 전체의 의미에 이를 수도 없다. 비해 말하면 마치 금고리를 이어 목거리를 만드는 것과 같다. 각 고리는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하나다. 다만 한 점에서 서로 맞닿지만 그 한 점이 중요하다. 그 한 점이 어디냐? 고리의 끝과 끝이 맞닿는 점이다. 은장이는 그 첫고리를 만들 때 벌써 전체의 목거리를 생각하고 그 한고리의 길이를 자르고 그 두 끝을 단단히 부쳐야 하며, 그 둘째 고리를 만들 때는 그 한끝을 첫고리 속에 꿰어서 두 끝을 붙여야 한다. 한 시대의 완결을 지으려 할 때 역사가는 그것이 전 시대와 어떻게 산 관련을 가지나 분명히 이해해야 하며, 한 시대를 새로 출발하려 할 때 그 한 끝이 분명이 전 시대의 복판을 꿰뚫고 나오나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 떨어지면서 도 하나가 되는 그 묘한 한 점이 어디냐 하면 그 고리를 맞붙이는 바로 그 한 점에 있다. 어느 한 시대가 완결된 의미의 고리를 이루지 못해도 전체 역사는 하나님의 목거리가 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통일 문제를 해결한다 할 때는 그 안에 우리를 분별 속에 떨어친 전세대를 완전히 파악하고 거기 대해 하나의 새 시대를 새로운 의미 관련으로 출발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그럼 그 전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며칠 전 양호민 선생이 조선일보에 “달라지는 세계”라는 글을 쓰면서 그 안에서 이 앞으로 강대국들이 평화기구를 만든다 해도 그 이데올로기에서 타협은 아니 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 바로 그점이다. 그것은 누구나 동의 아니 할 수 없는 사실인데 그럼 그것은 어째 그러며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평화기구를 세우는 것은 그 글이 지적하는 것같이 현실의 절실한 요청에서 나온다. 핵무기의 무서운 발달로 전쟁이 이 앞으로 일어나기만 하면 내편, 네편, 이긴 놈, 진 놈의 구별 없이 다 멸망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기 때문에 전쟁이 또 일어나서는 아니된다. 그것을 피차에 서로 다 알고 있다. 그 의미에서 평화는 현실의 요청이다. 그러나 그런 줄 알면서도 자유진영 측이나 공산진영 측이나 그 이데올로기를 한치라도 양보하 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있는 한 원수는 여전히 원수다. 원수 사이면서 평화라니 그것은 모순이다. 모순이지만 사실이다. 왜 강대국들은 모순인 줄 알면서도 그 이데올로기를 버리려 하지 않나?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것도 적어도 전면 전쟁보다 못지 않은 무게를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현대 강국의 생명이다. 이래도 망하고 저 래도 망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무거운 두 쇠뭉치를 두 팔에 갈라 쥐고 벌을 서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가려는 시대는 이데올로기의 시대란 말이다.
그럼 이제 우리가 알 것은, 우리를 산 채로 허리를 자른 것은 미국 소련이 아니라 대립하는 두 이데올로기다 이제 또 다른 두 세력이 나타나 서로 다시 찢으려 하지만 그것도 중ㆍ일이 아니라 역시 그 이데올로기의 장난이다. 이 의미에서 무력 통일은 잠꼬대다. 실리외교로 문제를 해결하잤다는 것도 망발이다. 윽물리는 세력균형의 살어름 판에서 교묘하게 재주를 타자는 생각도 제 재주에 죽는 잔나비의 옅은 꾀에 지나지 않는다. 시대는 스핑크스같이 제 물음에 바른 대답을 하지 못하는 놈은 사정없이 잡아먹는다. 그러나 반대로 그 대답을 듣기만 하면 아주 맥없이 망각의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우리 대답은 정치에도 경제에도 군사에도 있지 않고, 대립하는 이데올로기의 극복에 있다. 어렵다면 참 어렵고 쉽다면 총 하나, 돈 한푼, 손 하나 대지 않고 되는 쉬운 대답.
사회의 재편성
그것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간단하게 인류역사의 자라 온 과정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의 생활에 가장 밑바닥이 되는 것은 사회 관련이다. 간단 복잡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 생활은 첨부터 사회적이었다. 이 소위 문명인이란 것은 이 사회 관련 속에서 나왔다. 그것은 생명의 깊고도 절대적인 의지에서 나온다. 그것은 자꾸 변한다. 변하지만 허트루 마트루 변하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방향이 있다. 있는지 없는지 아무도 잘라 말할 자격은 없지만, 적어도 지금의 인간으로 말한다면, 정신화의 자람이라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람이기 때문에 거기는 단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첨에는 본능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던 산만한 사회에 생각하는 힘의 자람을 따라, 차차 의식적인 계획적이요, 조직적인 것으로 되어갔다. 그것을 나라라고 한다. 그 나라는 정신의 발달하는 것을 따라 시대로 구분할 수가 있다. 혹은 나라 살림의 발달이 늘 시대 정신으로 반영된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부족시대, 봉건시대, 민족시대, 제국주의시대 하는 말들은 다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들 각 시대에는 그것을 성립시키는 결정적인 요소가 있다. 부족시대에는 땅의 생산력, 봉건시대에는 계급, 민족시대에는 피, 그리고 제국주의시대에는 위의 셋을 종합 집대성한 것이다. 땅이나, 계급이나 피는 서로 이름은 다르지만 자연의 힘인데서 서로 하나다. 따지고 들면 그것은 다 자연력의 숭배를 토대로 하고 사는 나라들이다. 제국주의에 가면 그 자연력의 숭배가 극점에까지 이르렀다. 시대가 변하는 것은 사람의 살림과 사회제도 사이에 맞지 않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라는데 제도는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대가 변한다는 것은 인간사회를 고쳐 편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쳐 편성할 때마다 그 법위가 넓어지고 그 힘이 더 포괄적이 되어간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제국주의에 이르러서는 그 자연력 숭배의 역사철학은 그 갈 수 있는 한계까지를 다 갔으므로 막다른 골목에 들게 되었다. 이제 인간의 근본적인 새 편성이 다급하게 필요해 졌다. 인간을 고쳐 해석해야 한다. 이래서 나온 것이 이데올로기 국가다.
사람의 살림이 간단해서 완전히 땅에 붙어 있던 부족사회에서는 땅이면 그만이었다. 한 골짜기에 사는 사람이 곧 “우리”였다. 그러나 살림이 좀 복잡해져서 부족 사이에 교통이 찾아
지면 그 “우리”는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생긴 방법이 계급제도 였다. 그때는 그 계 급제도의 상징인 임금이 전부였다. 그러나 인문의 발달이 나가고보면 “우리”의 범위는 더 커져서 계급제도로만 묶어갈 수는 없었다. 그리해서 핏줄에 달려 말과 생활방식과 풍속을 같이하는 한 민족에 까지 나가게 되었다. 각 민족은 서로 자기 세력을 넓히기 위하여 부국강병 약육강식을 표어로 제국주의에까지 내밀었다. 그러는 동안에 두 가지 문제가 일어나서 제국주의를 서 나갈 수없이 만들었다. 하나는 밖으로 세력을 넓혀 많은 부가 나라 안으로 흘러듬을 따라 여러가지 사회문제가 일어나서 옛날에 피에 호소해서 됐던 국민 단결을 약하게 만든 것이요, 또 하나는 과학과 큰 공업이 발달함을 따라 다른 민족과의 접촉이 잦아지고 사람의 살림이 자연적인 것보다 인위적인 요소가 점점 더 늘어감에 따라 “우리”라는 감정은 땅이나 피같은 자연적인 조건에만 붙어있을 수 없이 된 일이다. 사람들은 핏줄보다 인생이나 역사나 사회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지는 사람에게 더 동류의식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여러 가지 사상 곧 이데올로기다.
20세기 문명의 가장 큰 죄악은 한국, 월남, 독일에서 보는 것같이 한 민족을 인위적으로 둘로 나눈 일인데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하면 이 이데올로기의 싸움에 있다. 강대국들은 밖으로는 튼튼한 듯하나 안으로는 이 이데올로기의 대립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제 문명인은 전적으로 자연적인 조건에 따라 반응하는 정도를 지나 복잡한 정신적 구조 속에 살게 됐으므로 한 정치 주권이나 피에 충성하는 것으로는 보람을 느낄 수 없이 됐다. 그래서 내 나라라는 안에도 내편이 있고 대적이 있으며 남의 나라 안에도 대적만 아니라 내편 이 있다. 그러고 보면 나라를 해 가기는 참 어렵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소위 강대국이라는 나라의 지배자들은 자기네의 권력구조를 유지해 나가기 위하여 문제를 밖으로 내밀어 국민의 관심을 그리 돌리기도 했다. 그것이 소위 약소국의 분단 또는 지역적인 정쟁이라는 것이다. 마치 자기네가 편안히 즐겁게 살기 위하여 먹고 남는 찌꺼기와 가난한 사람들을 이슥한 곳으로 내모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주 악랄한 수단이지만, 국가란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본위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우리의 민족 분열의 뒷면에는 이러한 인류적인 죄악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쟁이나, 정치로만은 해결이 아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세계적인 문제요, 도덕 종교 철학에 관계되는 깊은 정신적인 문제다. 인류의 운명에 직결되는 문제다. 이 문제가 나오기를 현대 국가주의의 모순에서 나온 것이요, 생각하는 인간의 정신적 갈등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빙산의 끄트머리같은 38선을 바라보고 아무리 방안을 연구해도 소용이 없다. 우선 사상의 대립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요, 결국에서 그것과 같은 말이지만 국가관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후진국의식에 붙잡혀 있지 말고 스스 로 강한 자의 자리에 서서 분명의 방향전환을 생각해야 된다고 늘 주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새 말씀의 대망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이 “지나(支那) 사백주”를 짓밟는 것을 보고 있을 때부터 오늘까지 나는 “새 말씀”의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나”라고 하면 교만한 것 같아 미안하지만 교 만해서가 아니라 남이 어찌는지는 모르기 때문에 내 느낌을 말할 뿐이라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나 책을 많이 보거나 토론을 널리 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까닭을 물으면 대답할 수 없이 그저 막연히 그렇게 느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전체 씨알의 저도 모르게 품는 생각이라고 믿는다.
왜 그런지 세계는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으로만 생각됐고 두 사상의 진영이 세계적으로 편이 갈려 대립하는 것을 보고도 그것은 지고 어김이 없이 끝날 것으로만 느껴졌다. 자유주의가 공산주의 몰아낼 것도 아니요, 공산주의가 자유주의를 박멸할 것도 아니요 둘이 서로 싸움이 되지 않는 자리에 가잔 것이 현대가 받은 명령이라고 생각해 왔다. 나더러 그 근거를 설명하라 해도 소용없다. 논(論)이 아니라 신념이다 지금도 그렇다. 그뿐 아니라 지금은 세상 형편이 내 생각을 뒷바침해 주는 것같이 뵈기까지 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남북 문제에 있어서도 남이 북을 정복하기나 북이 남을 정복해서 문제의 끝이 날껏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될 리도 없고, 될리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 해 도 못쓴다고 생각한다. 싸웠던 일이 새로 우습게 뵈리만큼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한다. 요새 돌아가는 시국은 점점 더 그 신념을 강하게 한다. 그러기 때문에 첨부터 북괴니 남괴니 서로 욕하고 반공이라 해서 반감, 적개심을 불어넣는 것을 반대했다. 실력도 없는 명분 따지는 모양 보기 싫었다. 그런 것이 다 우리 당한 문제가 어디서 오는지를 모르는 데서 오는 것이다. 우리가 싸울 까닭이 아무것도 없는데 다만 우리를 문명의 쓰레기통으로 대접했기 때문에 난 두 조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얼싸안고 울지언정 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6.25는 어찌 됐겠냐 할지 모르지만 터진 전쟁은 이미 지난 날 지은 죄가 원인이 돼서 온 것이니 노상 이상론으로 해결 아니 되는 것은 알지만 그 때라도 위에 말한 그 정신으로 대했다면 그 참혹을 퍽 덜 수 있었을 것이요, 오늘까지 이러고는 있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냐? 세계는 아무리 어지러워도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의로운 마음이 곳곳에 있다. 그러므로 덕불고(德不孤)라, 우리가 정말 민족적으로 일명(一命)을 각오하고 세계사적인 사명과 同 포애를 살리려 노력했다면 반드시 많은 응원이 왔을 것이다. 우리 처지는 독일, 인도, 월남과도 다르다 내적 원인이 아무것도 없고 분열이 첨에 밖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야심과 민중의 대세 내다보지 못한 것만이 죄였다.
생각을 하면 강해질 수 있다. 역사의 앞날이 우리를 위해 유망하기 때문이다. 이 앞은 민족주의 시대도 아니요, 이데올로기 시대도 아니다. 민족주의는 피에 잡힌 생각이요, 사상전은 개인주의에 잡힌 생각이다. 인류는 이제 잘만하면 전에 백만년 천만 년을 단위로 하는 느린 변천의 자연 과정으로만 되던 진화를 계획적으로 도와 갈수 있는 단계에 왔다. 다만 지난날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못하고 있다. 생각해 보라 소위 국경이라는 이성에 이그러지는 인위적인 잘못 때문에 인간의 에너지와 물자와 시간이 얼마나 쓸데없이 소모 되고 있나? 미 소가 전쟁에 허비했던 돈을 약소국의 발전을 위해 썼더라면 세계가 얼마나 달라졌겠나? 그리고 그 전쟁에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이제 인류의 앞날을 위해 단 하나의 길이 있을 뿐이다.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일. 링컨이 자라나는 미국의 시련에서 했던 말을 인류 전체에 한 번 적용해보자 “연합해라, 우리는 살았다. 갈라져라, 우리는 망했다!”
삐에르 샤르뎅은 그의 유명한 “인류현상”에서 히틀러, 무솔리니가 전체주의를 부르짖었던 것은 이제 오려는 시대가 전체의 시대기 때문이란 말을 했다. 참 계시적인 말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실패한 것은 그것을 폭력으로 하려했기 때문이요, 이것은 사랑으로만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주체는 개인이란 생각에 머물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싸움은 그 결과다. 생각은 본래 다양한 것이다. 백화난만으로 여러 가지 사상이 자유롭게 나오는 데 진보가 있고 발달이 있다. 사상적 일색이란 죽음이다. 그런데 생각이 여러 가지기 때문에 싸우고 어지럽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오늘 인류의 맡은 과제다. 어떻게 할까? 샤르뎅 의 말대로 사랑에 의해서다. 부동동지지위대(不同同之之謂大)라 이제 인간은 싸우는 소년시 절을 지나 대인, 성장한 사람의 지경에 들려하는 때에 왔다.
프랑스 혁명의 표어가 자유, 평등, 박애, 아니었나? 미국은 그 자유를 써먹고 자유진영의 대장이 됐고, 소련은 평등을 팔아가지고 공산진영의 우두머리가 됐다. 그리하여 자유와 평등이 싸운다. 자유 없는 평등 없고, 평등 없는 자유 없건만 그것이 국가라는 집단주의, 다시 말해서 이기주의의 종이 되면 그런 모순이 생겼다. 이제 하나 남은 사랑을 누가 써서 자유 와 평등을 다 살려 이 자멸에 임한 인류를 건질까? 사랑은 큰 놈, 강한 놈, 있는 놈, 아는 놈은 못하지.
세계의 행길에 앉는 수난의 여왕, 그 부끄러운 역사의 안 면(面)은 무엇일까? 사랑의 주림. 그럼 너는 사랑을 못한단 말이냐? 네 몸을 돌이키기만 해라. 하나의 세계의 새날이 온다 네 이름이 한 아니냐?
새 말씀이어 오소서 !
씨알의소리 1971.9월 4호
저작집30; 없음
전집20; 17-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