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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스탄티누스 상 |
II. 기독교 대박해 동안의 변화들 : 303~312년
(1)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박해(302~304년)
기독교는 3세기 중엽의 데시우스 박해를 지나, 특히 갈리에누스 황제가 박해 중단 칙령(260년)을 포고한 이래, 장기평화를 누려왔다. 평온은 빠른 교세 성장의 자양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4세기 초 동부 황제에게 경각심을 줘 다시 박해정책을 펴게 하는 자극제가 됐다.
이는 기독교에 대한 최후의 대박해로, 반세기 전 데시우스 박해 때와 비슷했다. 기독교 박해가 좀 더 심각한 국면을 맞은 것은 페르시아 전쟁에서 개선장군으로 돌아온 부황제 갈레리우스가 황제에게 더 강경책을 제안하면서부터였다. 성서몰수, 교회파괴, 기독교도 고위공직 박탈, 성직자 구금 등의 조치가 취해졌고(302~3년), 마침내 모든 제국주민에게 제사를 강제하는 칙령이 반포됐다.
(2) 갈레리우스의 관용칙령(311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칙령은 당연히 교세가 강한 지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박해칙령은 갈레리우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지위를 계승한 뒤에도 계속 유효했다. 그러나 기독교 대박해는 갈레리우스가 죽기 직전 극적 반전을 겪었다. 그의 명의로 기독교에 대한 관용칙령이 반포된 것이다.(311년) 첫째,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고, 그들의 공공집회를 허용하니 대신 치안을 어지럽히지 말 것. 둘째, 예배 중에 황제(들)의 안녕과 로마제국을 위해서도 기도해줄 것. 관용칙령은, 기독교 박해가 제국의 안전과 평화에 그리 효과적이지 않음을 깨달은 매우 현실적인 타협책이었다.
(3) 콘스탄티누스의 태양신 숭배
312년 전후로, 콘스탄티누스가 태양신 숭배라는 이교적 일신교를 중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많다. 갈리아의 이교도 웅변가들의 증언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는 장인의 음모를 물리친 직후(310년), 아폴로 신전을 찾아 예배했다고 한다. 그리고 312년 로마 전투에서의 승리를 ‘신의 가호(instinctus divinitatis)’ 덕이라 말하고 있는데, 그 신 역시 아폴로와 동일시되는 태양신이었다고 짐작된다. 콘스탄티누스는 그 후 계속(320년대 초까지) 황실 조폐창에서 제작하는 주화에 ‘불패의 태양신(Sol Invictus)’이라는 글자와 이미지를 새겨 넣었다.
III. 콘스탄티누스의 종교정책 : 313~324년
이교에 관련해 말하자면, 콘스탄티누스의 태도는 다소 전통을 벗어나고 있었다. 즉위 10년 기념제 때, 로마에서 이교 제사의 분향 행위에 거부감을 드러냈지만, 그렇다고 이교 숭배와 축제를 문제 삼지 않았다. 희생 제물의 내장으로 점을 치는 장점 제관(腸占 祭官, haruspex)에 대한 일련의 규제(316~321년)가 있었지만, 그것은 흑색 마술을 경계하던 옛 황제들의 관행과 그리 다를 바 없었다. 이교 제사에 대한 부분적인 거부감은 아마도 자신의 고유한 태양신 숭배와 연관이 있었다고 짐작된다.
한편 기독교에 대한 입장은 그동안 콘스탄티누스의 몇몇 법령들이 명백하게 친 기독교적인 것이라 해석되곤 했으나, 실은 그 취지가 그리 분명치 않다. 우선, 첫째는 교회 성직자에게 공공봉사 및 특정 세금을 감면해준 조처는 전통적으로 이교 사제들이 누려온 특권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었다. 둘째, 일요일 즉 태양일(太陽日, dies Solis)을 안식일로 정한 법령 역시 반드시 기독교적인 것이라 단정할 수 없다. 셋째, 혼인과 출산을 강제하던 로마의 오랜 법규를 폐지한 것도 기독교적 독신을 장려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적어도 공식적 차원에서 기독교도를 특별 배려하는 정책은 없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