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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이 넘어서 두번째 인생이 가능할까?
기대하기 어렵지만 편입합격은 그것을 가능케 한다.
지금 나는 완전히 다른 인격이 되어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한 사람들의 축하전화를 받으며 경쾌하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합격은 많은 것을 바꾼다. 좌절감을 자신감으로, 검은 은둔에서 일어나 빛을 발하는 등대불로,
옹졸한 낙오자에서 관대한 승자로, 총명했지만 영락해버린 불효자에서 믿음을 주며 부활하는 장남으로…
두려운 도전은 마침내 승리로 끝이 났고 편입시험은 내 인생의 분수령이 되고 있다.
목표설정
지금 생각해보면 인생은 애매한 영문법문제와 매우 비슷하다.
함정이 있으리라고 여기고 다른 것을 고르면 나의 지나친 소심함을 비웃고,
평이하다고 여겨서 쉽게 답을 고르면 이번엔 나의 경솔함을 꾸짖는다.
나는 십여 년이 넘도록 개신교 목사로서 성직자의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가 믿는 것과 내가 가르치는 것이 일치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괴리는 깊어가고 괴로움도 커졌다. 결국 나는 99년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목사직을 포기하고 말았다.
딸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고 그 밑에 아들이 5살 때였다.
그때부터 5년. 나는 현실적자아(직업)와 관련해 생소하고도 쓰디쓴 노정을 걸었다.
택시운전기사, 데이트레이더, 공장잡부, 건설현장노동자, 음식점주차관리원, 주류외판원, 대리운전기사 등으로서의 경험들은 내 삶의 철학에 대해 전면적 '재개발'을 요구하고 나섰고, 나는 일상의 스승들 앞에 무릎 꿇고 '생존'의 율법을 새로 배워야 했다.
어느새 나이는 불혹으로 접어들고 뚜렷한 직업없이 몇 군데 직장에서 취업과 퇴사를 반복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전쟁고아 같이 우울한 표정으로 나의 외출과 귀가를 지켜보아야 했다.
이상이 높았던 만큼 좌절의 늪이 깊었다. 죽어버리고 싶은 유혹이 늘 곁을 맴돌았다.
장고 끝에 지난해 2월 한의대편입을 결심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대로 긴 호흡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뒤늦게나마 나는 직업이란 단순한 밥벌이가 아니라 인간 존엄의 방호벽일 뿐 아니라 다음 세대에 물려줄 가장 변변한 유산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편입의 바늘귀 같은 가능성? 나는 나의 신통찮은 신체장기들 중에서 그나마 성능이 괜찮은 뇌를 다시 한 번 신임했다.
학원선택
인터넷사이트를 검색하고 몇몇 사람들에게 한의대 편입에 관해 수소문해 보니 후배 중 한 사람이 이미 편입에 도전하고 있는 중이었다.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한의대 준비생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경쟁자층이 두텁다는 것을 말해주므로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니다.
그는 강남의 K학원에 수강하고 있는 세명대목표 2년차 수험생이었다.
그에게서 편입은 독학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그가 다니는 학원에서 한의학개론과 한문을 등록했다.
그러나 한 달을 수강한 나는 다시 생각해야만 했다.
우선, 세명대는 내가 도전하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시험과목이 단출한 반면 문제가 어렵고 특히 한문의 난이도는 상식을 넘었다.
더구나 강의실에서 만난 고수들도 내겐 벅찬데 그들은 말하기를 "사기, 금강경까지 꾀는 진검 고수에 비해 우린 새 발의 피"란다. 그것은 나 같은 말학은 합격까지 최소 3년 이상 걸린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장수생이기에는 버틸 지구력도, 시간도 없는 처지였다.
또한 학원도 바꿔야 했다.
그 학원 강사는 편입에 경험이 없었고, 특히 한문강사는 강의자체에 경험이 없는 신참이었다.
당연히 수강생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난 영어와 생물 그리고 한문을 시험과목으로 하는 우석대로 타겟을 바꾸고 학원도 PMS로 옮기게 되었다. 우석대와 세 과목이 겹치지만 화학을 추가로 공부해야 하는 원광대는 포기했다.
한 놈만 패기로 했다.
각오와 정진
“한의대 최소 2년 잡아야 되는 거 아시죠?” 처음 학원에 등록할 때 조교의 말. 통계적 진실을 부정할 배짱은 없었지만 전략적 대응으로 나름대로의 예외를 만들고 싶었다. PMS로 옮기면서 환경조성작업에 착수했다.
먼저 휴대폰을 정지시켰다.
직업소개소에서 끈덕지게 걸려오는 짜증스런 전화로부터, 옛 교인들의 안부전화, 몹쓸 짓이지만 친한 친구들의 경조사연락까지도 깡그리 차단했다.
시간이 없는 나는 심리적으로 '난 이미 한 번 실패한 재수편입생'이라고 자기최면을 걸었다.
외부로부터의 간섭을 내버려 두면 내년 봄의 화사함은 가장 잔인한 고문으로 느껴질 것이다.
학원 교재 등 보따리를 챙겨서 집을 떠났다. 집은 편안하므로 괴로운 곳이다.
이왕 가족들에게 고통-사십대 가장의 대학편입공부의 기회비용은 다른 가족들에게 고스란히 고통으로 전가된다-을 안길 바에야 더 지독해지기로 했다.
1년 정도 가정을 소홀히 한다고 설마 애들이 호로자식들로 변하진 않겠지.
난 홀로 사시는 어머니집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고적함만이 어머니집을 공부방으로 택한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공부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학원비며 딸린 식구 생계비 등 실탄이 없어 주저했던 나는 염치불구하고 지난해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는 내가 대학을 중퇴하고 신학교를 거쳐 목사가 되는 일에 기뻐하지 않으셨고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네가 꼭 남의 밭에 씨를 뿌리는 것만 같구나"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니가 무척 섭섭했는데 지금 뭔가. 이제 와서 늙은 어머니에게 의탁하여 학원비, 생활비를 달라는 염치없는 말을 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고해성사 같은 나의 부탁을 듣고 난 후 말씀하셨다. "열심히 해보거라."라고.
자식의 떠도는 삶을 슬퍼하는 어머니의 눈물고인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나는 방을 나왔다.
매일 아침 새벽녘 먼저 일터로 떠나는 어머니의 인기척에 잠에서 깨고 늦은 밤 어머니의 촛불기도의 양초 냄새를 맡으며 잠이 들었다. 어머니가 요양원에서 치매노인을 씻긴 대가로 번 돈을 늙은 아들의 사교육비(?)로 내놓을 때, 나의 미래를 위해 어머니의 현실을 희생시키고 있다는 자책감과 역할전도의 아이러니가 나를 괴롭혔다.
꿈속에서조차 내 머리 속에는 오직 합격이라는 탈출구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적한 변두리로 숨어 지내며 공부에 전념하고자 해도 과거로부터 완전히 도망칠 수는 없었다.
6월에는 전에 알던 잡지사사장과 명예훼손 소송이 붙어 강제구인될 지경에 이르렀다.
하는 수없이 수업을 끝내고 법정을 드나들어야 했다. 법원이 학원과 가까운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7월에는 집 근처에서 놀던 조카가 팔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해 내가 병원에 입원시켜야 했고,
8월에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친척들에겐 내가 늦은 나이에 공부하는 모습이 아마도 병든 시아버지가 새 장가들겠다고 고집부리는 것과 같아 보였을 것이다. 어쩌다 산행을 마치고 집에 들른 이모가 "공부 잘 되?"라고 물을 때, 이모의 눈엔 '되지도 않을 일 그만두고 그냥 그럭저럭 회사나 다니렴'라고 씌여 있었다.
그러면 나는 "열심히 하고 있어요"라고 말하지만 '그래요. 그깟 시험도 해내지 못한다면 차라리 그냥 칵 죽어버리고 말 각오로 하고 있다구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뜨거운 것이 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난 ?去明來(슬피 떠났다가 기쁘게 돌아옴)해야 했다.
반드시. PMS로 학원을 옮기고 난 후 학원에 대한 만족감과 함께 새로운 불안감이 생겨났다.
영어는 오랫동안 익숙하게 접한 터라 만만히 여겼는데 실력측정고사 결과는 대실망이었다.
좀체로 80점이 넘질 않았고 석차는 상위 30%에조차 들지 못했다. 합격권이라는 상위 3%는 언감생심이었다.
생물도 마찬가지. '감수분열' 들어본 지가 언제인가. 80년 대입예비고사이후 생물학은 내게서 별보다도 멀었다.
그런데도 같은 반의 젊은 이들은 전문용어를 익숙하게 사용하면서 나를 주눅들게 했다.
내 눈에 그들은 모두 이미 의대생처럼 보였다. 전반기 때 영어와 한문의 문법과 어휘 등 기초학습에 공을 들였다.
오답노트를 만들어 지겹도록 보고 또 보았다. 그 결과 10월이 지나면서 영어성적이 비로소 '뜨기' 시작했다.
이제 기초다지기가 아니라 기출문제분석 등 출제경향에 입각한 '조준사격'훈련을 했다.
우석대는 영어, 생물의 경우 모두 난이도가 중하급이므로 만점이 아니면 합격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영어,생물 만점, 한문 -3이 나의 목표였다. 합격률 최고의 편입학원에 다니는 것만큼 적과 동지의 개념을 모호하게 만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1년 동안 체온과 숨결이 느껴질 만큼 좁은 자습실에서 같이 공부하면서 눈인사를 나누다보면 말 몇 마디 없어도 친구가 된다.
시험일까지도 어김없이 곁에 있어주는 차림새가-곤색 혹은 베이지색 점퍼 혹은 빨간 머리핀과 단발머리...- 눈물겹도록 반갑다. 그러나 시험은 동료들이 모두 슬피 울며 돌아가야만 내가 그 학교에 남는 비정한 제로섬에 다름아니다.
백대일을 넘나드는 경쟁률과 수험준비에 쏟아 붇는 정열을 고려하면, 시험이 임박해서 동료수험생들을 '죽여버리고' 싶은 생각마저 든다는 고백은 차라리 인간적이다. 나는 마음이 쓸데없이 중심을 벗어나 어지러워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敵은 동료수험생이 아니라 바로 출제문제’라고 마인드콘트롤하고 했다.
이름하여 '일백오십 문항자객!' 한 문제라도 놓치면 나는 그의 칼에 죽을 지도 모른다.
반복 또 반복
후반부 들어 영어는 기출문제를 위주로 반복해서 풀었다.
한문은 출제경향을 볼 때 사서가 단연 빈도가 높았다.
11월 들어 매주 1회 이상 사서와 교양한문텍스트를 정독했다.
생물은 고교자습서와 서브노트를 반복해서 읽었다.
내 보기에 텍스트 반복독해는 전 과목 통틀어 최고의 전술이었다.
반복횟수가 거듭될수록 가속도가 붙어서 점점 시간이 단축되었다.
人一能之己百之 人十能之己千之 ! 이미 수천 년 전, 중용에 밝혀놓은 학습비결에 무릎을 쳤다. 그랬다.
반복이 승자를 조련한다. 문제는 시간싸움이다. 때문에 촌음을 아꼈다.
60초 이상의 긴 인문학적 사유는 편입생의 방탕이고 5분 이상의 과거회상이나 상념은 수험생의 사치다.
대뇌회전은 편입문제유형에 맞게 단답형모드로 고정했다.
지하철에서 쓸데없이 뇌자원을 낭비하지 않도록 신문기사와 사진에는 시선을 껐다.
그렇지 않으면 고현정 사진 한 장을 요긴한 어휘 두 개와 바꾸는 어리석은 거래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결전 그리고 환희
“올 해엔 잘 되시기 바랍니다.” D데이. 우석대 시험장.
이미 면식이 있는 지, 이 곳 저 곳에서 악수와 덕담들을 나눈다.
관록이 넘쳐나는 경쟁상대들 앞에 나는 자꾸만 어린아이처럼 기가 죽었다. 예상대로 시험문제는 쉬웠다.
그러나 나는 좌절감이 밀려왔다.
합격자는 모두 만점자 세 명이 그 자리를 채울 것 같은데 나는 만점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시험결과를 묻는 가족들에게도 자신 있는 말을 해주지 못했다.
발표일까지의 일주일은 중학교 때 벌 받으러 교무실 가는 길처럼 멀고도 두려웠다.
드디어 발표일. 예정시간보다 일찍 합격자확인 팝업창이 떴다.
그러나 나는 도저히 내 손으로 자판을 두드릴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아내를 시켜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게 하고 나는 짐짓 무관심한 척 거실 TV를 켰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건넌방에서 아내의 비명이 들렸고 나는 뛰어들어가 모니터를 확인하곤 나도 모르게 아내를 끌어안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모니터에는 '합격'이라는 붉은색 폰트가 춤을 추며 현기증을 일으키고 있었다.
내가 두 번째 알에서 깨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어이구 정말 장하다. 우리 아들. 정말로 우리 아들.” 다시 비강좌우가 뻑뻑해져왔다.
감격과 함께 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그 후 지독한 감기로 1주일을 꼼짝없이 앓아누웠다)정말 정말 행복하다.
내가 해내다니... 출발은 남들보다 늦었지만 기쁨은 몇 배나 크다.
이제야 비로소 주변 고마운 분들을 떠올린다.
첫댓글 멋지네요 축하드립니다 멋지게 사시고 어머니께 효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