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선생님께서 소주 회사 회장님을 소개해주셨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냐 물으셔서 도서관 성금 안내 글을 보내드렸습니다.
며칠 뒤 회사 대외협력팀 직원이 도서관에 오셨습니다.
어떻게 운영하는지
도서관 건물은 자가인지
또 비슷한 질문을 몇 개 더 하셨는데 이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정중하고 친절한 분위기의 손님이었습니다.
처음 만난 분이 저런 질문을 하시면 헤헤 웃으며 농담으로 답을 피하곤 하는데 이날은 구구절절 설명했습니다.
'필요한 것은 없다 도울 거면 성금을 보내라' 이 뜻을 완곡하게 전했습니다.
지인의 소개고, 돕고자 해서 오셨으니 친절한 응대가 마땅했겠으나 그날 저의 모습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얼마쯤 대화를 이어가다 말을 줄였습니다.
갑자기 목덜미에 땀이 났습니다.
일의 진행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조금 더 생각해보겠다는 말로 대화를 끝내고 손님을 배웅했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전화하는 동무들이 있습니다.
호숫가를 걸으며 통화했습니다.
두 동무들은 내가 예상한 답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알고 있는 답과 다른 결정을 하려니 내 안에서 무언가 꼬여버린 겁니다.
동무들과 통화 후 명쾌해졌습니다.
도서관에 오신 손님께 곧바로 장문의 문자를 보냈습니다.
--------
생각을 정리하여 글로 답변 드리는 것이 좋겠다 싶어 문자 남깁니다.
감사하지만 기부를 받지 않겠습니다.
이유를 설명 드리고 싶습니다.
당장 필요한 것이 없고
도움을 받는다면 돈일 터인데 이또한 받을 명분이 부족하다 판단했습니다.
호숫가도서관은 저희의 비전과 가치에 공감하고 응원하는 분들의 도움을 받아왔습니다.
성금을 보내시는 분들께 제가 해드리는 것은 없습니다.
사회사업 뜻있게 하겠다는 다짐과 연말 기부금영수증 정도가 제가 드리는 전부입니다.
기업 사회공헌으로서의 성금은 받는 이가 그에 상응하는 보답(어떤 형태이든)을 하여
상부상조함이 마땅한데 제게는 그럴 역량이 없습니다.
또한, 도서관으로 보내시는 성금을 도서관 사업에 쓰지 않습니다.
도서관 건물 유지비와 도서관 직원 월급, 제 활동비로 씁니다.
아이들과 이웃들을 위한 직접 사업비로 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00기업의 '지역사회 공헌'이라는 가치가 저희 도서관 성금 운영 방향과 맞지 않을 듯합니다.
------
손님께 차마 설명하지 못한 거절의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재원의 정당성'입니다.
아이들 돕는 일인데 소주 회사의 돈을 받을 수 있는가? 없는가?
있다는 사람도 한 트럭이겠고 없다는 사람도 줄을 설 겁니다.
확실한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논란을 떠안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 이웃들에게 동료들에게 가족에게 변명하듯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날 왜 그랬을까?
왜 다 알면서도 도움을 구했을까?
늙었습니다.
약해졌습니다.
곧 닥쳐올 도서관 앞 도로 공사와 그로 인해 벌어질 도서관 건물의 변화
이웃들과 동료들에게 지고 있는 빚
은성이 축구 교실과 은우의 중학교 생활
따위를 걱정하다
정도가 아닌 권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지금은 무사히 위기를 넘겼지만 나중은 또 모릅니다.
나중을 위해 지금의 나약함을 기록합니다.
금속처럼 단단한 뜻을 품고 가야합니다.
임무가 중하고 가야할 길이 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가슴은 무른 살과 피로 이루어졌습니다.
첫댓글 최 동무, 어려운 결단을 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