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순공주[義順公主]
생애 및 활동사항
아버지는 금림군(錦林君)이개윤(李愷胤)이다. 1650년(효종 1)에 청의 황자(皇子) 구왕(九王)으로부터 조선의 공주를 얻어 결혼하겠다는 요청이 있자, 우리 조정에서는 이개윤의 딸을 뽑아 공주로 봉한 다음 사신 원두표(元斗杓)와 함께 청으로 보냈다. 용모가 아름답지 못한 탓으로 구왕의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의순공주가 청으로 간 다음해에 구왕이 황제의 자리를 엿본다는 혐의를 받아 반역죄로 몰리면서 구왕의 부인들이 여러 왕족과 장수들에게 분배될 때, 의순공주는 구왕의 부하장수에게 넘겨졌다. 그 뒤 아버지인 금림군이 사신이 되어 청으로 들어갔을 때에 딸의 환국을 간청하여 허락을 받아 1656년 함께 돌아왔다. 그 뒤 불운한 만년을 보냈다.
참고문헌
『효종실록(孝宗實錄)』
『현종실록(顯宗實錄)』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의순공주묘역[義順公主墓域]
조선 중기의 왕족이자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의 딸인 의순공주(義順公主, ?~1662)의 묘역으로 금오동(金梧洞) 천보산 기슭에 있다. '족두리묘'로도 불린다. 봉분의 앞에 상석과 향로석 및 1쌍의 문인석이 조성되어 있으며, 의정부문화원에서 세운 묘역의 내력을 소개한 표시판이 있다.
출처:(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의정부시의 민속놀이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천보산(天寶山, 337m)정주당(定州堂)에서 행해지던 ‘정주당놀이’를 들 수 있다.
이 놀이는 유래가 깊은 것으로 약 35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서는 조선의 여인들을 조공으로 바칠 것을 강요해왔고 마침내는 왕족의 처녀들까지도 그 대상에 포함되는 수모를 겪어야 하였다.
그러던 중 당시 금오동에 살고 있던 왕족의 딸이 청나라로 잡혀가다가 평안도 정주땅에 이르렀을 때, 오랑캐에게 욕된 일을 당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는 편이 낫다고 결심하여 가파른 벼랑에서 물로 뛰어내려 자살을 하였다.
이에 수행하던 노복들이 시신이나마 거두려 하였지만 찾지 못하고 족두리만 겨우 건져와서 금오동 선영(先瑩)에 장사를 지냈는데 이곳을 지금도 족두리산소라 부른다. 이 일이 있은 뒤 조정에서는 그녀의 넋을 기리기 위해 큰당·작은당·색시당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
정주당놀이는 이때부터 이 고장의 민속놀이 겸 동제로 전승되어왔는데, 이른 봄 화창한 날을 골라 마을사람들은 비명에 간 왕족여인의 넋을 위안하고 풍년과 무병·재수를 빌며 고사를 지낸 다음 놀이를 벌이면서 하루를 즐겼다.
제수는 백미로 지은 밥과 생미역으로만 끓인 국을 쓴다. 제일이 되면 마을주민들은 아침 일찍 당 앞에 모여 제를 지내고 농기를 앞세워 꽹과리·날라리·북·장구·징 등으로 농악을 연주한다. 마을주민들은 이 농악에 맞추어 함께 춤을 추면서 횃불을 들고 천보산 능선을 여러 차례 왕복한다. 6·25전쟁 이후 한때 이 놀이의 전승이 중단되어 당제만 지내며 마을의 수호신으로만 받들었는데, 1985년부터 민속놀이로 재현되어 주민의 화합과 전통을 다지고 있다.
이 지역은 다른 곳에 비해 특별한 동제는 없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11-19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