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안산자락길」 을 걸었다.
'안산자락길' 하면 경기도 안산에 있는 어떤 둘레길인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곳이 아니다. 서울 서대문구에 있으며, 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를 나오면 서대문형무소가 보이고 그 뒷편에 있는 산이 안산(안산은 동봉과 서봉의 두 봉우리로 이루어져 산의 모양이 마치 말의 안장, 즉 길마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안산이라고 한다.)이며, 안산에 조성해 놓은 둘레길 이름이 「안산자락길」 이다. 안산자락길은 '아름다운 서울단풍길'에도 선정된 바 있는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길이며, 봄에는 개나리와 아카시아꽃이 유명하다. 보다 특징적인 것은 '안선 순환형 무장애 자락길'이다. 어린이, 노인, 장애인, 임산부 등 보행약자도 산림욕을 즐기며 산책할 수 있게 조성한 숲길이며,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유모차나 휠체어로도 이동할 수 있도록 데크 위주로 평탄하게 잘 정비되어 있다. 전체 길이는 약 7km로 안산을 한바퀴 오롯이 둘러볼 수 있는 코스로, 소요시간은 약 2시간 30분 전후가 소요된다.
투어 코스는 독립문역 5번 출구로 나와 서대문형무소를 기준하여 건물 우측편으로 가면 → 한성과학고 → 독립문파크빌아파트 부근에 가면 입구를 찾을 수 있다. 다른 방법은 좌측편으로 가면 → 독립관 → 서대문구립 이진아기념도서관옆으로 올라가면 입구를 찾을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좌, 우 방향 한바퀴 산책 후 원점 회귀가 가능하다. 그 외 서대문구청, 연세대, 무악재 방향 등에서도 진입이 가능하지만, 처음 가는 경우라면 독립문역에서 출발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므로 그 쪽 코스를 추천한다.
독립문역 5번출구를 나오면 부근에 '서대문독립공원'이 있고 그 뒤로 서대문형무소가 있다. 서대문독립공원에는 독립문, 독립관, 서재필동상, 유관순동상 등이 있는데 안산자락길을 둘러 본 다음 마무리코스로 탐방하고자 한다.
서대문형무소와 인왕산 정상
서대문형무소는 1908.10월에 문을 열어 1987.11월에 폐쇄될 때까지 80년동안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옥사는 붉은 벽돌로 지어졌고, 수감자를 효과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원형 감옥 형태인 파놉티콘 구조로 만들어졌다. 1987.11월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한 뒤 역사성과 보존 가치를 고려하여 보안과 청사, 제9~12옥사, 공작사, 한센병사, 사형장 등을 남겨두고 나머지 시설은 모두 철거되었다. 사진 앞쪽 좌측에 높은 담장으로 둘러쳐진 낮은 지붕의 건물이 그 어마무시한 사형장이다. 미루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어미나무는 고목이 되어 쓰러지고 2세 나무가 한 많은 사형장을 말없이 지키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 지배에 맞섰던 수 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갇혔으며, 해방 후에는 독재 정권과 군사 정권에 저항했던 민주화 운동가들이 갇혔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후 서대문구에서 현장을 보존하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1998.11.5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과거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고,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의 자유와 평화를 향한 신념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데크길과 아카시아나무
안산은 아카시아나무 군락지다. 5월 중~하순에 방문하면 온통 아카시아꽃 향연과 향이 진동한다. 교행하는 사람이 없다면 2명이서 담소나누며 걸을 수 있는 폭의 데크길로 되어 있다. 3~4월에 방문하면 노란 개나리꽃이 만발해 있을 것이다. 경사진 곳은 노약자나 유모차, 휠체어 등이 지그재그로 완만하게 오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등산화를 신지 않고, 운동화 정도로 충분하게 걸을 수 있다.
마치 문무석처럼 방문객들을 지켜주고 있다.
메타쉐콰이아 숲
안산자락길의 백미는 메타쉐콰이아와 잣나무 숲이다. 서대문형무소 기준 출발지점의 정반대 쪽에 있으며, 붙어있는(연속된) 구간으로 피톤치드 가득한 싱그러운 향기가 느껴진다. 다른 구간은 몰라도 이 구간 만큼은 꼭 걸어보길 권한다. 여기 쯤이면 전체 구간의 절반을 걸은 것이다.
숲속의 무대(휴식장소 2)
나무 의자와 평상 등이 설치되어 있어 식사와 간식, 차담하며 쉬어가는 장소로 유명하다. 제대로된 힐링 장소다.
메타쉐콰이아 숲 속 휴게장소에서 인증샷
메타쉐콰이아 숲 속 휴식장소를 지나 무악정 방향으로 나아간다. 메타쉐콰이아 숲길의 끝자락이다. 담양의 메타쉐콰이아처럼 수령이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조밀하게 심어져서 보고 느끼기엔 더 좋다. 하지만, 나무들이 더 크면 간벌하며 관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무악정(팔각정 건물)
나뭇잎이 떨어진 초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대부분 숲길로 이루어져 그늘 아래로 산책할 수 있다. 새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 구간이었으며, 이어폰을 빼고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걸어도 좋다. 나뭇잎이 우거진 계절의 시원한 산책길을 상상해 본다.
운무가 낀 서울 시내방향을 바라보며...
안산 정상 동봉(296m)
사진 속 멀리 보이는 정상이 봉수대가 있는 동봉이다. 오늘은 정상을 오르지 않고 자락길을 둘러 왔다. 봉수대는 연기나 불을 피워 변방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과 해당 주민들에게 알리는 중요한 통신수단이었다.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알린다. 따라서 봉수대가 있는 지역은 지세적 정상으로 대부분 360도 전 지역 조망이 가능한 곳이다.
대부분 데크길로 되어 있는데, 일부 구간만 이렇게 흙길로 되어 있다.
전망대에서 바라 본 전면 전경(가까운 곳이 인왕산, 먼 곳이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
전망대에서 왼쪽 방향으로 본 안산 정상부(봉수대가 있는 오른쪽이 동봉, 철탑이 있는 왼쪽이 서봉)
순국선열추념탑
순국선열추념탑은 애국지사들과 항일투사들이 가장 많이 옥고를 치른 조국수난의 현장이었던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하여 우리 산하와 해외 각 처에서 조국 광복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 장렬히 순국하신 선열들의 얼을 되새기며, 원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서울특별시에서 1992.8.15에 건립하였다. 태극기를 음양각한 조각상이 높이 22.3m로 축조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길이 40m로 독립투쟁의 역사적 활동상을 형상화한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독립관
독립관은 조선시대 중국사신들의 영접연과 환송연을 베풀던 영빈관의 하나인 모화관 건물을 1894년(갑오경장)이후 서재필이 발의하고 독립협회에서 주도하여 개수한 후, 독립관으로 개칭하고 이곳에서 애국토론회를 개최하여 자주, 민권, 자강 사상을 고취하는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독립문과 함께 독립사상을 표현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 그 후 서대문독립공원 조성사업 계획에 의거 전문가의 고증 자문에 따라 복원하여 순국선열들의 위패 봉안 및 전시실로 사용하고, 지하층을 만들어 행사 및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1995.12.28~1996.12.31까지 서울특별시에서 건립하였다.
애국열사 유관순 동상
유관순 열사는 1902.12.16(음력 11.17) 충남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에서 태어났다. 1919년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 때 3.1 탑골공원 만세운동과 3.5 대한문 앞에서 망곡을 한 뒤 남대문역(현 서울역) 시위에 참여하였다. 3.10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으로 내려온 유 열사는 학교와 교회, 유림 등을 방문하여 만세운동을 협의하고 4.1 아우내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직접 제작한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시위를 평화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일본 헌병대에 의해 이날 시위 현장에서 유 열사의 부모님을 비롯하여 19명이 피살되고, 30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유 열사는 시위 주동자로 체포되었다. 유 열사는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중 체포 당시 당한 부상과 계속되는 고문으로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20.9.28, 오전 8시 20분에 서대문형무소의 어두운 감방에서 순국했다. 현재 망우리공원에 합장되어 있다.
*** 유관순 열사 어록 ***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참을 수 있사오나, 내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슬픔입니다.(유관순 열사 마지막 유언)
독립문과 송재 서재필 동상
독립문
독립문은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하여,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세웠다. 우리 민족의 자발적인 참여 속에서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가 모금을 주도하고 고종의 승인을 얻어 1897.11.20 완공하였다. 설계는 러시아인 사바틴이, 공사는 조선인 심의석이 하였다. 본래는 현재 위치에서 남동쪽으로 70m 떨어진 길 가운데에 있었는데, 1979년 성산대로를 공사하면서 이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독립문의 '독립'은 '식민 통치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홀로 설 수 있는 주권 국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독립문」 은 주권을 위협하는 열강들 사이에서 주권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세계에 알리려는 모든 국민들의 노력이 담긴 역사적 기념물이라 할 수 있다.
독립문 인근에 영천시장이 있다. 재래시장으로 볼거리, 먹거리가 풍성하기에 함께 투어하기를 강추한다.
(2022.12.11 현재, 가림막을 쳐놓고 재개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공사 후 깨끗하게 단장된 현대화된 재래시장을 보는 것도 괜찮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