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박래은
미래엔 헝가리에 갈 거예요 외
검사실의 칸막이와 채혈대의 서늘함
세정제를 비빈 손이
팔뚝 위를 두드리는 시간
바람이 어린 나뭇잎을 흔들며
빨리 자라 그늘을 만들기 바라는
나는
볕든 벤치에서 통화 중인 여인이
큰 웃음소리를 냈을 때
그 음폭이 황홀했지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위생사가 밀어버린 당황을
너무 큰 낙관은 아니라며
그녀는 덤덤하게 말했지
링거를 달고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이
정원을 두텁게 채색하는 사이
봄이 스치더니
맑은 하늘빛 민머리 여인이 말하지
헝가리에 갈 거예요
프로포즈하기 좋은 볕그늘 찾아
미래엔 헝가리에 갈 거예요
봄꽃 떨어지는 의자는 나무 그늘만큼
앉아 있기 좋았는데
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미래를 알려주는 누군가가 오는 것을
알면서도
예정된 행사처럼 아픔을 기다릴 수 없어
나는
속으로 울고 있었지
슬픔은 포도와 씨앗 사이에 고인다는데
포도에 눈물이 없을 때
프로포즈와 포도 중에
어느 쪽이 더 큰 불치(不治)일는지
팔뚝에 바늘을 꽂는다
검붉은 병실 하나가 열린다
“미래엔
헝가리에 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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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집
구석은 괜찮아요 도롯가 통유리 집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먹는 일은 익숙하지 않아요
구석이라 찾기 힘들 수도 있지만 찾아내는 재미가 있을 거예요
미로찾기 그림책을 좋아했어요 입술을 모으고 연필 끝을 밀어 치밀하게 비틀어 놓은 길도 곧잘 풀곤 했지요
구석집 괜찮아요
제주도의 미로찾기는 울창한 나무들 때문에 헤매었지만 댕댕댕 종을 울린 후 망루에서 보면 머리를 민 것처럼 훤하게 생겨나는 길
영등포구청 앞에서 내렸어요. 지도를 보며 잘 따라가고 있어요.
오래된 식당들이 많은 골목이네요. 원조 부안집 지나 대구 반야월 막창집을 끼고 돌았어요
구석집은 괜찮아요. 오는 내내 상상하고 기대하고 구석의 진한 여운을 예약 했어요
골목의 산해진미 기운을 몰아놓은 집
가지튀김과 도마 위에 가지런한 돈베기
곱창이 둥둥 빠져 있는 전골을 끓여 먹어요
구석집에서는 예의 바른 L선생이 한 국자 떠주는 뜨겁고 칼칼한 국물
한 입 먼저
구석집에서는 입을 벌렸다가도 이내 다물어 씹어야 해요
구석은 제법 편안한 자리예요
집에서도 내 방구석이 제일 아늑한 것처럼
오래된 향토 음식을 먹을 때도 구석에 위치한 구성진 타령조의 찌개 끓는 소리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낙서 가득한 벽에 기대 먹는 한 숟가락
구석은 괜찮아요
계절에 상관없이
구석집엔 기댈 벽이 두꺼워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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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은|2020년 《시와반시》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