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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토마스와 조선
제 1차 조선 선교여행
1865년 7월 27일, 토마스는 지푸에서 8개월 동안 몸담고 있었던 세관 통역관의 자리를 내려놓고 조선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그때까지 그는 런던 선교회로부터 재임 통보를 받지 못했다. 조선선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대리인 자격으로 가게 되었다. 선교회에서는 기본적인 경비와 다량의 성경을 지원하였다. 토마스에게 한글을 가르쳐준 김자평과 또 한 명의 조선인이 동행하였다. 드디어 1865년 9월 4일, 중국인 우웬타이가 항해하는 배에 토마스는 몸을 실었다. 그들이 처음도착한 곳은 백령도의 두문진 포구였다. 백령도는 중국에서 조선으로 올 때 가장 먼저 만나는 섬이다. 백령도를 지나 9월 13일조선 본토에 상륙하였다. '조선왕조 신록'에 의하면 그가 첫발을 내디딘 땅은 황해도의 창린도 자라리였다.
"배에 타고 있던 한 영국인이 모래사장에 종이 뭉치하나를 던지고 남해를 향해 달아났다. 그 종이 뭉치 속에는 종이 한 묶음과 167권의 금서와 서양 달력이 있었다."
토마스는 배를 타고 한양으로 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때마침 불어오는 강풍으로 그가 탔던 조선배가 파선되었고 그는 한양으로 가려던 계획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는 조선을 떠나 만주의 피쯔위 항구에 도착했고 거기서 걷기도하고 말을 타기도 하여 베이징으로 갔다. 토마스는 2개월반 동안 조선에 체류했고, 4개월 만에 베이징으로 돌아온 것이다.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토마스에게 기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대하던 대로 런던 선교회 선교사로 재임명되었으며, 베이징 지부로 발령이 났다는 통보였다. 사실 그는 1865년 8월경 이미 재임명되었다. 다만 관련 서신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전달되기까지 몇 개월이 소요되었기에 늦게 알았을 뿐이다.
제 2차 조선 선교여행
1866년 8월 9일, 토마스는 미국의 무장 상선 '제너럴셔만호'의 통역관으로 제 2차 조선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토마스는 런던 선교회 소속의 선교사이었지만, 이번에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의 윌리암슨 선교사의 도움으로 성경을 가지고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는 토마스의 편이 아니었다.
1866년은 병인년이다. 대원군은 본격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대원군은 1863년부터 1873년까지 10년간 아들인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했다. 중국은 제 2차 아편전쟁의 패배로'베이징 조약'(1860년)을 맺게 된다. 전쟁 당사자도 아닌 러시아는 조약을 중재해주었다는 명목으로 중국에게 연해주를 할양 받고 조선과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부동항을 찾아 남하 정책을 펼치던 러시아가 조선을 위협하여 통상을 요구하자, 대원군은 조선에서 선교하는 프랑스 신부와 협상하여 조.불.영 동맹을 체결하려고 했다. 프랑스 신부와의 만남이 지연되면서, 러시아는 특별한 이유 없이 물러갔다. 대원군이 천주교와 내통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정치적 기반이 위태롭게 되자, 대원군은 초기의 천주교'묵인정책'에서 '탄압정책'으로 급선회하게 되었다. 왜 조선이 천주교를 박해했을까? 당시의 교서를 보면 박해의 원인을 알 수 있다.
"'사교를 금지하는 교서', '요즘의 서양인 사건은 참으로 일대변괴이다. 우리 백성들의 떳떳한 윤리를 파괴하고 우리나라의 풍습과 교화를 어지럽혔으니 천도로 용납할 바가 아니며 왕법으로도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다.' '만약 이들을 숨겨주고 아뢰지 않다가 발각되었을 경우 결단코 응당 남김없이 코를 배어 죽여야 할 것이다. 1866년 3월 10일대왕대비 조씨"
박해의원인은 조선사회의 근간인 유교사상을 천주교가 흔들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가 박해 받은 이유도 유사하다. 기독교는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계급사회에서인간평등을 주장하고, 다신교 사회에서 유일신을 믿었기 때문이다. 용어로 인하여 식인종, 근친상간 자들이라는 오해까지 받았다. 주후 64년 로마의 대화재로 황제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자, 네로가 희생양으로 기독교인을 지목하면서 본격적으로 박해 받기 시작했다.
8월 27일, 제너럴셔만호의 승무원 6명이 작은 배를 타고 평양의 한사정으로 향했다. 순시대장이었던 중군 이현익이 그 배를 뒤쫓았으나, 오히려 제너럴셔먼호승무원들에 의해 억류되었다. 순식간에 붙잡혀 본선으로 끌려간 이현익은 그곳에서 자신의 인장 역시 빼앗겼다. 조선법에 따르면 군인이 공식 인장을 잃어버리면 누구든지 참수되거나 귀향을 가게 되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조선과 제너럴서먼호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화포와 조총이 난무하면서 2주간의 대치 끝에, 9월 5일 제너렬셔먼호는 불길에 휩싸이게 된다. 27세의 토마스는 성서를 강가에 뿌렸고 육지에서 체포된 후, 참수를 당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목을 베는 '박춘권'에게 성서를 건네주었다. 토마스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박춘권'은 훗날 회개하고 장로가 되었다.
7) 토마스와 김석태 사령관
김석태 사령관은 1926년 1월 23일 생이다. 20년은 일제 통치하에서, 해방되고 5년은 공산치하에서, 6.25가 터지고 인민군으로 내려와 반공포로가 되어 거제도 수용소에서 3년, 석방 후 국군으로 3년, 제대 후 구세군 사관이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정말 파란 만장한 삶을 걸어왔던 이 시대 역사의 산 증인이다. 그는 '한국 구세군 사령관'으로 은퇴하고 5년마다 책을 출간하여 지금까지 5권을 썼다. 고희에 발간한 첫 번째 책은 "내 인생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나요"이다. 자신의 70 인생을 되돌아보니 한마디로 "내가 산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음"을 간증한 책이다.
75세에 쓴 책은 '예수傳家'이다. "언젠가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상봉할 기회가 온다면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예수를 믿었고 또 전하며 살았다는 말을 이 책이 대신하여 말하리라" 그는 평안남도 영원에서 태어났다. 전통적인 유교가정에서 자랐지만 소학교 때 교회를 다닐 수가 있었다.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가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알고 교장은 양자택일을 하라고 했다. 그는 신앙을 택하고 교사를 그만두었다. 6.25가 발발하고 인민군으로 징집이 되었다. 그는 총을 들고 기도했다. 이 총으로 아무도 죽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에 응답인가, 그는 포로가 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거제도 수용소에서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반공포로로 석방되어 국군에 입대했다. 춘천에서 근무할 때 구세군 교회를 다니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제대 후 구세군 사관학교에 입교하여 구세군 사관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두고 온 산하, 가족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예수 전가'는 언젠가 그들을 만나서 해야 할 이야기를 쓴 것이다.
책 내용 중에 피로 물든 성서란 제목 하에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2018년 7월 12일, 광화문 뷔페 집에서 구세군 역사박물관장인 황선엽 사관과 함께 만났다. 그는 한문 쪽성경인 '馬加福音'을 편지와 함께 가지고 왔다. 편지는 구세군 제일교회에서 찬양대를 지휘하는 강영진 부교가 김석태 사령관에게 쓴 글이다.
"존경하는 김석태 사관님, 하나님의 축복이 사관님과 가정에 항상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사관님의 예수전가를 보며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특히 제 1권의 '피로 물든 성서'에서 조선 선교에 하나의 밀알이 된 토마스 선교사님의 거룩한 순교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10년 전 중국 산동성 연대시 서쪽에 있는 봉래(옛 지명 등천)라는 곳에서 오래된 마가복음 구했습니다. 아마 토마스 선교사가 1866년 순교할 때 마가복음, 쪽 성경을 들고 순교할 당시의 성경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만. 사관님께서 제게 손수 책자도 전달하셨는데 제가 사관님께 드릴 자그마한 답례가 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주의 일을 위해 힘써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2016년 7월 3일 강영진 올림
김사령관은 어릴 때 '토마스 선교사'와 '주기철 목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꿈을 키웠다. 그가 쓴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평양성 사람들의 구전에 의하면 관헌들은 토마스 선교사의 목을 대동강변에 있는 대동문에 달아 이를 공개했다고 한다." 시간이지나면서 토마스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 속으로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토마스가 순교하고 50년이 지난 1918년이 되서야 오문환 장로가 토마스를 만나 성경을 받았거나 그와 면담했던 조선사람 200명을 만나보고, 연구를 계속하여 1928년 "토마스 목사전"을 썼다. 그 후 1932년 대동군 대동강면 조왕리 교회를 '토마스 선교사 기념교회'로 선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북한이 공산화 되면서 모든 교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8) 토마스와 김진경 총장
2001년 1월 '연변 과학기술대학교' 김진경 총장은 북한에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북한 대표단이 김총장을 찾아뵙겠다는 내용이다. 찾아온 대표단은 김진경 총장을 평양으로 초청한다는 내용문을 전달했다. 평양을 방문하니 김일성 종합대학 총장과 김책 공대 대표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김총장에게 연변과 똑같은 과기대를 평양에도 세워 줄 것을 요청했다. 북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 받고, 평양과학기술대학 부지를 조사하던 중 김총장은 대동강변을 택했다.
그곳은 군부대 땅이었다. 북한 교육청 관리들은 깜짝 놀라 안된다고 했다. 하지만 김 총장은 "최고지도자가 뭐든 다 들어주라고 했으니까, 일단우리 안을 올려나 보라"고 말했고, 얼마 후 군대철수명령이 떨어졌다. 군대를 옮기고 평양과 기대의 기초공사를 하던 중,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땅을 파던 중 토마스 선교사의 기념교회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토마스 선교사의 기념교회가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순교자의 피는 한국의 영적부흥을 일으킨 '장대현 교회'에서, 통일의 물고를 트는 '평양과기대'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허가 후 8년 만인 2009년9월 16일, 마침내 '평양과학기술대학'의 준공식 및 총장 임명식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2010년 10월 25일에는 평양과학기술대학 학부와 대학원이 강의를 시작했다. 2011년 8월 25일에는 북한 정부가 김진경에게 '평양 명예시민증'과 '교육학 명예박사증'을 수여하는 행사를 가졌다. 북한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에게 '명예시민증'을준 것이다. 그는 4개국 시민증이 있다. 미국, 중국, 북한, 한국이다. 모두가 김진경 총장의 순수한 '사랑주의'(Loveism)에 감동받았다.
하노버교회 앞에서 김진경 총장의 자서전을 쓴 '스텔라 프라이스' 부부를 만났다. 두 사람은 웨일즈 출신으로 보스턴에서 살았다. 우연히 웨일즈 홀라노버에 있는 한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고, 그 교회에서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들은 토마스 선교사의 삶을 더 깊이 알고 싶어 그의 생애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의사인 남편 스티븐 프라이스 박사와 함께 '중국과 북한'에 의료 선교를 가면서 토마스의 발자취를 따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스텔라는 "조선에 부르심을 받다"(Chosen for Chosun)는 제목으로 토마스 선교사 순교 150주년 기념 책자를 발간했다. 두 사람은 지금 토마스 선교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하노버 교회 사택을 구입하여 살고 있다.
하노버교회의 예배 후 주차장으로 가는 중에 마당에 나와 있던 스티븐 박사를 만났다. 부인이 쓴 "조선에 부르심을 받다"란 책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했다. 그는 잠깐만 기다리라고 한 후, 집에 들어가 한 권의 책을 가지고나왔다. 김진경 총장의 자서전인 '하나님의 동역자' (God's Collaborator)이었다. 번역본이 없어서 미안하다며, 책을 선물로 주었다. 스티븐 박사 부부는 중국과 북한선교를 하면서 오래 전부터 김총장을 알고 있었고, 스텔라는 그의 '사랑주의'(Loveism)에 감동받아 책까지 쓰게 된 것이다. 책에는 '평양과기대' 부지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북한 정부는 '평양과기대'와 관련된 대부분의 권한을 김총장에게 위임했다. 북한은 김총장에게 과기대 후보지를 세 군대를 보여주며 선택하라고 했다. 김총장은 기도 후에 대동강변 부지를 택했다. 김총장 자신도 놀랬다. "토마스 선교사 기념교회 터"였다. 과연, 우연이라고 해야 하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
9) 토마스와 박은배 교장
박은배교장은 1995년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 총회에 참가했다가 그곳에서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1856∼1890)의 순교 이야기를 듣고 한국교회 역사에 눈을 뜨게 됐다. 2008년 9월 호에 크리스찬리뷰와 인터뷰한 글이 실려 있다.
“나는 호주 한인교회에 많은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1995년 호주 멜본한인교회에 갔다가 호주의 첫 한국선교사데이비스의 순교 이야기를 듣게 됐다. 남들은 어땠는지 모르겠는데 너무도 큰 감동을 받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 데이비스는 복음을 전하려고 40일간 배로 태평양을 건너 한국을 찾았지만 폐렴과 천연두로 입국한 지 6개월 만에 세상을 떴다. 이 사건은 당시 호주교회에 대단한 영적 각성을 불러 일으켰고 결과적으로150명의 선교사들이 조선을 향하게 된다. 역사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이 사실을 듣고 큰 감동과 반성을 하게 됐다. 그래서 기독교 유적지를 찾아 나서다가 결국 토마스 선교사의 기념관까지 세우게 됐다."
그는 데이비스의 순교 이야기를 듣고 '평범한 교사'에서 '복음의 투사'로 변했다. 그 후 '한인기독교유적지'를 답사하고 글을 통해서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그를 '안산여자정보고 교장'으로 승진시켜주셨다. "남편이 교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박교장을 쓰시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평교사였을 때는 윗사람의 눈치 보느라 자유롭게 시간을 내지 못했습니다. 교장이 되고 남편은 자유롭게 선교지를 방문하고 글도 쓰게 되었습니다." 2018년 7월 9일, 부인인 배수옥권사와 함께 강화도에 있는 '토마스 선교사 기념관'을 찾아갔다. 교사 퇴직금을 털어 산 '기념관 부지'이다. 박교장은 부지를 조성하고 토마스 선교사의 흉상을 동으로 제작했고, 고훈 목사(안산제일교회 원로목사)는 시비를 세웠다. 그러나 기념관을 세우기까지는 많은 난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째 구입한 곳이 맹지라 강화시청의 허락을 받아야만 길을 낼 수 있다. 둘째 교계에서는 기념관 건립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셋째 학계에서는 토마스 선교사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있었다.
"참 많은 노력을 했어요. 강화도는 지방색이 아주 강한 곳인 것 같습니다. 외지 사람이 땅을사서 길을 낸다고 하니 허락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허락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배 권사는 답답함을 감추지 못하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만약 토마스 선교사가 미국 출신의 감리교나 장로교 선교사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토마스선교사는 영국 '회중 교회' 목사였다. 이제 영국에는 '회중교회'란 교단은 없다. 장로교, 회중교회, 그리스도 교회 등 여러 교단이 연합하여 URC(United Reformed Church)라는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다.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한 '하노버 교회' 역시 작은 시골교회로 전락하여 도와줄 여력도 없다. 다행히 토마스 선교사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그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박교장은 실망하지 않고 기념관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슴에 통증이 있었다. 처음에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을 했지만, 결국 병원에 입원해 정밀검사를 받게 되었다. 아뿔싸, 담도암 말기라는 진단이 나왔다. 3개월 후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날은 2009년 7월 27일이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은퇴를 얼마 앞두고 일어난 사건이다. 은퇴 후 자유롭게 기념관 사업에 매진하려고 했는데! 박교장은 자신에게 비전을 보여준 '데이비스 선교사'와 같은 길을 걸었다. 데이비스는 이역 멀리 호주에서 배를 타고 1889년 10월에 도착해서 6개월간 한글을 배우고, 부산 복음화를 위해서 1890년4월 4일 부산에 도착한 다음날인 4월 5일 순직했다. 그러나 그 이후 더 많은 호주 선교사들이 한국을 찾아와 부산과 경남 지방을 복음화 하였다.
"남편은 토마스 기념관 건립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가는 것을 많이 아쉬워했습니다. 앞으로 기념관 사업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도저히 저는 이 일을 추진할 능력이 없어요" 배권사는 갑상선 암으로 3번의 대수술을 받았다. 지금은 큰아들 내외와 함께 김포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혹시 자녀 가운데 이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아빠가 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 보였는지, 돌아가시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왜 박교장은 토마스 선교관을 강화도에 건립하려고 했을까?" 토마스의 선교행적에는 강화도와 관련된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다."
배 권사를 만나고서야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배권사는 박교장이 2009년 1월에 발간한 "하나님의 호흡 - 한국기독교 국내 유적답사기 1권", "하나님의 거처 - 한국기독교 국내 유적답사기 2권"의 책을 서재에서 꺼내, 선교관 건립과 관련된 부분을 펼쳐 주었다. 책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토마스는 1차 선교 여행을 떠났으나 거센 풍랑을 만나 간신히 베이징으로 돌아왔는데, 어느 곳에서 풍랑을 만났는지는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동시 교동도에서 살았던 박동엽의 집안에는 토마스가 백령도와 볼음도를 거쳐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목을 밤중에 탐색하다가 풍랑을 만나 타고 온 배가 쌍여에 걸려 교동도에 대피하였을 때 그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중략) 조선시대에 교동도는 한강의 입구에서 한양으로 들어가는 배를 감시하던 섬으로 삼도수영이 설치된 전략적으로 중요한 섬이었다."
토마스는 박동엽의 집에 머물면서 배를 고치고 식량과 물을 채우는 등 도움을 받았고, 이튿날 밤에 몰래 교동도를 떠나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선교관부지에서 날씨가 맑은 날이면 '교동도'와 '쌍여', 그리고 북한의 개풍군이 보인다. 박교장은 지금은 이곳에 기념관을 세우지만, 통일이 되면 기념관을 대동강변에 세우기를 원했다. 그는 믿었다. "한사람의 꿈은 망상이 될 수 있지만 여러 사람이 같이 꾸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을"
박교장은 토마스 선교관을 건립하려는 이유를 이렇게 고백한다. "단추가 잘못 꿰어지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꿰면 됩니다. 한국교회가 잘못돼가고 있다는 우려 섞인 지적이 많이 나오는데 이 문제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해결됩니다. 대한민국의 신앙의 뿌리에 뿌리를 찾다보면 가장 마지막에 남는 단어가 '순교'입니다. 한국교회가 성공을 지향하고, 경영 마인드로 관리하고, 복을 강조하는신앙으로 변질돼 가는데 이제는 순교의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저는 토마스 기념관을 설립하는데 남은 생애를 바치고자 합니다." 박교장은 선교관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피와 땀은 선교관 부지에서 숨 쉬고 있다. 박교장의 뜨거운 숨결이 그 누군가를 통해서 이어지기를 소원한다.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이어 새롭게 거듭나야 할 때가 되었다. 나는 한국에 갈 때마다 양화진을 찾는다. 순교자의 비문 앞에 서면 내가 보인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J. W. 헤론) "나는 웨스트민스터사원에 묻히기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H. B. 헐버트)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A.R. 아펜젤러)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 (R. R. 켄드릭), “주님! 길고 긴 여행을 끝내고 이제 나는 안식을 얻었습니다.” (G.A. 테일러), “내가 조선에서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조선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 (J. E. P 켐벨)
'종말론적 삶'이란무엇인가? 열심히 살다가 그날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삶을 오늘 사는
것이다. 그날을 알고 오늘을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곳을
믿고 이곳에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