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에(Hue)
후에는 ‘평화의 도시’라는 뜻의 딴 호아(Than Hoa)로 불렸으며,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1802~1945)의 수도가 된 이후부터 현재의 지명이 되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의 최대 격전지가 되어 왕도 대부분이 황폐해졌다. 1990년대 들어 지방 정부가 후에의 가치를 자각하기 시작해 관광지로 개발하기 시작했으며,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1687년 후에에서 5km 북동쪽에 있는 바오 빈(Bao Vinh) 마을에 도시의 성곽이 건설된 이후 1744년 응우옌 씨(阮氏)를 가문으로 하는 남베트남의 수도가 되었다. 1802년 프랑스의 도움으로 응우옌 왕조를 건국한 쟈롱 황제가 후에를 수도로 정하였다. 1885년 프랑스는 통킹 지역에 대한 종주권을 왕실로부터 거부당하자 후에를 포위했다. 프랑스 측 자료에 따르면 3일간 지속된 후에 공격에서 왕궁 장서각을 파괴했고, 고가의 귀중품을 훔쳤다고 한다. 또한,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이 차례로 후에를 탈환하면서 무고한 국민들이 살해되는 살육의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후에는 베트남에서 유일하게 유적지 관광이 가능한 도시이며 입장료가 가장 많이 들어가기도 한다. 후에는 흐엉 강(Song Huon)을 사이에 두고 북쪽의 구시가지와 남쪽의 신시가지로 나뉘며 짱띠엔 다리와 푸쑤언 다리가 양쪽을 잇는다.
구시가지에는 왕궁 등 응우옌 왕조의 유적지가 있고 동 바 시장이 있다. 신시가지에는 호텔, 레스토랑, 토산품점, 여행사가 밀집되어 있다. 흐엉 강을 따라 남쪽으로는 역대 황제들의 무덤이 있다.
▼ 다낭에서 후에로 가는 길 옆 휴게소
다낭에서 후에까지는 약 2시간 30분이 소요되며 하이만 고개를 넘는다. 그 고개에는 터널이 있는데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터널이라고 현지인들은 자랑을 한다. 특이한 점은 오토바이는 그 터널을 통과할 수 없고 오토바이 터미널이 터널 양쪽에 있어 오토바이는 택배식으로 트럭으로 옮기고 사람들은 셔틀버스로 터널을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터널 내 공기 오염방지 때문이란다.
▼ 후에 시가지의 모습
◈ 응후옌 왕궁
응우옌 왕조의 황제는 성안에서 머물렀는데 이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공간이었다.
이 성 안쪽의 왕궁은 금지된 도시였고, 오직 황제들과 첩들 그리고 측근들만이 접근할 수 있었다.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사형을 당하였다고 한다. 후에의 역사 관광지로서 유지하기 위하여 재건축의 노력이 진행되고 있으나 오늘날 금지된 영역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1802년부터 1945년까지 13대에 걸쳐 이어진 응우옌 왕조의 왕궁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요새이자 궁전이다. 이곳의 뜰은 가로 세로 각각 2킬로미터,높이 5미터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성벽은 다시,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해자에 담을 물은 후에를 관통하여 흐르는 흐엉강에서 끌어왔다. 이러한 구조물을 시터들(citadel)이라고 한다. 시터들 안에는 거의 2.5킬로미터의 방어선을 구축한 왕궁이 있었다. 대개의 관광객이 입장하는 왕궁의 정문인 남문 누각에 오르면 왕궁 전체가 한눈에 보인다.
남문 정면에 중국의 자금성을 본떠 지은 디엔타이호아( Điện Thái Hoà/ 太和殿 태화전)-경복궁 근정전 같은 곳-가 있으며 디엔타이호아의 왼쪽에 각 왕의 위패가 모셔진 사원인 현임각이 있다. 그 외에도 왕궁 안에는 왕족의 저택과 사원들, 황제를 위한 인클로져(enclosure)인 자금성(베트남어: Tử Cấm thành/ 紫禁城 뚜깜탄, the Purple Forbidden City)이 있다.
그 명칭은 중국의 자금성을 본 딴 것이다. 이름만을 본딴 것이 아니어서, 자금성에는 수많은 궁전과 문, 궁정들이 있었다. 자금성은 응우옌 왕조의 황족들을 위한 곳이었다. 현지 가이드만이 해설을 하도록 되어 있어 현지인 “영미”라는 어여쁜 아가씨가 해설을 해주는데 구수한 멘트의 해설은 관광객들의 이쁨을 독차지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