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정당 유금희
포덕74년(1933년) 출생
여성회본부 재무부장, 총무
여성회본부 감사
"여성회 활동 고생 됐지만
보람도 커"
천도교 집안으로 시집을 오면서 천도교를 알게 됐어요. 제가 해월신사님 외손주 며느리가 돼요. #최윤 할머니가 해월신사님 따님이거든요. 그 분의 손주 며느리예요. 최윤 할머님이 용담정에 들어가서 거기를 지키셨대요. 기록이 안 남아 있는데, 용케 아시는 분이 신문에 그걸 내셨더라구. 대신사님 계시던 자리에 오막집을 짓고 그 산 속에서 혼자 계셨어. 우리 집 양반( #정문화 )그 때 할머니를 찾아가 뵈었다 그러더라구, 우리 시어머님한테 들었지.
거기서 수도를 하도 많이 하시니까 호랑이하고 같이 지내셨다구 그래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안 보이는데 불을 때시면서 잘 잤니 하면서 투덕투덕 하시는데 그게 호랑이라는 거야. 다른 사람한테는 안 보인대요. 산 속에서 혼자 그렇게 지내신 거야. 언젠가 대신사님 묘소하고 #상제교 하고 싸움이 나고 그랬는데 천도교 게 아니라고 난리가 났는데 .
천도교로 넘어왔어요. 그렇게 지키고 계셨으니까 남아 있다고 신문에 그러더라구.
결혼을 포덕 96년(1955년)에 했는데, 처음에는 천도교도 잘 모르고 그저 시어른 하시는 대로만 따라했어요.
시아버님 ( #정순철 )이 교회 일을 많이 하셨대요. #방정환 씨하고 일을 많이 하셨다 그래요. 시아버님은 애기만 낳아놨지, 집안 일에는 신경을 안 쓰신 거지. 어머니가 공장에도 다니시고 장사도 하시면서, 남편이 일본에 가서 일하시는데 자금을 오히려 대드렸다는 거야.
그런 처지니 우리 집 양반이 동생들 다 맡아 갖고 해마다 동생들 결혼시 켜야지, 대학까지 공부시켜야지, 그러느라고 힘들었지. 그래서 내가 시동생을 자식같이 여기고 결혼 다 시키고 이랬어요. 결혼해서 삼청동에 살았거든. 그런데도 교회를 잘 안 나왔어 요. 기념일 교인 노릇만 한 거예요.
우리 집 양반이 은행에 다녓셨는데 밤중까지 일을 하고 시일에는 쉬느라고 못 나오셔. 그렇게 기념일 교인 노릇만 하다가 시동생들 다 출가시키니까, 시어머님이 중풍을 맞으셔서 11년 간을 고생을 하셨어. 그러다가 시어머니 돌아가신 다음부터 열심히 나오기 시작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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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초련 회장님 연임하실 때 재무부장을 맡았어요 김경렬 전 회장님 때는 총무를 맡아 가지고 6년 간을 했어요 박공주 회장님 당시에는 박씨 사모님 유적지 답사하면서 #표영삼 상주선도사님을 모시고 발표까지 했어요. 박씨 사모님 고생하던 곳을 찾아다니면서 보니 집은 다 없어졌드라고.
삼암장님이 미리 답사를 하고 우리가 갔는데, 삼암장님 사모님이 나랑 나이 가 같애요. 그래서 그냥 그 높은 산을 넘는데 유금희 사모님 생각해서 좀 쉬었다 갑시다 하신다구. 당신 사모님이 나랑 동갑 이니까 힘든다는 걸 아시고 그런 거지요.
그 때 김응조 선생님, 홍장화 씨, 이순종 씨, 고윤지 씨하고 나하고 임순화 씨하고 갔는데, 하두 산이 험하고 하니까 김응조 선생님이 "아유, 내가 삼일 동안 영감 해 줘야 되겠네." 하고 손을 잡아줘서 산을 올라가게 하고, 너무 못 올라가니까. 세 차례에 걸쳐서 답사를 했 어요. 정선에도 갔는데 거긴 탄광인지 산에 올라가니까 계곡물도 시커멍드라구요. 거기서 그렇게 고생을 하셨다는 거예요.
김경렬 회장님 때 복호동에다가 내칙 내수도문 비를 세웠잖 아요. 그걸 여성들이 모금을 해서 했거든요. 그 때 애로가 많았 었지요. 그 동네 가서 자리를 잡으려니까 안 된다고 트는 거야. 아직껏 기독교도 안 들어오고 아무것도 안 들어왔는데 이상한 종교가 들어오는가 해서 틀어요. 어찌어찌 장소를 마련해 놓으면 그 다음날 안 된다고 전화가 오고.
그래서 지금 그 비 세운 자리가 여섯 번째 자리예요.
거의 매일 아침 6시에 회장님하고 만나서 가다시피 하면서도 돈이 없으니까 빵 두 개 사서 하나씩 먹고. 그게 점심이야. 거기 서 자기도 많이 잤어요. 지금은 차편이 좋아졌지만 그 당시는 버스가 안 갔어요. 김천까지 가면 택시를 타든지 동네 이장님이 참 잘 해 주셔서 차를 갖고 나오세요. 봉고 가지고. 그런게 많이 힘들었어요.
그렇게 해서 해 놓고 또 복호동 수도원을 지셨어. 아휴, 그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죠. 그걸 여성들이 짓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일을 시킬려니 남자들이 여성들 말을 들어요. 그 당시에 돈이 없었어요. 전초련 회장 당시 재무를 봤는데 여성회에 돈이 한 푼도 없었어요. 그런 걸 박 회장님이 하시면서 3백만 원을 모아놨어. 여성회비가 지방에서 이백 원씩밖에 안 올라 왔으니 그걸 갖고 무슨 일을 하겠어요. 영등포지부나 서울지부나 5 백 원씩 올라왔지, 다른 지부는 형편없었지요. 그 돈을 가지고 비를 세우고 수도원을 지은 게 아니에요. 여성회원들이 모금을 했잖아요.
내칙 내수도문 비는 먼저 세우고 그 다음 임기 때 수도원을 세웠어요.
한번은 가리산 수도원에 갔는데 김장을 천 포기를 해요. 그래서 깜짝 놀랐다구요. 그러니 도와야죠. 배추를 개울로 끌고가 서 개울에서 씻고 또 해마다 봄 가을로 가서 이불 빨래도 했는 데 , 개울까지 끌고 가서 빨고 자면서 말려서 꿰매고 그랬어. 그 당시는 다 꿰매는 거였어요. 그렇게 몇 년을 힘들게 했지. 돈이 많지 않으니까. 그리고 여성회에서 복지관 봉사까지 나가는걸 엇그제까지 했어요. 그렇게 해 왔는데 , 내 나이 칠십 먹으면서 그만둔 거죠.
가끔 복호동에 가면 해월신사님 유적지라고 해서 4월 25일이 개원기념일, 12월 22일이 내칙 내수도비 건립일인데 . 그거를 11월에 날을 잡아서 나를 꼭 데려가요. 해월신사님 자손들이 안 가니까. 유적지 대표라고 나를 데려가. 그러면 가서 얘기를 하면 저절로 그 고생한 얘기가 나와요. 지금 젊은 실무들은 그 얘길 듣고 웃지. 왜 밥이라도 잘 먹이지 그랬어요?
그렇게 해 놨으니 힘이 많이 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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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에서 수련을 한다고 그래서 마지막 날 5천 원을 내고 어떻게 되든 가 보자 하고 있는데, 우리 집 양반이 낮에 드러누워 낮잠을 자는데 할머니가 꿈에 나타나서 좋아하시면서 엉덩이 두들기면서 잘 했다, 잘 했다 그러더래요. 근데 그 날이 내가 용담에 수련 가려고 망설이다가 안 갈려고 그러다가 마감날 5천 원을 냈다고 했는데 할머니가 좋아하셔서 꿈에 보였나 보다, 그러시더라구. 첫 수련을 그렇게 했어요.
그 때 월산 ( #김승복 ) 선생님이 붐을 일으켜서 그 당시에는 수련을 많이 했어요.
그 때는 의무적으로도 많이 했고 대강을 많이 모셨어요.
월산 선생님이 지도하시는데 강령 모셔 갖고 청수를 막 뿌려고 그랬어요.
강령을 그렇게 잘 모셨어요.
■ 구술일: 포덕 147년(2006년) 9월 10일 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