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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자료실(Hibiscus) 스크랩 무궁화(無窮花)의 연혁(沿革)
심경구 추천 0 조회 63 16.02.27 10: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무궁화(無窮花)의 연혁(沿革)

 

여름날 아침 이슬을 머금고 햇살을 받으며 차례차례로 피어나는 무궁화 꽃은 참으로 신선하고 아름답다. 배롱나무 등과 함께 이 계절을 대표하는 꽃으로 꽃이 크고 단정하며 독특한 아미(雅味)를 느끼게 한다.

 

원래 일일화(一日花)이지만 여름에서 가을까지 긴 기간에 걸쳐 계속 핀다고 하여 무궁화(無窮花)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무궁화는 우리나라의 국화(國花)이다. 나라마다 그 나라를 상징하는 꽃을 두고 있다. 국화가 정해지는 것은 법으로 공식화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역사·문화적인 배경과 깊은 관련을 가진 꽃이 자연스럽게 국화로 정해지게 마련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무궁화가 국화로 정해진 것은 법이나 제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많이 자라고 있다는 기록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저술된 동양 최고(最古)의 지리서《산해경(山海經)》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군자의 나라에 훈화초가 있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君子國 有薰花草 朝生暮死)"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군자국은 우리나라를 가리킨 것이고 훈화초는 무궁화의 한자명이다. 이로 미루어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자라고 있었던 것은 2천 년이 훨씬 넘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임을 알 수 있다.《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인용하고 있는 중국의 고전인 고금기(古今記)》에는 "군자의 나라는 지방이 천리인데 무궁화가 많이 핀다(君子之國 地方千里 多木槿花)"고 하여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많이 피는 것을 예찬하였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는 우리나라를 '근역(槿域)' 또는 '근화향(槿花鄕)'이라 불러 왔다. 신라 때 최치원(崔致遠)이 효공왕(孝恭王)의 명령으로 작성하여 당나라 소종(昭宗)에게 보냈다는 국서(國書, 謝不許北國居上表) 가운데 우리나라를 '근화지향(槿花之鄕)'이라 하였고《구당서(舊唐書)》〈신라전(新羅傳)〉기사에도 "신라가 보낸 국서에 그 나라를 일컬어 근화향이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의《삼국사기》《삼국유사》《제왕운기》등의 문헌에는 이러한 기록을 볼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화암수록》에 "단군이 개국하였을 때 목근화가 비로소 나왔으므로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일컫되 반드시 근역이라 불렀다 한다"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고대로부터 중국인들은 우리나라를 "군자의 품격을 갖춘 나라, 무궁화가 아름답게 피는 나라"로 예찬하였으며 또한 신라시대에 이미 무궁화가 우리나라를 일컫는 꽃으로 사용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대한 이와 같은 호칭은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사용되었다. 이수광의《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고려 때 중국에 보낸 국서들에서 우리나라를 칭하여 근화향이라 하였다(高麗時表詞 稱本國爲槿花鄕)"라고 하였고, 또 문일평의《화하만필》에서는 "고려 예종(睿宗) 때 근화향이라 일컫는 것을 보임이 현존하는 사료에서 최초인 듯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최남선은 이를 부인하면서 "고려의 글에서 이것(근화향)을 쓴 예를 아직 보지 못하였다"고 하고 있다.《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여지고(與地考)〉에서는 위에서 열거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종합적으로 싣고 있다.

 

이수광에 따르면 《산해경》에는 "해동(海東)에 군자국(君子國)이 있는데,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칼을 차며 양보(讓步)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으며 무궁화(無窮花)가 많은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진다"고 적혀 있고, 또 《고금주》에는 "군자국은 지방이 천리(千里)인데 무궁화나무가 많다"고 적혀 있으며 당나라 현종은 신라를 군자의 나라라고 일렀고, 또 고려 때 표사(表辭)에서는 고려가 스스로를 근화향이라 하였다고 씌어 있다.

'근(槿)'자를 쓰는 아칭은 계속되어 조선 광해군 때 허균(許筠)의 시〈고평(高平)〉에는 다음과 같이 근원(槿原)이란 말이 보인다. 큰 들판은 포류로 뚫려 있고 /大野通蒲類 긴 담장은 근원의 한계로구나/長墻限槿原

 

이와 같이 고려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스스로 근역·근화향·근원이라 하였고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 문헌에서 무궁화가 꽃의 이름으로 직접 나타나는 것은《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는 고려의 문신 최충(崔沖)의 시에 '홍근(紅槿)'으로 나오는 것이 처음인 듯하다. 뒤이어 역시《동문선》에 실려 있는 이인로(李仁老)의 시에서는 '근화(槿花)'로 나온다.

 

그러나 무궁화를 직접 소재로 하여 시를 읊고 또 근화와 무궁화란 이름이 동시에 나오는 것은 이규보(李奎報)의《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화훼에 관한 전문서적이라 할 수 있는 세종 때 강희안의《양화소록》에는 무궁화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화암수록》에 실려 있는 강희안의 〈화목구품〉에서는 무궁화를 9품에 넣고 있다. 화암의《화암수록》〈화목구등품제(花木九等品第)〉에서는 목근이란 이름으로 8등에 올리고 또〈화개월령(花開月令)〉에서는 6월의 난에 넣고 있으나 〈화품평론(花品評論)〉에서는 그 설명이 빠져 있다. 〈화목구등품제〉의 목근조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단군이 개국하였을 때 목근화가 비로소 나왔으므로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일컫되 반드시 근역(槿域)이라 불렀다 한다. 속명 무궁화라 한다.

 

그러나 《화암수록》 〈화보〉에서 무궁화의 설명이 빠진 데 대하여 당시의 선비 안사형(安士亨)은 그 부당함을 지적하는 편지를 보내고 화암은 이에 대하여 정중히 사과하는 회답을 보내고 있다. 그 편지에서 무궁화와 관련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안사형의 편지〉우리나라에는 단군이 개국하실 때에 목근화가 비로소 나왔기 때문에 중국에서 동방(東邦)을 일컬어 반드시 근역이라 말하였으니 근화(槿花)는 옛부터 우리 동토(東土)의 봄을 장식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훤초·목근 두 꽃이 모두 《시경》에 수록되어 공자의 산삭(刪削)함을 당하지 않았으므로 누구든지 그 꽃의 귀함을 알고 있습니다.

 

훤초와 목근이 화보에 빠진 것은 매화가 초나라〈이소경(離騷經)〉에 쓰이지 않는 것이나 다를 게 없으니 형이 어찌 그 꽃의 귀함을 몰라서 그랬으리요. 반드시 소홀히 생각하여 빼버린 것이리라. 목근화도 홍백 두 가지가 있는데 흰 것은 화판과 빛깔이 백작약과 같으니 형께서 혹 흰 것을 보시지 못하였기에 화보에 넣지 아니했는지요.《시경》에 "얼굴이 순영(舜英)과 같다"고 말한 것은 그 흰 것을 가리켜 비유한 것인지요. 6~7년 전 제가 충주지방에서 백근화(白槿花)를 보았습니다.

 

<안사형에게 답한 글〉근화는 그 흰 것은 알지 못하고 다만 그 분홍색만 알 뿐, 홍(紅)도 아니고 안(殷, 적흑색)도 아닌 빛이 목련화와 비슷하며 황(黃)도 아니고 적(赤)도 아닌 것이므로 천히 여겨 소외하곤 하지만, 매양 그 가지와 잎이 조금 귀하게 생겨 얼핏 보면 계륵(鷄肋)과 같은 것이 아깝다 하였는데, 이제 꽃이 흰 것을 받아보니 이게 바로 순화(舜花)로서 "우리나라의 옛 봄을 상징했다"는 가르침을 알고, 이제사 비로소 우물 안에서 나와 하늘을 보았다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뜻과 생각이 충주(忠州)로 달리지 않을 때가 없으니 어찌 이 꽃을 우등의 영역으로 끌어 올리지 않겠습니까?

 

위에서 본 바와 같이《화암수록》에서는 "단군이 개국했을 때에 처음으로 목근화가 나왔다"고 하였으나 단군신화를 기록한《삼국유사》에는 어느 곳에도 목근화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없다. 이후 무궁화는 간혹 나타나는 한시에서나 또는《산림경제》《간거만록(間居漫錄)》《송남잡지(松南雜識)》《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등의 문헌에서는 목근 또는 근화로 나온다. 조선시대에는 이화(李花)를 왕실화로 삼았으나 과거에 장원한 사람에게 내리는 어사화(御賜花)는 무궁화(혹은 접시꽃)를 사용하였고 또 임금을 모신 가운데 베풀어지는 연회에 신하들이 사모(紗帽)에 꽂는 진찬화(進饌花)도 무궁화가 사용되었다. 무궁화는 숱한 별칭(別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궁화가 여러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고 그 특성에 따라 옛부터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갈래로 풀이해 본 데 원인이 있을 것이다. 또 그만큼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진(晋)나라 반니(潘尼)의 부(賦)의 서(序)에 실려 있는 다음 글은 이러한 사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조균(朝菌, 즉 무궁화)은 대개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 ······ 이 나무는 새벽에 꽃이 맺혀 날이 밝으면 피고 햇빛을 받으면 성해지고 날이 저물면 죽는다. 참으로 이상하다. 그리고 어찌 그리 이름이 많은가?

 

무궁화의 별명은 그 대부분이 한명(漢名)이지만 순수한 우리말도 있다. 그 많은 별칭 가운데 우리나라에서는 목근과 무궁화가 주로 사용되었고 그 밖의 한명은 거의 사용된 예를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는 무궁화의 별명으로 단(?)·순(橓)·일급(日及)·옥증(玉蒸)·주근(朱根) 등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무궁화의 명칭을 살펴보자.

 

① 목근(木槿)

무궁화의 이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목근과 무궁화이다. 원래 무궁화의 가장 보편적인 한명은 목근이었다. 그러나 목근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다. 임경빈(任慶彬)은 "이 '무궁화나무 근(槿)'자는 씨름 꽃(菫, 바이올렛)과 나무목(木)의 합자로 되어 있어 꽃 색이 닮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씨름 꽃의 색깔에 물을 타서 희석시키면 무궁화 꽃 색의 일부분을 생각하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만일 '부지런할 근(勤)'자에서 얻어 왔다면 무궁화나무는 부지런하다는 뜻을 갖게 되고 '삼가 할 근(謹)'자에서 뜻을 빌었다면 무궁화나무는 예절바른 나무로 해석된다"고 했다.1)또 일설에 따르면 '근(菫)'이란 글자에는 점토(粘土)라는 뜻이 있고 한편 무궁화의 수액에도 점질물(粘質物)이 많아 이 연유로 옛날에는 무궁화를 단순히 '근(菫)'이라고 썼다고 한다.

 

뒤에 여기에 목편(木扁)을 붙여서 '근(槿)'이라 하였고 다시 목(木)자를 덧붙여서 목근(木槿)이 되었다고 한다. 2)중국의 문헌에서 목근이란 명칭은《시경》을 위시하여《이아(爾雅)》《예기(禮記)》《본초강목(本草綱目)》등 수많은 문헌에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 목근의 명칭은 고려 최충의 시에서는 홍근(紅槿), 이인로와 이규보의 시에 근화(槿花)로 나온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화암수록》의 〈화목구등품제〉와 〈화개월령〉에 목근이 나오고, 한시에 서거정(徐巨正)의 시에서는 홍근화(紅槿花)〉로 나오고 그 뒤 윤선도(尹善道)와 정약용(丁若鏞)의 시에서는〈목근(木槿)〉으로 나온다. 이후《산림경제》《간거만록(間居漫錄)》《송남잡지(松南雜識)》등의 문헌에서는 대부분 목근으로 표시되고 속명으로 무궁화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는 목근으로 나오고 그 설명에 여러 별칭을 소개하고 있지만 무궁화의 이름은 나타나 있지 않다. 한말에 이르러서는 목근과 무궁화라는 명칭이 다 같이 사용되지만 그 후 점차 무궁화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하게 되었다.

 

② 무궁화(無窮花)

오늘날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무궁화라는 명칭은 한자어이지만 중국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고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하고 있는 명칭이다. 무궁화라는 명칭이 우리나라 문헌상에 처음 나타난 것은 고려 중기이다.《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는 이규보의〈문장로(文長老)와 박환고(朴還古)가 무궁화를 논평하면서 지은 시운(詩韻)을 차(次)하다(次韻文長老朴還古論槿花幷序)〉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장로(長老) 문공(文公)과 동고자(東皐子) 박환고(朴還古)가 각기 근화의 이름에 대하여 논평하였는데 하나는 "무궁은 곧 무궁(無窮)이란 뜻이니 이 꽃은 끝없이 피고 진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라고 하고 또 하나는 "무궁은 무궁(無窮)의 뜻이니 옛날 임금이 이 꽃을 사랑하였으나 궁중에는 이 꽃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라고 하여 각기 자기의 의견만을 고집하므로 결정을 보지 못했다.

 

위의 두 가지 주장 가운데 후자의 주장의 배경 일화에 대해서는 이와 비슷한 또 다른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당나라 때 현종이 양귀비를 궁에 들여 놓았으나 얼굴에 전혀 기쁜 기색을 나타내지 않으므로 재간이 있는 신하에게 양귀비가 행복한 웃음을 웃게 할 수 있는 방책을 물었더니 꽃을 가득히 심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왕명으로 궁궐 안에 꽃을 가득히 심어 매일 꽃을 피게 하도록 한 결과 화창한 봄날 온 천지가 꽃향기로 가득하였으나 단 한 가지 왕명을 거역한 꽃나무가 있어 이를 궁궐 밖으로 내쫓았다. 이에 다른 꽃들은 모두 궁궐 안에 있었으나 이 꽃나무만은 궁궐 밖에 있어 돌아갈 집(宮)이 없었다. 이때 왕은 저 나무는 집(宮)이 없는(無) 꽃(花), 즉 무궁화(無宮花)로 하라고 했다 한다.

 

이규보의 위 기록으로 보아 무궁화란 명칭은 이 시기 이전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사용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강희안의〈화목구품(花木九品)〉에서는'무궁화(無窮花)'로 되어 있고《간거만록(間居漫錄)》《송남잡지(松南雜識)》에서는"목근의 속명을 무궁화(無窮花)라 한다"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홍만선의《산림경제》〈귀문원(龜文園)〉에서는 "목근은 무궁화(舞宮花)이다"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진고사책(陳古寫冊)》을 원본으로 하는《산림경제》〈양화편(養花編)〉의 근(槿)조에서는 '근(槿)'은 곧 무관화(舞官花)라고 하고〈복거편(卜居編)〉에서는 단순히 무관(舞官)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여기에서 무관화라고 표기한 것은 지역에 따라서 그렇게도 부르고 있었는지 아니면 무궁화(舞宮花)라는 한자 표기에서 '궁(宮)'자를 '관(官)'자로 오기(誤記)를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근세조선에 들어와서는 한글로 '무궁화'라고 쓴 예를 여러 군데서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사성통해(四聲通解, 1517)》: 槿 - 무궁화 ?《훈몽자회(訓蒙字會, 1527)》: 槿 - 무궁화근, 蕣 - 무궁화? ? 동의보감(東醫寶鑑, 1613)》: 木槿 - 무궁화 ?《물보(物譜, 1745~1826)》: 木槿 - 무궁화 ?《자류주석(字類註釋, 1856)》: 槿 - 무궁화근, 蕣 - 무궁화?, 芸 - 무궁화츤, ? - 무궁화단 여기에서 무궁화란 이름이 형성된 경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무궁화는 목근(木槿)의 음이 변해서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목근의 중국식 발음은 '무친(muchin)'과 비슷한 소리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 한자음이 '목근'으로 정착되고 나서 '목근〉무근〉무궁'으로 변음이 되고 여기에 한자음을 맞추어 '무궁화'로 표기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목면(木棉)'이 '무명'으로 변한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둘째로 무궁화란 말은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쓰여 오던 순수한 고유어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호남의 일부지방에서는 무궁화를 무강나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무궁으로 변음이 되면서 여기에 한자음을 붙여 표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또 전남 완도지방에서는 '무우게' 또는 '무게 꽃'으로 부르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도 비슷한 한자음을 붙여 무궁화로 변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무궁화란 명칭이 목근의 한자음이든 고유의 명칭이든 간에 '무궁'의 한자를 어떻게 쓴다는 것이 처음부터 일정한 한자로 정해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무궁(無窮)' 외에 더러는 '무궁(無宮)' 또는 '무궁(舞宮)' 등으로 표기되기도 했던 것 같다. 한편《화암수록》의〈화목구등품제〉에는 '무궁(蕪?)'으로 씌어 있다.

 

그러나 '무궁(無窮)'은 무궁화의 속성과도 일치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희구하는 본질인 무강(無彊)·영구·만세 등의 뜻을 가지고 있어 점차 '무궁화(無窮花)'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무궁화를 '무쿠게'라고 하는데 이것은 목근이 전화해서 이루어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혹은 무궁화에서 유래된 것이라고도 한다.

 

③ 훈화초(薰華草/薰花草)

훈화초(薰花草)는《산해경》에서 우리나라를 군자국으로 일컫는 항목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무궁화의 별칭이다.《산해경》은 동진(東晋) 때 곽박(郭璞,318~324년)이 지은 지리서인데 이때는 고구려의 미천왕(美川王) 때에 해당한다. 이로 미루어 고구려에 무궁화가 자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이 훈화초가 무궁화라는 것은 《산해경》에서 '훈(薰)'자 대신에 '근(菫)'자를 사용하기도 한다 하였고 또 그 꽃은 조생모사(朝生暮死)한다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무궁화를 훈화초라 한 것은 그윽한 향기를 지니고 있고 눈부시게 화려한 꽃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④ 조개모락화(朝開暮落花)

조개모락화(朝開暮落花)·조생모락화(朝生暮落花)·조생석사(朝生夕死)·조생석운(朝生夕隕) 등은 모두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떨어지는 꽃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아》《본초강목》등에 이름이 보이고 중국의 시가에서도 흔히 등장한다. 그런데 이 말은 무궁화의 옛 별칭으로보다는 무궁화의 꽃의 생태를 설명하는 말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명칭은 무궁화의 꽃의 생태를 설명하는 말에 자연스럽게 '꽃(花)'이란 글자를 붙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이아》의〈석초(釋草)〉에서 무궁화의 별칭인 단(?)과 친(?)을 설명하면서 "즉 조생모락화를 말하는데 오늘날에는 목근이라 한다(卽 朝生暮落花也 今亦謂之木槿)"라고 하였는데 이로 보면 처음에는 조생모락화로 부르다가 뒤에 목근으로 부른 듯하다.

 

⑤ 조균(朝菌)·조화(朝華)·조생(朝生)

조균이라는 별칭은〈번니부(藩尼賦)〉의 서(序)에 나오는데 우리나라의《성호사설(星湖僿說)》에 인용 소개되고 있다. 조균은 흙에서 나는 버섯의 일종인데 어두운 밤에 생겨나서 새벽빛이 생겨날 무렵 사라지고 마는데 중국에서는 가장 짧은 생명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무궁화를 조균으로 별 칭하는 것은 그 꽃의 단명함에 있는 것이다. 송나라 장유(張兪)의〈목근시(木槿詩)〉에 "조균은 일생 동안 그믐과 초하루를 알지 못한다(朝菌一生迷晦朔)"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조균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 꽃이기 때문에 초하루도 알 수 없고 또 그믐도 모를 것이라고 한 것이다. 조화(朝華)와 조생(朝生)이란 별칭도 조균과 같은 취지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진(晋)나라 노심(盧諶)의〈조화부(朝華賦)〉에 "뜰 옆의 고운 나무 바라다보니 조화가 그리워 보고 싶구나(覽庭遇之嘉木 慕朝華之可玩)"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또 부원(傅元)의〈조화부(朝華賦)〉서(序)에 "조화는 아름다운 나무다. 혹 흡용(洽容)이라고도 하고 혹은 애로(愛老)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의 흡용이나 애로는 같은 글에서 순화(蕣花)를 그렇게 부른다고 적고 있다.

 

조생(朝生)에 대해서는《여씨중하기(呂氏仲夏記)》〈목근영주(木槿榮註)〉에 "목근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떨어진다.〈잡가(雜家)〉에서는 이를 조생이라고 말한다. 일명 순(舜)이라고도 한다(木槿 朝榮暮落 雜家謂之朝生一名蕣)"는 기록을 볼 수 있다.

 

⑥ 순화(舜華)·순영(舜英)·순(蕣)·순(舜)

순화란 명칭은《시전》〈정풍(鄭風)〉과 《이아》 등에 나온다. 또 순(舜)은 송나라 육전(陸佃)이 지은 《비아(?雅)》,《본초강목》 등에 나온다. 순(蕣)은 '무궁화 순'자이며 '舜'과 통한다고 하였다. 여기서의 순(舜)은 일순(一瞬)이라는 뜻을 담고 있을 것이다. 꽃이 순간적으로 진다는 뜻에서 이러한 명칭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화암수록》에 실려 있는 화암(花菴)과 안사형(安士亨)간의 편지에서는《시경》에서 "얼굴이 순영과 같다(顔如舜英)"고 한 글에서 "순영은 무궁화의 흰 것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미인의 얼굴에 비유한 무궁화의 꽃은 흰꽃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말한 것일 뿐이고 순(舜)이 반드시 흰 무궁화만을 가리킨 명칭이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또 이때의 순(蕣)은 초본 성 관목인 부용을 지칭하는 것 같다는 주장도 있다.3)

 

⑦ 일급(日及)

일급은, 무궁화 꽃은 "햇빛 따라 있게 된다" 즉 아침에 햇빛을 받아 피었다가 저녁에 해와 함께 진다는 데서 주어진 이름이라 생각된다. 해가 비치는 광명은 알고 어둠의 존재는 모르는 것이 무궁화라는 것이다. 일급은《이아》《본초강목》 《포박자》등의 문헌에 나온다.

 

⑧ 단(?)·친(?)

《이아》에서는 무궁화를 단(?) 또는 친(?)이라고 한다 했다. 또《화사(花史)》에서는 "꽃이 흰 것을 단이라 하고 붉은 것을 친이라 한다"고 하고 있다.

 

⑨ 번리초(藩籬草)

무궁화는 생울타리로 흔히 쓰고 있기 때문에 번리초라는 이름을 얻고 있다. 번리(藩籬)라 함은 울타리를 뜻한다. 그래서 순수한 우리말로 울타리 꽃이라고도 불렀다.

 

⑩ 학자화(?子花)

무궁화를 학자화 또는 학질 꽃이라 하기도 했다.《군방보(群芳譜)》목근조에 "목근은 어린이들은 가지고 놀기를 꺼리는데 학질병을 앓는다 하여 속명으로 학자화라 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아이들이 꽃을 함부로 꺾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손을 대면 학질이 걸린다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⑪ 사내(似奈)·이생(易生)·무숙화(無宿花)

무궁화의 특이한 별칭으로 사내·이생·무숙화가 있다.《독론(篤論)》에 이르기를 "일급(日及)은 꽃이 능금나무를 닮아 사내(似奈)라 한다"고 하였고 또《포박자(袍朴子)》에 "목근과 버드나무는 가지를 잘라서 심어도 살고, 이것을 거꾸로 심어도 살며 비스듬히 심어도 산다. 쉽게 사는 것이 이 나무보다 더한 것이 없다"라는 기록에 연유해서 이생(易生)이란 이름이 생겨났다. 무숙화(無宿花)라는 명칭은 당나라 백낙천(白樂天)의 시에 "근지무숙화(槿枝無宿花) 즉 무궁화는 잠이 없다"는 데서 온 것이다. 밤이 되기 전에 이미 꽃이 진다는 말이다.

 

⑫ 옥증(玉蒸)·화노(花奴) 등

무궁화의 이명은 위에서 설명한 것 외에도 옥증·화노·일화(日華)·형조(荊條)·여목(麗木)·추화(秋華)·흡용(洽容)·애노(愛老) 등 수없이 많다.

 

⑬ 무강나무·무우게꽃

무궁화의 순수한 우리말로 남쪽 해안지방에서는 무강나무·무우게꽃·무게꽃 등의 이름이 있었다. 김정상(金正祥)은 1955년에 펴낸《무궁화보(無窮花譜)》에서 "1923년 전남 완도군 소안면 비자리 앞 바닷가에 자라는 수십 주의 굵은 무궁화나무를 보았다. 마을 노인들은 무궁화라는 이름보다 '무우게'라고 부른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그는 무궁화라는 꽃 이름은 '무우게'에서 변한 것이라고 주장 하였다. 또 이양하(李敭河)는 그의 수필〈무궁화〉에서 호남지방 출신인 그의 친구가 어렸을 때부터 무궁화를 많이 보아왔으나 그것이 무궁화라는 것은 전혀 몰랐었고 '무강나무'로만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각주

1) 임경빈(任慶彬), 《나무百科(3)》, 일지사(一志社), 1988, p.148.

2) 일본 櫻井元의 주장. 麓次郞, 《四季の花事典》, 八坂書房, 1985, p.273.

3) 김대성·오병훈, 《꽃이 있는 삶》, 생명의 나무, 1997,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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