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루카 7,16)
교회는 오늘 ‘사막의 성인’, ‘수도생활의 시조’라 불리는 성 안토니오 아빠스를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3세기 중엽 이집트의 중부 지방 코마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성인은 어느 날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하신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에 감화되어 자신의 많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성인은 사막에서 홀로 지내고 오직 기도에 정진하는 은수 생활을 시작하였고 그런 성인의 모습을 보고 많은 이들이 성인과 함께 은수생활 속에서 하느님만을 찾는 구도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로서 ‘사막의 성인’ 그리고 ‘수도생활의 시조’라는 칭호로 불리는 안토니오 성인을 기억하는 오늘 복음 말씀은 이번 주간 계속되는 마르코가 전하는 예수님의 치유기적 이야기의 연속입니다.
나병환자와 앓고 있는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시는 예수님은 오늘 복음 안에서도 갈릴래아 지역 카파르나움이라는 마을로 들어가 그곳에서도 이전 다른 고을에서 그러셨던 것과 똑같이 병자들 하나하나를 어루만져 주시고 당신의 손으로 그들의 모든 병을 낫게 하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이에 예수님이 계신 곳의 문 앞까지 빈자리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이들이 몰려옵니다. 어찌 보면 혼란스러운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곳에서 예수님은 당신께 치유의 기적을 청하는 이들의 청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을 하나하나 따뜻이 어루만져 주며 그들의 아픔을 달래주시고 그들을 괴롭히는 모든 고통, 병과 아픔 모든 상처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그들 모두를 해방시켜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 안에서는 한 가지 특별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그것은 바로 너무 많은 사람들 틈에서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보여준 행동입니다.
중풍병자를 들것에 실어 데리고 온 네 명의 친구들은 무수히 많은 군중들로 인해 예수님의 곁으로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문 앞에 이르기까지 빈자리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이 모인 그 곳에서 그들이 예수님께 다가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오직 사람들 사이의 비좁은 틈을 비집고 나가는 방법뿐, 그러나 이 방법마저도 들 것에 실려진 중풍병자를 데리고서는 불가능한 방법이었습니다. 이에 그들은 기발한 방법 한 가지를 생각해내기에 이릅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의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의 한 부분을 뚫어 그곳으로 중풍병자를 실어 내려 보낸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의 이 같은 행동 속에 담겨진 그들의 간절하고도 굳은 믿음, 곧 예수님이라면 중풍으로 고통 받는 자신의 소중한 형제를 낫게 해주리라는 굳은 믿음, 그리고 이를 위해 무엇도 개의치 않고, 그 분께 다가가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들의 절박하고도 간절한 마음에 예수님은 그 병자에게 병의 치유와 더불어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ㄴ)
예수님의 이 말씀에 중풍병자는 그 순간, 평생을 들 것에 누워 지내던 고통스러운 삶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자신을 구속하던 들 것에서 스스로 일어나 더 이상 들 것에 의지하는 의존적 삶이 아닌, 자신의 두 다리로 당당히 일어서 들 것을 직접 자신의 손에 들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갑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 곧 예수님께로부터 선포된 하느님의 기쁜 소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복음의 중풍병자와 같이 예수님께로부터 이 하느님의 기쁜 소식, 곧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쁜 소식을 들은 사람들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귀로 들은 그 기쁜 소식에 각자의 믿음이라는 행동의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들이 들은 소식은 그저 울림 없는 메아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같은 사실을 오늘 독서의 히브리서의 말씀이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구원의 약속을 받은 이들이 그 약속의 말씀에 합당한 믿음의 자세를 갖추지 못했을 때, 일어나게 될 결과를 오늘 독서의 히브리서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냉혹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약속이 유효한데도,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미 탈락하였다고 여겨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 주의를 기울입시다. 사실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 그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귀여겨들은 이들과 믿음으로 결합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히브 4,1-2)
오늘 독서의 히브리서의 이 말씀처럼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자신의 두 귀로 분명히 듣고서도 그에 합당한 믿음이라는 실천적 행동으로 응답하지 못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결과는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가는 데에 탈락하는 것에 더해 하느님의 말씀이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 상태, 다시 말해 하느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과 무관한 사람, 마치 지난 화요일 복음에 등장했던 마귀들인 이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선포하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누구인신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 예수님이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분, 아니 자신을 멸망시키러 오신 분이라고 오해한 것과 똑같은 일이 우리에게 벌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오늘 복음에 예수님이 일으키시는 기적을 분명히 목격하고서도 예수님께 트집을 잡으려 하는 율법학자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네 명의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자신들이 들은 기쁜 소식, 곧 중풍병에 걸린 자신의 소중한 친구를 낫게 해 줄 메시아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그 분께 자신들의 모든 믿음을 두는 굳은 믿음을 갖고 있었으며 그 믿음을 행동으로 옮김으로서 예수님으로부터 그 믿음을 인정받아 자신들의 믿음에 대한 응답, 곧 자신의 소중한 친구를 중풍병으로부터 치유와 함께 죄의 용서라는 구원까지 허락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이 같은 의미에서 오늘 복음환호송의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에 꼭 새기십시오. 루카 복음의 말씀을 인용한 오늘 복음환호송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루카 7,16)
루카 복음사가의 이 말씀처럼 우리 가운데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 우리 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곁에 오셔서 고통 속에 신음하며 아파하고 시련 속에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 우리에게 당신의 손을 내밀어 우리를 일으켜 주시고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아픔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는 진정한 구원자 메시아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을 믿고 의지할 때, 우리는 오늘 복음의 중풍병자가 자신이 평생 의지하고 있던 들 것에서 스스로 일어나 자신의 두 다리로 당당히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 모두가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이들과 같은 굳은 믿음으로 구원자이자 메시아인 그 분께 우리의 모든 믿음을 두어 그 분으로부터 육신의 치유와 더불어 영혼의 치유까지 받아 그 분으로부터 오는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온전히 만끽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니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히브 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