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빌립보로 왔다. 그리고 어려운 중에 루디아도 만나고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고친다. 순조롭게 잘 풀리는 것 같은데 뜻밖에 어려움을 당한다. 우리 예측으로는 저항이 있어도 종교적인 이유로 고난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영업 방해라는 이유로 고난을 받는다(19).
우리 인생도 순종하면 다 풀릴 줄 생각하지만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다. 판단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인데 판단을 내가 하겠다는 것이 원죄의 뿌리다. 내 인생에 여러 가지 일이 벌어졌을 때 그것을 판단하려 하는 사람이 제일 피곤한 삶을 산다. 그때 판단을 중지하고 하나님께 맡기고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간수가 깨닫고 나서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할 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냥 믿으라는 게 아니라 네 삶 전체를 다 맡기라는 것이다. 그때 진정한 구원이 있다. 삶의 모든 순간을 내가 판단하며 사는 게 아니라 맡기고 사는 것이다. 바울도 이런 인생을 살았다.
여호수아서에서 땅 분배가 이루어져 각각의 경계가 있다. 땅은 변함이 없는데 인간이 경제적인 실패로 땅을 팔거나 빼앗길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50년 만에 한 번씩 희년을 주셔서 다 돌려놓으라고 하신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상 한 번도 희년이 이루어진 적이 없다. 희년은 예수님의 사역을 이야기한다. 죄로 인해 다 깨지고 무너진 것들이 예수님이 오셔야 회복된다는 것이다(사61:1-2). 회복은 하나님의 힘으로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짐을 믿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회복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래서 온유한 자(아나빔)가 땅을 차지하는 것이다(시37:5,7,11). 모든 일은 기도하고 기다리며 하나님께 맡기는 자가 이루는 것이지 발버둥 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과 실라가 온유하다.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지만, 판단하지 않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기다렸다(25). 판단은 하나님이 하신다. 어릴 때 코끼리 다리를 말뚝에 묶어 놓으면 커서도 말뚝에 묶여 있다. 좋은 의미로 해석하면 어렸을 때 기도와 예배에 묶이면 커서 힘이 생겨도 예배와 기도를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대부분 축복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그 힘을 가지고 예배라는 말뚝을 뽑아 제멋대로 살려고 한다.
고난받을 때 기도하고 즐거울 때 찬송하는 것이 신앙이다(약5:13). 바울은 하나님께 맡기고 찬송과 기도한다. 우리는 이때 아무 일도 안 벌어진다고 생각하지만 기도하고 찬송할 때 하나님이 일하신다. "이때 죄수들이 듣더라" 원문에 보면 열린 마음으로 듣더라는 것. 바울과 실라가 기도와 찬양만 하고 있었는데 주변에서 마음이 열리는 반응들이 있었다.
그리고 지진이 일어나고 옥문이 열리며 발의 착고가 풀렸다.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고 찬송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질병에서 치유되고 진로가 열리며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된다. 이게 온유한 자의 삶이다. 단순함은 복잡함을 이긴다. 하나님을 계산에 넣지 않기 때문에 인생이 자꾸 복잡해진다.
성령의 임재가 있는 예배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만져 주시고 치유해 주시면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계산에 넣지 않으니까 철저하게 콘티를 짜고 계산하고 인위적으로 모든 것을 만들려 한다. 예배가 복잡해지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본질을 놓쳤기 때문이다. 예배는 찬송과 기도로 단순해져야 한다.
인생의 문제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더 이상 걱정할 일이 없다. 이 복잡함은 믿음 없음에 있다.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신다면 걱정할 일이 없다. 주님께 맡겨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다 된다. 우리의 문제들이 풀리건 풀리지 않건 그냥 계속 맡기고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풀어 주신다.
옥문이 열린 것이 나를 위한 것인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나를 넘어서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여 일할 수 있다. 옥문이 열린 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면, 바로 도망쳐야지만 바울은 이 역사하심을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해서 어떻게 써야 할지를 생각한 것이다.
죄수들도 바울처럼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쳤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선택이 간수를 살렸다(28). 옥문을 여는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이 간수의 마음을 여는 것(29,30). 바울이 빌립보에 간 목적은 복음 증거에 있다. 탈옥이 목적이었다면 빌립보에 아예 안 갔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감옥을 사용하셔서 전도의 문을 여신 것이다.
왜 감옥에 집어넣으셨나? 전도의 문을 열려고.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잘 모른다(사55:9). 그러므로 우리가 상상도 못 하는 길로 이끄실 것이다. 주님께 맡기면 홍해 길이 열린다. 주님께 맡기니 간수의 마음을 여신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은 우리의 생각과 너무나 다르다. 우리가 받은 축복을 하나님의 영광과 남을 위해서 사용하면 폭발적인 능력이 나타난다.
내 안에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으면 고민하지 말고 맡겨라. 그러면 하나님이 풀어 주시고, 또 풀렸으면 그 축복을 왜 주셨는지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신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인정받았다는 보장으로 여기지 않고 이 축복이 간수를 위한 것이라고 여기고 풀어 가니까 더 큰 열매를 맺은 것이다.
그래서 온유함으로 일하는 교회가 기쁨이 있다. 교회가 기쁨이 넘치면 가지고 있는 힘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다 맡기고 누굴 위한 복인가 되물으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